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80)화 (980/1,192)

제980화

서재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급박했다. 곤청롱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아무 말 없이 곤청유를 바라보았다. 곤청유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곤청롱의 눈과 마주치자 곧 냉정을 되찾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부황, 막북에 사람을 보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곤청롱이 가볍게 대답했다.

“누굴 보내신단 말입니까?”

곤청롱이 웃었다.

“너도 다 알고 짐을 찾아온 것 아니냐?”

곤청유가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황매의 뜻입니까?”

“앉아서 이야기하자.”

곤청롱이 의자를 가리켰다.

“짐은 아직 나랏일을 하는데 딸의 지휘를 받을 만큼 정신이 흐리지 않다. 그 아이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아… 짐은 곤청리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은 삼십여 년 전과 다르다.

곤청리는 내 아들을 죽이고, 네 동생을 죽였지. 짐도 너처럼 뼛속까지 원한이 맺혔다. 이에는 이로, 피는 피로 되돌려 주는 게 맞지. 하지만 그의 아들은 벌써 성인이 되었어. 게다가 딸린 가족들이 족히 삼백 명은 될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을 상상해 본 적 있니?”

잠자코 듣고 있던 곤청유가 물었다.

“부황은 후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언젠가 저들이 막북에서 돌아오면요?”

곤청롱이 껄껄 웃었다.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짐도 인정해야겠지. 막북은 험지다. 거기서 살아남거든 그때 다시 이야기하지.”

* * *

역시 곤청롱의 추측대로였다. 백천범은 닷새 후에 몽달을 떠나기로 묵용감과 약속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최대한 곤청롱과 시간을 보내려 했고, 묵용감도 부녀가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백천범에게 곤청롱은 여제와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여제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흐느껴 울 정도로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녀는 백천범에게 멀게만 느껴졌는데, 곤청롱은 달랐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녀 앞에서 눈물을 쏟았고 몇 번이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그건 깊은 정이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모습이었다.

어렵게 만난 아버지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백천범도 못내 아쉬웠다. 하얗게 샌 곤청롱의 머리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곤청롱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으며 그녀를 돌아봤다.

“왜, 무슨 일이 있느냐? 아버지에게 말해라. 내가 다 해결해 주마.”

백천범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럼 곧 떠나는 거니?”

곤청롱이 물었다. 백천범은 조금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곤청롱은 자신의 짐작이 맞자 크게 웃었다.

“묵용감이 요 며칠 너를 따라다니지 않는 것을 보고 너희가 떠나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천범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 저희가 떠나온 지 오래되어서 아이들이 걱정됩니다. 이 년 정도 후에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뵈러 올게요.”

“그렇게 고생할 필요 없다. 내가 너희를 보러 가마.”

곤청롱은 잠잠한 호수를 응시했다.

“아비도 나이가 들어서 이제 그런 야심도 없다. 이 자리는 네 오라비더러 맡으라고 하고 나는 평범한 노인들처럼 자손들이나 보며 지내련다.”

백천범은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감격했다. 곤청롱은 정말 남류청과는 달랐다. 그는 황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생에서는 포기할 줄 알아야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남류청은 죽는 순간까지도 그 이치를 깨우치지 못했다.

그녀의 죽음을 떠올린 백천범의 마음이 어지러웠다. 남류청을 미워한 적도 있었고 그녀에게 실망한 적도 있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은 종잇장처럼 얇기만 했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의 목숨을 묵용린이 앗아간 것일까. 백천범은 곤청롱이 걸음을 멈춘 것도 모르고 계속 걷고 있었다.

“범아.”

백천범이 고개를 들어보니 불탑 앞이었다. 이곳은 그녀도 와 본 적이 있었다. 동궁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저 반월형 문을 지나면 바로 동궁전이었다. 왜 이곳에 왔는지 의아했던 그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곤청롱은 이미 계단 위를 올라가고 있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백천범은 곤청롱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이 불탑은 사실 신묘였다. 탑처럼 만들어서 불탑이라고도 불렸는데, 황궁 안에 지어진 신묘는 바깥에 있는 것들보다 아름다웠다. 백천범은 제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조각들을 천천히 감상했다. 신묘에 들어간 곤청롱은 뒤에서 꾸물거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어서 들어와라.”

백천범도 서둘러 따라 들어갔다. 신묘 안은 생각보다 컸다. 안엔 거대한 불상이 자비로운 모습으로 중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백천범은 얼른 손을 모아 합장하고 인사를 드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곤청롱은 안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안쪽엔 작은 크기의 불상들이 다닥다닥 양쪽 벽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곤청롱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방을 지나 더 앞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백천범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곤청롱은 단숨에 대여섯 개의 방을 지나고 나서야 그녀를 돌아보았다. 순간 백천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한참 동안 제단 위에 놓인 위패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네 어머니의 위패를 모셔 놨다. 비록…….”

곤청롱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죄가 많은 여인이지만 그래도 네 어머니이다. 범아, 네 어미에게 향을 올려라.”

백천범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밉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남류청이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피가 끓어올랐다. 그녀가 죽을 만큼 미웠지만 또 죽는 걸 원친 않았다.

곤청롱은 향에 불을 붙여 그녀에게 건넸다. 백천범은 무표정한 얼굴로 향을 받아 들어 위패를 향해 삼배를 올리고 향로에 꽂았다. 간단한 의식이었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향을 올리고 난 곤청롱은 그녀를 데리고 탁자로 가서 앉았다.

“오늘 아버지와 함께 여기서 소식素食(채식 위주의 소박한 음식. 즉 정결하고 순수한 음식, 마음의 평화를 주는 음식)을 먹고 가자꾸나.”

백천범은 멀리 있는 위패를 보며 알겠다고 했다.

소식이 하나씩 차려졌다. 푸른 유약을 바른 찻잔에 하얗고 향긋한 우유차가 담겨 나왔다. 소과素果와 함께 우유차를 마시니 또 새로운 맛이었다. 하지만 얼핏얼핏 보이는 위패는 그녀의 마음에 바늘처럼 박혔다. 찻잔을 들어 우유차를 마시며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곤청롱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범아, 나와 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니?”

백천범은 깜짝 놀랐다. 곤청롱이 그런 말을 꺼낼 줄 몰랐기에 그녀도 잠시 머뭇거렸다.

“말씀해 주신다면… 듣겠습니다.”

곤청롱은 찻잔을 내려놓고 소과 하나를 집어 먹었다. 몇 번 씹더니 그 맛을 음미했다. 백천범은 그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삼십여 년 전 몽달도 병력이 막강해서 어떤 적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동월과도 필적할 만한 수준이었지. 하지만 남원은 대외 개방을 하지 않았던 아주 신비롭고 작은 나라였지. 몽달과는 동월을 사이에 두고 있었어. 평소 같으면 우린 만날 접점이 없었단다.”

그는 입가에 웃음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남원에서 갑자기 수레 가득한 선물과 함께 사절을 보내 나를 찾아왔지. 몽달의 비호를 받고 싶다고 하더군. 남원이 왜 가까운 나라를 버리고 멀리 까지 와서 도움을 청하는지 나로서는 의외였단다. 분명 가까운 동월이 있는데 말이야.”

백천범 또한 몽달과 남원의 지리적 위치를 떠올리며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의심스러웠던 난 캐물을 수밖에 없었어. 남원국 사절은 동월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남원에게는 몽달이 제일 안전하다고 하더구나. 남원에게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월이 훨씬 위험하다고. 만약 동월이 남원을 공격한다면 몽달이 그 후방을 공격해 달라고 말이야. 남원고 몽달이 앞뒤로 협공해야만 동월에 승산이 있다고 했다.”

늘상 여제가 걱정했던 남원의 미래 또한 백천범이 모르지 않았다.

“그 설명이 상당히 합리적이었어. 그리고 남원에서 보낸 선물들은 정말 훌륭했단다. 내 앞에서 커다란 상자들을 하나씩 여는데, 금으로 가득한 상자도 있었고 상아며 옥, 향료 등등… 하나같이 보기 드문 보물들이었다. 마지막 상자만 남았을 때 그 사절이 웃으면서 말하더구나.

‘폐하, 이건 남원에서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폐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이야. 사실 그자의 말을 듣고 몹시 기대했단다. 그 상자가 천천히 열리고, 네 어머니를 본 거란다.”

* * *

남원의 사절은 가슴에 오른손을 대고 인사를 올리더니 아첨하듯 웃었다.

“폐하, 이건 저희 남원에서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민왕珉王 전하도 폐하 마음에 드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곤청롱은 의자에 기대어 무표정한 얼굴로 그 나무 상자를 살펴보았다. 총 여덟 상자 중 열어진 일곱 상자 안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했다. 이 마지막 상자에는 과연 무엇이 들었길래 사절이 특별히 설명까지 하는 걸까? 황제는 멀리서 나무 상자를 살펴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귀국의 귀한 보물이 과연 무엇인지 어서 보여 주시게.”

천천히 덮개를 열어보니 물건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곤청롱의 시야엔 그저 빈 상자 같았다.

그때 사절이 품에서 조롱박 모양의 물건을 꺼내더니 입에 가져가 불기 시작했다. 대전에 화려하고 경쾌한 곡조가 울려 퍼지자 시종들의 안색이 급격히 달라졌다. 남원 사람은 뱀을 잘 부린다고 들었는데… 설마 뱀을 부리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무 상자에서 뱀이 튀어나올까 봐 살짝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드디어 나무 상자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뱀이 아니라 가늘고 하얀 손이었다. 고작 손 하나였지만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절은 은밀히 곤청롱을 쳐다봤다. 그의 눈은 차가웠지만 한순간도 그 상자 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절은 만족스러운 듯이 더 경쾌하게 연주를 이어 나갔다. 이내 새까만 머리가 보이더니 아직 몽롱해 보이는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며 저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살폈다. 깜짝 놀라기는커녕 그녀의 단꿈을 방해한 게 짜증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궁에도 미녀는 많았지만 이 사람과 비교하면 미녀라는 말도 무색했다. 그녀의 등장에 어두웠던 대전도 환히 밝아졌다. 나른하게 상자에 앉아 있던 그녀는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녀에게 눈길을 준 이들 모두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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