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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78)화 (978/1,192)

제978화

“공무가 중요하지요. 그리고 저도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백천범의 말에 곤청롱은 감개무량한 듯 바라봤다.

“네가 어릴 때는 내가 곁에 있어 주지 못했잖니. 내 눈에 너는 여전히 어린아이란다.”

부녀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쪽에서는 묵용감이 차가운 눈으로 곤청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원곡의 말직 총관이 몽달의 태자 전하라니… 잘도 숨기셨습니다.”

곤청유도 따라 웃었다.

“저야말로 남북을 종횡무진하는 황 주인장이 그 유명한 동월 황제일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제 매부라니 말입니다.”

묵용감은 매부라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처남들 얘기를 하면 그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백장간, 남제화, 그리고 곤청유. 묵용감은 분명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그들을 손위 처남이라 불러야 했다. 곤청롱은 얼핏 들리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그가 곤청유에게 손짓했다.

“유아, 와서 네 동생을 만나 보렴.”

법도대로라면 백천범이 곤청유를 찾아가 예를 올렸어야 했지만 곤청롱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곤청유는 백천범에게 다가가 같은 항렬에게 보이는 예를 갖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다, 동생.”

백천범도 얼굴을 붉히며 얼른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라버니.”

남매간에 우애 깊은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 * *

곤청롱이 딸을 인정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조서를 내려 백천범을 명주明珠 공주로 책봉한 것이었다. 그 봉호만 봐도 그가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백천범은 곤청롱의 보물일 뿐만 아니라 몽달에서 가장 눈부신 보석이었다.

그는 백천범의 신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공주의 책봉식은 성대하게 거행했다. 백천범은 몽달의 전통 의상을 입었는데, 정교한 기장旗裝(만주족 부녀자들의 전통 복장)은 아담한 그녀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곱게 땋은 머리를 오색 띠로 묶으니 꼭 어린 아가씨 같았다.

그녀는 무릎 아래 부드러운 융단을 깔고 대고 대전 중앙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는 목소리를 높여 조서를 읽었다.

“짐의 깊은 사랑으로, 보물처럼 아낄 것이다.”

그 소리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이번 생에 아무런 아쉬움도 여한도 없었다. 자신을 목숨처럼 아끼는 부군이 있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고, 그리고 이제 자신을 아끼는 아버지도 생겼다.

생에 녹아든 혈육의 정은 각고의 고초를 겪으며 그녀가 찾은 평안함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사생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행복했다.

곤청롱은 조서를 낭독한 후 직접 단폐에서 내려가 백천범에게 공주의 신분을 나타내는 금정관을 씌웠다. 머리 위에 높이 솟은 금정관이 찬란하게 빛났다. 하지만 머리에 쓰고 있기에는 금정관이 너무 무거워 백천범이 자꾸 만지작거렸다. 곤청롱이 곧 눈치를 채고 옆에 있던 시종에게 분부했다.

“금정관을 썼으면 의식은 마친 것이니 계속 쓰고 있을 필요는 없다. 가서 공주의 금관을 가져와라.”

평소에 사용하는 장신구 금관도 진작 준비해 두었다. 황제는 금정관을 벗기고 가벼운 금관으로 바꿔 주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찬찬히 보다가 얼굴의 눈물 자국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착하지, 울지 말아라. 이제 아버지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네가 매일 웃으며 지냈으면 좋겠구나.”

백천범은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또렷한 그녀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빛났다. 하얀 얼굴 위에 볼이 발그레해지자 마치 연지를 바른 듯 아름다웠다. 이 세상에 자신의 딸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없다고 생각한 곤청롱은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는 백천범의 손을 잡고 단폐로 올라갔다. 옥좌 오른쪽에 오색 비단 자리를 깔아 놓은 커다란 의자가 있었다. 바로 공주의 보좌였다. 백천범은 거기 앉아 문무백관의 축하를 받았다. 옥좌로 돌아와 아래편에 앉은 딸을 보는 곤청롱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벅차올라 이제야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묵용감은 아래쪽에 앉아 백천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묵용감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공주의 자리가 아니라 그저 진심 어린 가족의 사랑, 자신을 아껴 주는 아버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남류청 때문에 크게 절망했지만, 드디어 아버지 곤청롱에게서 위안을 받았다.

저녁이 되자 곤청롱은 궁에서 명주 공주를 위해 큰 연회를 열었다. 백천범은 산더미 같은 선물을 받았다. 그중 황제가 내린 선물이 가장 많았다.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술을 많이 마신 덕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붉어진 눈으로 계속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녀만 보면 바보라도 된 것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그는 기분이 좋아져 아랫사람들에게 창고를 열어 백천범에게 물건을 내주라 분부했다. 백천범은 그 말에 난처해했다.

“아버지, 더 꺼내면 창고가 비어 버리겠어요.”

곤청롱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비면 비는 거지! 나한테 딸이라고는 너 하나인데 뭐든지 다 네 것이다. 너에게 혼수로 주마.”

“아버지, 저는 벌써 출가한 몸인걸요. 혼수는 필요 없어요.”

백천범의 말에 곤청롱은 눈을 끔쩍이면서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러면 짐의 외손녀에게 주지! 손녀에게 혼수로 주마.”

자리가 파할 무렵 술에 취한 황제를 시종들이 침궁에 모셨다. 그는 한밤중 갈증이 생겨 물을 가져오라 분부했다. 그런데 곤청유가 물을 들고 들어왔다.

놀란 곤청롱이 물었다.

“유아, 이리 늦었는데 어찌 쉬지 않고 여기 있느냐?”

곤청유는 따뜻한 차를 건넸다.

“전에는 부황께서 술에 취하시면 늘 소자가 곁에서 모셨잖습니까? 아랫사람들이 부황의 습관을 모를까 하여 왔습니다.”

따뜻한 차를 몇 모금 마셨더니 곤청롱은 훨씬 살 만해졌다. 술을 마신 후에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처음에 곤청유에게 관리를 맡긴 것은 그의 신분을 감추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의 능력을 키우기 위함도 있었다.

오랜 시간 도원곡의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곤청유가 챙겼다. 매사에 조심스럽고 침착한 그는 체계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궁으로 돌아와 태자가 된 지금도 한밤중까지 그의 침상 곁을 지켰다. 그 모습에 곤청롱은 마음이 놓였다. 차를 마신 후 고개를 들어 곤청유를 보았다.

“제일 먼저 태자가 궁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렸어야 하는데… 짐이 네 동생부터 책봉했구나. 짐에게 마음이 상한 건 아니겠지?”

곤청유도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소자는 어렸을 적부터 부황의 곁에 있지 않았습니까? 황매처럼 외롭게 고생하진 않았습니다. 소자도 부황처럼 최대한 보상해 주고 싶습니다.”

곤청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다. 네 황매가 홀로 고생을 많이 했더구나.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다. 명주 공주로 책봉해서 최고의 영예를 주었다지만, 이미 만회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 그저 그 아이에게 잘… 더 잘해 주고 싶을 뿐이야.”

“소자도 이해합니다. 소자도 부황처럼 황매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해 주고 싶을 뿐입니다.”

* * *

곤청롱 부자가 비밀리에 황궁을 떠날 때는 아무도 몰랐다. 돌아올 때는 큰 소란이 있었지만 모두들 입을 꾹 닫고 그 일을 꺼내지 않았다. 황실의 추문을 감히 떠벌릴 사람들은 없었으니 곤청롱은 순조롭게 다시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곤청유의 상황은 달랐다. 그가 돌아와 보니 궁에는 다른 태자가 있었다.

곤청롱은 선포했다. 어릴 때 궁을 떠난 곤청유가 요양을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예전 태자였던 그의 자리가 원상 복구됐다. 원래 태자였던 곤청각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그런 사람이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깜짝 놀랐다. 오랫동안 태자 자리에 있던 곤청각이 이제 태자가 아니라니? 게다가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고 소문난 태자가 다시 돌아왔다니!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또 다른 소식이 들렸다. 곤청각은 그저 태자를 대신하는 대태자였을 뿐이라는 거다.

백성들은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몽달에선 적황자가 대통을 이어받기 때문에 폐위된 것이 아니라면 대태자는 언제든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한동안 이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이내 정리되었다.

사람들은 그보다 동월군이 성에 들어온 것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후 동월의 황제와 황후가 몽달 황궁에 손님으로 와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거기다 얼마 전 책봉한 명주 공주가 바로 동월의 황후이며, 성안의 동월군은 모두 황실의 호위대라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성안의 공포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곤청롱은 곤청리보다 훨씬 강력하게 조정을 다스렸다. 어려서부터 후계자 교육을 받아 온 그는 문무를 겸비하고 인품과 능력을 두루 갖춘 황제였다. 그의 등장으로 불과 며칠 만에 몽달 조정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병권 대부분을 되찾고 능력 있는 관리를 발탁했다. 곤청리의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실권을 빼앗아 이빨 빠진 호랑이로 만들었다.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천자가 바뀌면 신하도 바뀌는 법, 옛 주인이 그들에게 아무리 큰 은혜를 베풀었다 해도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가 능력자인 것이다.

그가 대대적으로 조정을 개혁하는 과정에 어떤 걸림돌도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그가 손 쓸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전 태자였던 곤청각이었다.

곤청리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 그의 뇌리에 남아 있던 것이다. 용비라면 그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남류청이 몽달에 오기 전 그의 총애를 받았던 용비는 아름다운 외모에 부드럽고 다정해서 이해심도 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너무 입이 무겁고 조용해서 총애를 잃었다. 그래도 그녀는 원망하지 않고 후궁에서 조용하게 지내고 있었다.

후에 남류청과 싸우던 그의 눈에 용비가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용비의 처소로 향했다. 용비는 평소처럼 따뜻하고 다정했고, 이해심이 깊었다. 그는 거기서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궁전에 머물다 한밤중에 떠났다. 그는 남류청이 후에 알게 될까봐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

그 후, 단 며칠 사이에 몽달에 큰 변화가 생겼고 그는 독에 중독된 채 황궁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곤청리가 몽달 황제가 되어 그의 비와 잠자리를 가졌다.

용비는 곤청각을 낳았다. 하지만 곤청각은 도대체 누구의 아들인가? 그는 모른다. 곤청리도 모른다. 용비 자신도 제대로 모를 것이다. 곤청각의 신분은 미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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