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5화
곤청리는 털썩 주저앉아 입을 벌린 채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는 곤청롱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곤청롱은 쭈그려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황형, 황제 그거 하나도 재미없어. 나는 안 할 테니 황형이 하시게.”
곤청롱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후회하나?”
“아니. 해 보고 나서야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 해 보지 못했다면 지금까지도 하고 싶었을 게야.”
그는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피를 막으려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제 편안해졌어. 이런 기분 정말 좋네, 마치…….”
곤청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국사가 우리를 갈랐을 때처럼 가볍고 편안하군.”
잠시 멈칫하던 그는 말을 이었다.
“황형, 한 가지 더. 왜… 계후를 죽였냐고 물었지? 나도 죽이고 싶지 않았네. 그녀가 내 아들을 낳아 줬거든. 내 첫 아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지.
그런데 태의가 수태한 날짜를 물어볼 때에야 알게 됐어. 내가 그녀를 안기 며칠 전 형도 그녀에게 승은을 내렸다는 걸 말이야. 그녀는 그것도 나인 줄 알고 있었지만 난 그게 아니란 걸 알잖소. 황형, 그때 형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잖소. 왜 갑자기 그녀를 찾아 승은을 내리고 기록조차 하지 않은 거지?”
곤청리의 입가이 피가 주륵 새어 나왔다.
“그래서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녀를 죽이면 두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는 거지만 이미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한두 명 늘어난다고 뭐가 다르다고. …그런데 못하겠더군.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그녀의 배를 보니 정말 못하겠더라고.
어쨌든 내 첫아이잖아. 난 정말 아이를 갖고 싶었거든. 형이 가졌던 모든 것들을 나도 갖고 싶었어. 특히 아이! 아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 왔었던 것을 증명해 줄 테니까.”
곤청리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너무나 예뻤어. 모두들 나와 닮았다고 했지만 나와 닮았다는 건 곧 형과도 닮았다는 말이지. 그러니 그 아이가 정녕 내 아이가 맞는지 알 수 없더군. 이제 갓 세상에 태어나 앙앙대며 우는 아이는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어서 내 화는 오롯이 계후에게 향했지.
나는 그녀를 괴롭히다가 아이가 두 살이 됐을 무렵 그녀에게 목숨을 거두라는 분부를 내리고 말았네. 그녀가 죽은 후 모든 진실을 묻어 버렸지. 난 그 아이를 바로 태자로 책봉하고 온 마음을 다해 키웠어.
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직 그가 내 아들인지 아닌지 확신이 안 서. 황형, 이 문제는 이제 형에게 맡기지. 황형은 그 아이를 죽일 수 있겠나? 아니면 계속 태자로 남겨 둘 것인가? 그 아이를 죽이면 몽달엔 태자가 없어…….”
“몽달에는 태자가 있다.”
곤청롱이 평온한 표정으로 괴로워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기억 안 나는 것이냐? 내가 도망치면서 태자도 데려갔다. 넌 태자가 천연두에 걸렸다고 발표하고 관에는 다른 시체를 넣어 두었잖느냐.”
그가 방 관리에게 손짓을 하며 앉으라고 했다.
“유아, 네 황숙이 가시는 길을 배웅해 드리거라.”
자리에 앉은 방 관리는 냉랭하게 곤청리를 바라보았다.
곤청유……. 곤청리는 그의 얼굴이 뚫어져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곤청롱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렇다면 그 아이를 죽일 텐가? 만약 그 아이가 형의 아들이면? 황형, 형도 나와 마찬가지야. 호랑이 등에 타고 있으니 내릴 수도 없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라고. 하하하!”
웃음소리가 잦아들더니 곤청리의 고개가 푹 꺾였다. 그는 눈을 뜬 채로 곤청롱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곤청롱이 손을 뻗어 그 눈을 감겨 주고 조용히 일어섰다.
영씨 성을 가진 시위 다섯 명이 단폐 위에 나란히 서서 검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일당백의 기세로 그들의 황제와 황후를 지키고 있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안고 기둥 뒤로 숨었다. 백천범은 아래쪽 살육의 현장을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도원곡 주인에게 군대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오. 이미 그의 사람들이 몽달의 온갖 곳에 침투해 있지. 하지만 이렇게 빨리 도착한 것은 나 또한 의외요.”
“그럼 어쩌죠?”
“뭘 그리 걱정하오? 동월은 몽달과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소. 지금은 저들의 수가 많으니 기다릴 수밖에.”
묵용감이 말했다. 백천범은 이미 계획이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눈을 반짝였다.
“조 장군을 기다리는 건가요?”
묵용감은 그녀의 콧잔등을 톡톡 건드렸다.
“당신이 똑똑한 줄 알았는데, 이제야 알았소?”
백천범은 그의 손을 밀치며 투덜거렸다.
“왜 진작 알려 주지 않았어요.”
“사실 더 빠른 방법이 있소.”
묵용감은 침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일인지 모르겠소.”
백천범도 그의 뜻을 알고 잠시 조용히 있었다. 곧 고개를 숙였다.
“여제를 증오하니 나도 싫어하겠지요.”
“그는 여제를 증오하지만 그 일은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난 당신의 생각을 알고 싶소.”
분명 입장이 다르고 복잡한 관계였다. 게다가 곤청롱이 그녀의 아들인 묵용린을 죽이려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곤청롱이 백천범을 따뜻한 눈으로 봐 준다면… 그녀에게 가족의 정을 알려 준다면 그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백천범이 고개를 돌리자 곤청롱과 눈을 마주쳤다. 춤추는 칼들 너머, 가득 찬 사람들 너머로 눈길이 마주친 그들은 서로 응시하다 곧 시선을 돌렸다.
여제의 죽음을 들은 곤청롱은 묵용린뿐만 아니라 묵용감 부부도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조상을 시해하는 아들을 키운 것이 바로 그들이었으니까 말이다.
곤청롱은 남류청은 남류청이고, 그녀의 딸은 딸일 뿐 완전히 별개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저 눈빛에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남류청과 똑 닮은 그녀를 죽일 마음이 들지 않은 걸까? 까맣고 또렷한 큰 눈,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한 눈동자, 단 한 번의 눈길에 그의 마음이 조여 왔다.
그는 속으로 한숨지었다. 설마 그 또한 곤청리처럼 미쳐서 그 딸에게 연모의 마음을 쏟는 걸까? 아니…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백천범은 남류청이 다른 남자와 낳은 딸이다. 그 생각에 다시 노여움이 밀려왔다. 그는 남류청을 땅에서 파내 다시 한번 죽이고 싶었다.
백천범은 가슴이 두근거려 묵용감의 품에 안겼다. 그가 그녀의 손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왜 떨고 있소? 뭐가 무섭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무섭지 않아요.”
“무섭지 않은데 왜 떨고 있소?”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왜 이렇게 차가워… 춥소?”
그녀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혈연이란 기묘한 것이라 한 번만 봐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곤청롱을 처음 본 순간 그녀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묵용감은 백천범의 얼굴을 잡고 말했다.
“더는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 맡기시오.”
백천범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확신에 찬 그의 눈빛을 보자 마음이 놓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나 그의 하늘이었다. 그녀의 마음에 있는 근심거리를 모두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묵용감 뿐이었다.
묵용감은 기둥 뒤에서 나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도원곡 주인, 할 말이 있소.”
곤청롱이 차갑게 웃었다.
“살려 달라는 겁니까?”
“아니, 당신이 후회할까 봐 그러오.”
곤청롱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노부가 후회할 일이 뭐가 있소.”
“당신 딸을 당신 손으로 죽일까 봐 그렇소.”
순간 멈칫한 곤청롱은 곧바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기둥 뒤에 몸을 반쯤 숨긴 그녀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또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곤청롱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기둥 밖으로 삐져나온 옷자락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주인, 이해하셨소?”
곤청롱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딸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묵용감이 도망가려고 생각해 낸 계략이 분명하다.
그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다. 남류청이 그녀처럼 예쁜 딸을 낳아 주길 바랐지만 낳고 보니 사내아이였다. 물론 당연히 기뻤지만 못내 아쉬움이 있던 건 사실이다.
나중에 그 남자아이는 남류청이 데려갔고, 다른 아들들은 모두 곤청리에게 죽음을 당해 그의 곁에는 오직 곤청유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딸이 있다고? 남류청 그 요망한 여자가 그에게 딸을 낳아 줬다는 말인가?
기둥 뒤의 그녀는 다시 조그마한 머리를 내밀어 그를 쳐다보았다. 눈길이 마주치던 그 순간 다시 곤청롱의 가슴이 아려 왔다. 제길, 제 어미만큼이나 위험한 계집이었다.
살육은 계속되고 있었다. 묵용감의 사람들 모두 정예군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고 있었다.
곤청유 또한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곤청롱이 마음속으로 싸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위급했던 순간 곤청롱은 죽을 것을 감수하고 그를 데리고 떠났다. 이 사실만 봐도 그에게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었다.
도원곡이 안정된 후 사람을 풀어 알아보니 궁 안에 남아 있던 황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곤청리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했다. 곤청유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곤청롱은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물조차 넘기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당시 곤청유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깊은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비통한 표정은 곤청유의 뇌리에 영원히 박혀 있었다.
“주인, 저들은 도망갈 수 없습니다. 묵용감이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곤청롱이 곤청유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를 뭐라고 불렀느냐?”
곤청유는 조금 난처했다. 그는 도원곡에서부터 그를 부황이 아닌 주인이라고 부르게 했다. 거기에 이름도 바꿔 자신의 수행원으로 삼았다. 오랜 시간 동안 주인이라고 부르다 보니 한 번에 호칭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다.
“유아, 아직도 나를 탓하는 것이냐?”
“소자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소자도 부황의 노고를 알고 있습니다.”
곤청유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럼 됐다. 여기 일이 끝나면 바로 네 즉위 준비를 시작할 거야.”
곤청롱이 말했다. 곤청유가 얼른 무릎을 꿇었다.
“이 땅은 본디 부황의 것입니다. 이제야 부황이 돌아오셨으니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곤청롱이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 일으켜 세웠다.
“나는 늙고 오래 병을 앓아서 정신이 맑지 않다. 아무래도 빨리 요양을 해야겠다. 몽달은 네게 맡기면 되니 안심이야.”
묵용감은 두 사람이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는 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주인, 도대체 어쩌자는 거요? 말을 하시오!”
곤청롱은 기둥 뒤로 보이는 그녀의 옷자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 멈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