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7화
“이야기 끝났소?”
묵용감은 놀리는 듯 웃으며 백천범에게 물어봤다.
“인정하기로 했소?”
곤청롱은 화가 나 눈을 부릅떴다.
“잊지 말게, 난 이제 자네 장인이네!”
묵용감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장인인지 아닌지는 내 부인이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곤청롱이 화를 숨기지 못했다.
“감히 자네가 내 나라에서 무엄하게 구는가? 내가 자네를…….”
묵용감은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저를 어쩌시려고요?”
그리고는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됐소, 그냥 갑시다. 당신의 부군에게 다정하지 않으시군.”
곤청롱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뭐라 하지 못했다. 혹여 묵용감의 말에 설득이라도 될까 조마조마한 얼굴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그 모습이 재미있었다. 묵용감은 분위기를 가볍게 해서 그녀와 곤청롱의 긴장을 풀어 주려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묵용감을 가볍게 때리며 말했다.
“무례하게 굴지 말아요. 내 아버지는 당신 장인어른이에요.”
‘아버지’ 한 마디에 곤청롱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터져 버린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는 얼른 돌아서 소매로 자신의 얼굴을 감췄다. 오직 묵용감만은 멈추지 않고 입을 놀렸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오. 난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소.”
백천범은 그에게 살짝 눈을 흘기더니 곤청롱 앞으로 다가가 용기를 내어 불렀다.
“아버지.”
겨우 멈췄던 곤청롱의 눈물은 아버지라는 소리에 다시 터져 나왔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어깨까지 들썩였다. 백천범은 어쩔 줄 몰라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묵용감을 보았다. 묵용감은 영 황당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당신 아버지는 참 잘 우시는군, 몽달의 파도는 피는 흘려도 눈물은 보이지 않는 것 아니었소?”
백천범이 그의 손목을 조용히 꼬집었다. 묵용감은 신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멀리 서 있던 몽달 병사들 또한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의 황제가 눈물을 보이다니! 혹 황제의 약한 모습을 봤다는 이유로 죄를 물을까 봐 그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곤청유 또한 곤청롱의 이런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곤청롱은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인 적 없었다. 그는 곤청롱을 위로하려다가 그 자리에서 주춤했다.
곤청롱도 오늘 체면이 땅에 떨어진 걸 알았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자신의 어깨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작은 손길에 복잡하고 불안한 마음들은 모두 사라지고 벅찬 기쁨이 차올랐다. 그녀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인정했다. 다시 황위를 차지한 것보다도 그것이 훨씬 기뻤다.
그의 마음속에서 빠져나온 무수한 빛들이 그의 마음을 비춰 주는 것 같았다. 그는 하늘이 자신에게만 불공평하다 생각했는데, 이제 그 모든 것이 가치 있게 느껴졌다. 곤청롱은 옷자락을 들어 눈물을 닦고 백천범의 손을 잡았다.
“착한 딸이구나.”
잡은 손의 온기가 전해지기도 전에 묵용감이 그녀를 다시 제 품에 넣고 뻔뻔하게 말했다.
“이미 다 큰 딸이니 조심해 주십시오.”
곤청롱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백천범만 바라보았다.
“네가 아비 곁에서 컸으면 훨씬 훌륭한 사위를 찾아 줬을 텐데.”
“세상에 저보다 더 나은 사위는 없습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우리 몽달 방방곡곡 훌륭한 파도들이 넘쳐 나는데 더 좋은 사람을 못 찾겠나.”
“황제보다 파도가 낫습니까?”
백천범은 머리가 아파 왔다. 묵용감은 그녀의 가족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는데 유독 남자 가족들과는 더 심했다. 백장간도 그렇고 남제화도 그랬다. 거기다 그가 애써 찾아 준 친부 또한 마땅치 않아 했다. 그녀가 말했다.
“배고파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이 소란스러워졌다.
“장인어른, 어서 음식을 준비해 주십시오. 제 부인은 배고픈 걸 못 견딥니다.”
곤청롱은 그 말을 듣자 소중한 그의 딸이 허기질세라 곤청유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네 여동생이 배가 고프다니 어서 음식을 준비시켜라.”
곤청유는 말이 없었다. 딸을 받아들이고 나니 태자는 주워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묵용감이 한바탕 장난을 치니 백천범과 곤청롱도 서로를 대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처음의 어색하고 경계 가득한 눈빛도 사라져 있었다.
* * *
도원곡에서 오랫동안 수양을 한 곤청롱에게 황권에 대한 갈망은 없었다. 그는 다시 옥좌에 앉고 싶지 않았지만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가 대권을 잡아야만 몽달이 예전의 질서를 되찾을 수가 있고 양위는 그 후의 이야기다.
그가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어도 그날 대전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 그 일에 대해서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모두 눈과 귀가 멀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굴었다. 같은 사람, 같은 이름, 같은 황제였다.
오래된 대신이나 새로운 대신 모두 황제를 공경했다. 시종들도 규율에 따라 행동했다. 모두 예전과 같았다. 황궁 안의 질서도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보기에는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곤청리의 비들과 아들들은 모두 연금되어 있었다. 대신들이나 백성들에게는 누가 황제가 되든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만, 후비나 황자들에게는 아니었다. 죽은 가짜 황제는 후비들의 남자였고 황자들의 생부였다.
곤청리는 곤청롱의 후비와 아들을 죽였다. 이제 곤청롱이 그들을 죽인다면 그것 또한 공평한 일이었다. 후비와 황자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 뿐, 울며불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곤청롱은 한참이나 자신 앞에 놓인 명단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황위에 올랐으니 제대로 청산해야 했다. 그의 앞에 있는 건 구족을 멸하는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곤청리의 후비와 아들들 말고 권세 높은 대신들도 있었다.
천자가 바뀌면 대신들도 바뀐다. 곤청리가 황위에 오르고 나서는 곤청롱에게 충성했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자신의 사람으로 채워 넣었다. 그들이 아직까지도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언젠간 반역을 꾸밀 수도 있었다.
곤청롱의 세력 또한 조정에서 계속 커져 가고 있었다.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원곡에서 몽달 조정의 각 부서에 사람을 들여보내 남몰래 세력을 키우게 했다. 이들이 조정의 중추는 아니었지만 그들을 모으면 무시할 수 없을 인원과 힘이었다. 이 명단을 작성한 것도 그가 심어 놓은 세력들이었다.
조용히 들어온 곤청유가 황제의 눈길을 관찰했다. 황제는 어떤 이름에 시선을 오래 두고 있었다.
“부황.”
곤청롱이 정신을 차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유아 왔구나.”
그는 문진을 들어 명단 위에 올려두었다. 문진은 정확하게 그 이름을 가렸다. 곤청유 또한 알고 있었지만 따로 묻지 않았다.
“궁에서의 생활은 할 만하느냐?”
곤청롱이 물었다.
“괜찮습니다. 어떤 것들은 늘 소자의 기억 속에 있었기에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곤청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떠날 때는 제법 사리분별을 할 줄 알았으니 궁에 대한 기억도 있겠지.”
“부황, 아직 위험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저희는 몽달 병권의 삼분의 일밖에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부황께서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대신들이 부황께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자는 걱정이…….”
“짐도 네 걱정이 무엇인지 다 안다. 그들의 걱정도 알고 있다. 한 가문에 수백 명은 족히 되니 누군들 두렵지 않겠냐. 다만…….”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부황, 그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틈을 타 우리가 움직이는 게 낫습니다. 부황이 저들을 죽이든 죽이지 않든 저들의 걱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짐도 처음에는 그럴 계획이었다. 하지만 동월군이 패륜이에 들어온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곤청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부황의 근심도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 몽달은 내우외환에 처해 있습니다. 자칫 소홀했다가는 지금까지 공들인 것이 수포가 될 것…….”
곤청롱이 환하게 웃었다.
“내우는 확실하지만 외환은 다른 이야기지.”
곤청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부황,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부황께서 황매를 받아들이셨다지만, 이미 시집을 가서 남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묵용감은 사사로운 관계를 따져 몽달를 배려할 인물이 아닙니다.”
“왜 아니겠냐?”
묵용감을 편드는 그의 말에 곤청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너도 그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는 네 황매가 천하보다 중요하다. 또한 강력한 군대가 패륜이에 와 있으니 민심을 생각해 봐야 한다. 거기에 우리까지 폭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더 흉흉해지지 않겠는가?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고… 민심이 식으면 그 온기를 되찾기는 몹시 어려운 법이다.”
곤청유는 한참이나 말없이 땅만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부황, 변하셨습니다.”
곤청롱이 쓴웃음을 지었다.
“늙어서 그런가 보지. 짐도 다시 돌아오면 사람들의 피가 강물이 되어 흐를 줄 알았다. 하지만 네 황매를 만나고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 하늘의 계획에는 모두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야.”
그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참, 너희는 아직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지? 자, 같이 그 아이를 보러 가보자꾸나.”
곤청유도 갑자기 나타난 여동생에게 호기심이 들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그녀 곁에 있는 그 남자는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가 다가가면 마치 그녀를 빼앗아가기라도 할 듯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곤청롱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은 자신이 백천범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하루 종일 대신들을 만나고 여러 정무를 처리하느라 한 시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바쁠 때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한숨 돌리자마자 딸이 생각났다. 딸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졌다. 이런 감정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라 굉장히 신기하면서도 편안했다.
그는 백천범을 서양전瑞陽殿에 머물게 했다. 서양전은 크지는 않아도 채광이 좋고 경관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가까운 곳이었다. 긴 복도를 따라가다 모퉁이를 돌면 바로 닿는 곳이었다.
문에 들어서니 묵용감과 이야기를 나누던 백천범이 보였다. 그녀는 곤청롱의 모습이 보이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근엄한 곤청롱은 평소에 웃음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백천범만 보면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온종일 일이 많아 바삐 지내다가 이제야 널 보러 왔다.”
백천범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