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6화
곤청롱의 고함에 모두들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곤청롱의 손짓에 철혈시위가 먼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뒤로 물러났다. 영십삼 일행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순간 대전이 조용해졌다. 양쪽으로 갈라선 사람들 사이의 경계선이 뚜렷했다.
“내려와서 이야기하시지요.”
곤청롱이 묵용감에게 말했다. 묵용감은 위쪽에서 그를 내려다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주인이 올라와서 이야기하시오.”
“다른 계략이 있어서 내려오지 못하는 건 아닙니까?”
“주인과 상대하려면 당연히 여러모로 조심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시간을 끄는 겁니까?”
“그럴 필요 없소. 두 시진 후면 당신은 나를 잡을 수 없을 것이오.”
“할 말 있으면 내려오십시오.”
“이야기하려면 주인께서 올라오시오.”
곤청롱의 눈에 비친 묵용감은 교활했고, 묵용감의 눈에 비친 곤청롱은 늙은 여우였다. 둘은 서로를 믿지 못해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묵용감이 내려가면 당장 산 채로 붙잡힐 것이고, 곤청롱이 올라오면 인질이 될 것이다. 생과 사가 걸린 일 앞에서 누구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치했다.
대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투구를 쓴 병사가 급히 들어와 곤청롱에게 조용히 보고를 올렸다. 곤청롱은 별다른 표정 없이 묵용감을 보면서 비웃듯 웃었다.
“당신의 목적이 이루어졌군요.”
묵용감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이오?”
“아직도 모르는 척입니까? 당신네 사람들이 패륜이를 포위하고 성에 들어왔습니다.”
“오?”
묵용감은 크게 웃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시간을 끄는 게 아니란 말입니까?”
“아니오.”
“묵용감, 우린 서로 입장은 다르지만 난 당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소. 한데 당신이 일만 벌려 놓고 책임지지 않는 겁쟁이인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한 일이면 당연히 인정할 것이요.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뭘 인정하라는 말이오?”
“묵용감!”
곤청롱이 버럭 소리쳤다.
“패륜이를 포위한다고 이 노부가 당신을 어쩌지 못할 것 같습니까?”
“동월은 몽달과의 전쟁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소! 몽달의 국운이 쇠한 지금 백성들의 생활조차 어려워 와도성에서는 군마를 잡아다 근근이 살아가고 있소. 당신이 도원곡에서 기른 저 상갑등 아이들을 데리고 몽달이 전쟁을 치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군.”
“그럼 또 어떻습니까?”
곤청롱이 냉랭하게 내뱉었다.
“당신 부부만 성에 잡아 두면 동월은 군사를 물릴 것입니다.”
묵용감이 걸음을 옮겨 단폐에서 내려갔다. 백천범은 그를 말리려 손을 뻗었지만 묵용감은 위로하는 듯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몇 마디 건넸다. 백천범을 결국 그가 천천히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단폐에서 내려온 묵용감은 영십일과 영십삼에게도 물러서라며 손을 저었다.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곤청롱 앞에 서서 진지하게 말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
곤청롱은 그의 행동에 어리둥절해졌다. 그의 말대로 몽달의 국력과 병력 모두 동월보다 못하지만 묵용감 부부만 쥐고 있다면 동월에서도 경거망동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묵용감이 자신을 고이 그의 앞에 대령하다니, 무슨 뜻인가?
“내가 여기 이렇게 왔는데 무슨 걱정이오?”
묵용감이 코웃음 쳤다.
“도원곡 주인의 담이 겨우 그 정돈가?”
곤청롱이 손을 젓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물러섰다. 하지만 곤청유만은 자리를 지키고 떠나지 않았다. 곤청롱이 옅게 미소 지었다.
“괜찮다. 저자가 뭘 하는지 보자.”
곤청유는 경계심이 서린 눈으로 묵용감을 바라보다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대전 안,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뒤로 물러선 널찍한 공간에는 외로운 섬처럼 묵용감과 곤청롱이 서 있었다.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곤청롱은 거의 별말이 없었고, 묵용감이 이야기를 주도했다.
그는 침착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곤청롱은 기묘한 표정이었다. 곤청롱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얼굴로 몇 번 입을 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마친 묵용감이 곤청롱을 보았다.
“해야 할 말은 다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곤청롱이 고개를 들자 단폐 기둥 곁에 사람 그림자가 살짝 스쳤다. 그에겐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남류청이 정말 그의 딸을 낳았을 줄은 몰랐다. 그의 소원대로 남류청처럼 아름다운 딸. 하지만 남류청은 동월에서 아이를 낳고 사라져 버렸다. 가엾은 아이는 백 승상 집에서 자라면서 모진 고난과 수모를 겪어야 했다.
황실의 자제인 그녀는 호의호식하며 귀하게 자라야 마땅한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불면 날아갈 새라 조심스럽게 아끼고, 마음껏 총애하며 키웠어야 마땅한 그의 공주였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는 남자가 아니었다. 옛날 미친 듯이 남류청을 사랑할 때도 정도를 지켰다. 그는 아들들에게도 언제나 차가운 얼굴만 보여 주는 엄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딸이 있다면 달랐을 것이다. 매일 목말을 태워 황궁 구석구석을 누비고, 딸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줬을 것이다. 그것이 하늘의 별이라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따다 줬을 것이다.
그렇게 원했던 딸이 불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를 목말에 태워 뛰어다닐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다 컸고, 그는 벌써 늙어 버렸다.
그는 묵용감이 한 말들을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 깊이 생각하려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잡초처럼 꿋꿋이 살아내 어른이 된 딸. 그런 딸의 존재조차 몰랐던 자신.
“어떻게 할 것인지 시원하게 이야기를 좀 해 보십시오. 안 하시겠다면 다시 올라가겠습니다. 계속 싸우고 있다 내 사람들이 궁에 들어오면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곤청롱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꾹 닫았다. 마음이 무거워 보였다.
묵용감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의 움직임에 정신이 번쩍 든 곤청롱이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멀리서 보던 영십삼 일행이 반사적으로 검을 들고 다가왔다. 곤청롱의 사병들도 즉각 물밀듯 몰려들었다. 위에 서 있던 백천범 또한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곤청롱이 그녀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모두 물러서라!”
묵용감도 영십삼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했다. 대전은 순간 안정을 되찾았다. 묵용감도 말없이 곤청롱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불편했던 곤청롱이 말했다.
“뭐가 그리 급한가? 노부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묵용감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표정은 그대로였다.
“인정하려면 성의를 보여 주셔야지요. 남류청처럼 앞뒤가 다르면 안 됩니다.”
“난 그녀가 아니네!”
곤청롱이 대답했다.
“그래야지요. 그 요괴 같은 여자가 제 아내를 고통스럽게 했으니 죽음으로 갚아도 부족합니다.”
곤청롱도 남류청을 증오했지만 다른 이의 입에서 그녀에 대한 비난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범아의 어머니네.”
“낳아 놓고 키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저 사람이 아끼는 가족까지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라면 필요 없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 건 곤청롱도 알고 있어서 대꾸하지 않았다. 그 역시 끊임없이 남류청을 증오했다. 그 깊은 증오의 시작은 사랑이었지만 그는 인정하지 않고 복수를 다짐했다. 다른 이의 손에 남류청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가 그녀를 위해 복수를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결단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건만… 문제는 그가 복수를 해야 하는 사람이 그의 외손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 무겁게 한숨지었다.
“됐네.”
“뭐가 됐다는 겁니까?”
묵용감이 물었다.
“예전 일들 모두 말이야. 이왕 내 사위가 되었으니 이 싸움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네.”
묵용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웃었다.
“다행입니다.”
그가 돌아서 가려는데 곤청롱이 불러 세웠다.
“자네는 나와 곤청리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떠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지. 이것 때문인가?”
기둥 옆의 백천범을 바라보는 묵용감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단지 그녀에게 아쉬움이 남지 않기 바랄 뿐입니다. 희망이 있다면 해 봐야지요.”
곤청롱의 한 마디에 피바람이 멎었다. 아직까지도 대치 중인 병사들은 서로의 군주만 바라보았다.
곤청롱과 묵용감은 아직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화가 곧 수포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모두 경계를 풀지 못했다.
잠시 후 묵용감이 단폐를 향해 손짓했다. 그의 부름에 백천범은 두 손을 꽉 쥐고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곤청롱은 문밖으로 도망이라도 가려는 듯 불안한 얼굴로 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묵용감은 그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렸는데 정작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더욱 의아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 한데 왜 곤청롱은 묵용감의 팔을 잡고 있고, 묵용감은 곤청롱의 어깨를 토닥이는 걸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친근해 보였다. 백천범이 다가와 자연스럽게 묵용감 옆에 섰다. 묵용감은 그녀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엔 틀림없소. 당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면 되오.”
그 소리에 곤청롱은 기분이 나쁜 듯 묵용감을 살짝 흘겼다. 곁눈으로 그 모습을 본 묵용감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백천범의 손을 놓아 주고 조용히 물러섰다.
그가 물러서자 곤청롱과 백천범 모두 난감해했다. 서로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른 눈길을 돌리기 바빴다. 지금은 가족을 대면하기 좋은 때가 아니었다. 대전에 있는 수많은 눈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곤청롱은 목구멍이 간질간질해 연거푸 몇 번이나 기침을 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백천범이 말했다. 곤청롱은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너를 고생시켰구나.”
“전 별로 고생한 것 없습니다. 아마 저보다는… 더 고생하셨지요.”
“난 네 어미가 널 가진 것을 몰랐다. 알았다면 사람을 풀어 널 찾았을 거야.”
“다 지난 일입니다. 전 지금 잘 지내고 있어요.”
곤청롱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음, 여기서 좀 머물지 않겠니?”
백천범은 대답 대신 금세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곤청롱이 급히 설명했다.
“오해다. 다른 게 아니라 나는… 흠흠, 그게, 허, 너도 알지?”
“…….”
백천범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내가 뭘 알지? 곤청롱은 그녀의 맑은 눈빛에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여기는 정신이 없지 않니? 너도 피곤할 테니 좀 쉬고 할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나누자.”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이곳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묵용감이 냉큼 다가왔다. 부부간에 통하는 것이 있는지 눈빛만 보고도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