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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79)화 (979/1,192)

제979화

그는 곤청리의 측근과 대신을 숙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곤청리의 아들도 죽이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대로 두면 후환이 끝나지 않을 테니 화근을 철저히 없애야 했다! 한데 만약 곤청각이 그의 아들이라면… 그의 판단이 잘못된 거라면?

곤청롱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복도로 나가 저 멀리 처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그의 슬하에 일남일녀가 있었다. 딸은 시집을 갔으니 언젠가 떠날 것이고, 그의 곁에는 곤청유만 남을 것이다. 그는 늙었고 마음의 상처도 받았었기에 남녀 간의 정에는 벌써 흥미를 잃었으니 앞으로 다른 자식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쓸쓸했다.

하지만 살려 둔다면? 지난 몇 년 동안 도원곡에 보내 온 정보들을 떠올려 보면 곤청각은 분명 좋은 인재였다. 능력은 곤청유에게도 뒤지지 않으니 기회가 있다면 궁에 다시 정변이 일어나지 않을까? 고민이 깊어질 무렵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아버지.”

곤청롱은 백천범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만면에 웃음이 번졌다.

“범아, 어쩐 일로 나왔느냐? 밖이 춥다. 들어가자.”

백천범은 손화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게 있어서 춥지 않습니다. 아버지야말로 한참을 여기 서 계시던데…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곤청롱은 그녀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어 고민하고 있던 것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백천범이 웃었다.

“어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아버지께서 모르시는 답은 곤청각도 모를 것입니다!”

곤청롱이 멈칫하더니 그 말을 깨달았다. 그래, 그가 모르는 것은 곤청각도 모른다. 곤청각이 자신의 신분을 의심하고 있다면 역모를 일으킬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다. 역모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뭐가 두렵겠는가?

한참을 생각해도 답을 얻지 못했던 일이 백천범의 말 한마디에 모두 해결됐다. 곤청롱은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역시 우리 딸이 대단하구나. 한마디 말로 아비의 숙제를 풀어 내다니.”

“제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 상황에 계시고 저는 바깥에 있다 보니 사안을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 것뿐입니다.”

백천범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벌써 속으로 결정을 내리신 것 아닙니까?”

곤청롱은 잠시 당황했다.

“무슨 뜻이냐?”

“곤청리의 다른 아들들은 모두 가둬 두셨지만 곤청각만 연금 중입니다. 아버지께 다른 계획이 있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곤청롱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총명한 딸의 모습에 웃으며 떠보듯이 물었다.

“곤청리의 다른 아들들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백천범이 잠시 생각했다.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들불이 다시 피어오를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들을 없앤다 해도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곤청리도 아버지의 아들을 죽였으니까요.”

“그들을 없애라는 뜻이냐?”

백천범이 웃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곤청각을 걱정하시는 것은 그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크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곤청롱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넌 정말 네 어머니와 다르구나.”

백천범이 그를 보면서 말했다.

“아버지와 곤청리가 다른 것입니다.”

곤청롱이 말없이 땅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백천범이 말했다.

“아버지, 곤청각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뭐 하러 만나려 하느냐?”

“제가 동궁에서 지낼 때 저를 잘 챙겨 줬습니다. 지금은 그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니 제가 가서 살펴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잠시 생각하던 곤청롱은 거절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더 데리고 가라.”

백천범은 뒤를 돌아보았다. 영십삼, 영십오, 영십육이 적당한 거리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곤청롱은 멀어져 가는 그녀를 한참 지켜보았다.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곤청유가 물었다.

“황매는 어딜 가는 겁니까?”

곤청유가 물었다.

“곤청각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그녀가 곤청각을 만나러 가는 것은 놀랍지 않았지만 묵용감이 따라오지 않은 것은 의외였다.

“혼자서요? 묵용감은 안 따라갑니까?”

온종일 황매 옆에 찰싹 붙어 다니던 녀석은 오늘 어쩐 일로 보이지 않지?

곤청롱은 그의 말에 눈썹을 찌푸리더니 백천범이 머무는 궁전을 바라봤다. 저 멀리 계단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묵용감이었다.

“어쩌면…….”

곤청롱이 한숨 쉬었다.

“범아와 어떤 약속을 했는지도 모르지.”

“무슨 약속 말입니까?”

곤청유가 물었다. 곤청롱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제 떠나려는 거겠지… 또 무슨 약속이겠나. 그러니 저 녀석이 백천범과 그들의 만남을 방해하지 않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곤청롱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곤청유가 걱정스러운 듯이 그를 바라봤다.

“부황?”

“괜찮다.”

곤청롱은 뒷짐을 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백천범이 떠나는 것은 섭섭했지만 그는 여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백천범의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녀는 자신이 나고 자란 동월을 좋아했고, 또한 자신의 부황인 묵용감을 좋아했다. 곤청롱 또한 그녀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존중했다. 나중에 퇴위하고 자신이 동월에 가면 되니 별일도 아니었다.

* * *

공교롭게도 곤청각이 연금 중인 곳은 곤청리가 백천범을 숨겨 두었던 곳이었다. 외지고 조용한 곳이라서 그런지 사람을 가두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이곳에 갇혀 지낸 후 태자비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는 아들을 안고 울면서 곤청각에게 사정했다.

“이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왜 명주 공주에게 부탁하지 않으십니까? 그녀가 동궁에 머물 때 당신이 후하게 대해 주지 않았습니까? 이제 당신이 어렵게 되었으니 공주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곤청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백천범을 궁에 잡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백천범이 자신의 이부형제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기울었다. 그럼에도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여제의 아들이 아니었고, 그의 어머니는 예전의 용비였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그러니 백천범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생각하면 그의 고민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래서 백천범이 문을 들어설 때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녀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걸까?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었다. 얼마 전 이곳에 갇혀 있던 여인은 귀하디귀한 명주 공주가 되었고, 귀하디귀한 태자는 이곳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태자비도 백천범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녀는 얼른 마음을 가라앉히고 백천범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조용히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아들을 데리고 나가면서 곤청각에게 눈짓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암시와 애원이 담겨 있었다. 곤청각도 알고 있었지만 그저 씁쓸한 마음이었다. 백천범은 집을 둘러봤다.

“좁은데 식구들이 지낼 만해요?”

곤청각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태자였던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와 그녀를 구했었다. 이제 그녀가 찾아와 자신의 안부를 묻다니. 그의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이런 모습을 백천범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쏟아부었던 마음이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백천범이 그의 앞에 앉았다.

“나와 이야기하기 싫어요?”

곤청각은 그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는 실패도 좌절도 참을 수 있었지만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백천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남매라고 해도 이야기하지 않을 거예요?”

곤청각이 번쩍 고개를 치켜들고 미심쩍은 듯이 그녀를 보았다.

“우리의 어머니는 달라도 아버지는 같은 이복 남매일 수도 있잖아요.”

백천범이 계속 이야기했다.

“그날 대전에서 곤청리가 이야기할 때 당신도 있었죠.”

곤청리가 그 이야기를 할 때 곤청각도 대강 들었다.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예전엔 자신의 생모를 알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 생모의 존재를 알아내자 이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곤청리와 곤청롱, 그는 도대체 누구의 아들일까?

이토록 상식을 벗어난 일들을 생각하던 그는 그저 우스웠다. 그 답은 아무래도 영원한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곤청롱이 그를 살려 줄까? 그를 살려 준다면, 나중에 그도 곤청롱을 용서할 수 있을까? 백천범은 여전히 말 없는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내 남동생인 것 같아요.”

곤청각은 그 말에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입니까?”

백천범은 다시 한번 말했다.

“당신이 내 남동생인 것 같아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확실해요.”

곤청각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문질렀다.

“왜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직감이 그래요.”

백천범이 웃었다.

“내 직감은 아주 정확하거든요. 누구에게나 불확실한 일들이 있잖아요. 답을 모르겠는 부분은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우린 계속 살아가야 하잖아요. 기쁜 것도 언짢은 일도 모두 지나갈 거예요. 어쨌든 저에게는 동생이 하나 생겼고, 그리고 당신은 누나가 하나 생긴 거예요.”

곤청각의 눈이 서서히 빛나더니 주저하듯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저 시간이 필요하실 뿐이니 조금 참고 기다려 봐요.”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라고 당신을 보낸 건가요?”

“물론 아니에요. 둘의 성격이 비슷하네요. 멈춰 서서 지켜보기만 하지 먼저 발을 내딛지는 않아요. 하지만 둘 다 발을 내디뎌야 할 거예요. 그 발을 떼는 건 생각보다 쉬워요.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전 한 번도 그런 것들에 얽매인 적이 없어요. 그저 원하는 대로 일상을 보내고 싶었죠. 나에겐 오라버니는 셋이나 있지만 남동생은 없어요. 당신이 내 동생이 되어 준다면 정말 기쁠 거예요.”

곤청각은 가슴이 설렜다. 지난 며칠 동안 그는 가슴속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했다. 백천범의 말은 단비가 되어 그 불을 꺼 주었다.

“동생.”

곤청각은 동생이라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나이가 더 많으니 날 누나라고 불러야 해요.”

그녀는 격려하듯 그를 보았다. 곤청각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천범이 웃었다.

“내 얼굴이 남들보다 두꺼운 편이에요. 그러니 당신이 원하든 아니든 난 당신을 동생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에게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기에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를 떴다.

곤청각은 대문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문밖에는 보초가 있어 나갈 수 없었다. 문턱을 사이에 두고 그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잘 가요.”

백천범이 돌아가고 나서도 그는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완전히 달라진 것도 같았다. 그는 창가에 서서 멍하니 담벼락의 원추리를 보고 있었다. 늘 뻣뻣하게 굳어 있던 자신의 턱이 한결 부드러워진 걸 그는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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