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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74)화 (974/1,192)

제974화

백천범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녀의 추측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녀는 곤청롱의 딸이다.

그녀는 살짝 눈을 들어 곤청롱을 바라봤다. 그는 곤청리의 말에 평온하고 담담한 얼굴이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지.”

곤청리는 나른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당연히 황자의 실종은 큰일이지. 하지만 나만 예외였을 뿐. 왜냐하면 나와 곤청롱은…….”

벌떡 일어선 곤청롱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튀어 나왔다.

“입 다물어!”

“이보시오, 주인. 왜 말을 못하게 하는 거요?”

묵용감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말 못 할 비밀이 도대체 무엇이오?”

“몽달 황실 내부의 일입니다. 당신과는 상관없습니다.”

굳은 표정의 곤청롱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럼 나를 끌어들인 이유는 무엇이오? 당신 혼자 힘으로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은 내 손을 빌리지 않았소.”

묵용감의 질문에 곤청롱은 대답이 없었다. 단상 위에 있던 곤청리가 웃었다.

“당신이 누군지는 몰라도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 저 사람은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쓰니까.”

“그럼 네 비밀부터 말하거라. 여기 있는 사람 모두 그 비밀에 대해 알 권리가 있으니!”

묵용감이 우렁찬 소리로 말했다. 곤청리는 목을 가다듬더니 곤청롱을 쳐다보며 웃었다.

“몽달에서는 쌍두괴를 저주라고 생각하지. 그런데 황제가 될 자들이 쌍두괴였다면 어땠을까? 나와 곤청롱은 보통 쌍둥이가 아니었지. 우리는 몸이 붙은 쌍둥이였어.”

그 말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몽달에서 쌍두괴는 흉조였다. 그런데 제왕이 될 자들이 쌍두괴였다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의 표정에 곤청리가 흡족하게 웃었다. 이대로 떠나도 자신은 상관없었지만 곤청롱이 잘 지내는 꼴은 볼 수가 없었다.

“다들 생각도 못 했겠지. 우리가 바로 몸이 붙은 쌍두괴였어. 황실에서 요괴가 태어나다니… 당장에 없애 버려야 할 큰 흉조였지. 하지만 국사의 점괘와 신불의 예언은 우리를 죽여선 안 된다고 했다. 우리 중에 황제가 될 이가 있으니 하나를 남기고 하나를 버리라고.

국사는 신술로 우리의 몸을 떼어 냈네. 건강한 아이는 저쪽이었고, 허약한 아이는 나였어. 다행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나는 가면을 쓰고 비밀스러운 곳에 연금되어야 했다. 돌봐 주는 사람은 있었으나 혼자 지내는 것과 다름없는 삶이었다.

황실의 치욕인 나는 궁 안의 몇몇 노인들 말고는 내 존재를 알지도 못했다. 하물며 나를 알고 있던 사람들도 훗날 내가 죽은 줄로만 알더군.”

케케묵은 옛일을 이야기하는 곤청리는 흥분해 있었다. 그는 사뭇 달라진 목소리로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국사의 점괘는 틀리지 않았어. 내 황형은 인품이나 외모 모두 뛰어난 신불이 선택한 계승자였어. 문무를 겸비한데다 몹시 총명하고 재능이 출중했지. 그가 통치하는 몽달은 평안함 속에 태평성대를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곤청리가 크게 웃었다.

“참 아깝게도…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저마다 약점이 있게 마련이지. 그의 약점은 여자였어. 일개 여인 하나가 몽달의 군주를 바꿔 놓았지. 고작 이런 자를 대단하다고 추앙하다니? 대단하기는 개뿔! 저자는 여자 때문에 자기가 지켜야 하는 나라를 내다 버린 사람이다, 군주가 되어서는 안 돼!”

곤청리는 목이 찢어져라 외치며 그동안 감춰왔던 진실들을 외쳤다. 그가 버림받은 황자라는 게 알려지는 건 상관없었다. 이미 삼십 년 넘게 황위에 있던 몸이다. 자신은 가장 좋은 시절에 몽달의 대소사를 결정하며 지냈고 곤청롱은 빛이 들지 않은 어둠 속에 숨어 지냈다.

“곤청롱!”

그는 옥좌를 짚고 일어섰다.

“저 여인을 보았는가?”

도원곡 주인이 손을 들어 백천범을 가리켰다.

“남류청의 딸을 봤냐고. 내가 아내로 맞을 뻔했지! 남류청은 너의 비였지만 그 딸은 거의 내 황후가 될 뻔했다고. 네가 남류청에게 주지 못한 황후의 자리를 나는 줄 수 있다! 네가 감히 하지 못한 일을 난 할 수 있다고!”

곤청롱은 그를 내버려 두었다. 이미 모든 비밀이 밝혀졌다. 그가 꽁공 숨겨 왔던 비밀들이 허무하게 밝혀진 것이다.

“만족하십니까?”

도원곡의 주인이 묵용감에게 물었다.

“이게 당신이 바라던 결말입니까? 당신이 아무리 태자를 통제하고 이 노부를 협박한다고 해서 몽달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자는 자신이 묵용감에게 통제받고 있다는 사실을 곤청롱이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방금 전 황궁의 경호를 담당하던 기영군이 큰일이 일어났음에도 가만히 있던 걸 의아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다 저 노부의 수작인 듯했다. 묵용감이 웃었다.

“나는 그저 부인을 데리러 왔을 뿐이오. 난 부인을 찾으면 떠날 생각이오. 한데 주인은 어째서 내가 몽달을 뒤엎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곤청롱이 차갑게 웃었다.

“부인을 데리고 떠난다……. 들어오는 건 쉽지만 떠나는 것은 어렵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요.”

“어째서?”

묵용감이 말했다.

“어째서라니요?”

곤청롱이 반문했다. 묵용감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백천범의 손을 꼭 잡았다.

“내 신분 때문이오?”

“똑똑하시군요.”

곤청롱이 크게 웃었다.

“동월 황제가 몽달에 오셨는데 어찌 이대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바다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저들이 동월의 황제와 황후라니! 저들이 패륜이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지? 또 어떻게 황국에 들어온 걸까? 가장 놀란 것은 곤청리였다. 백천범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넌 남농화가 아니었느냐? 어떻게 동월의 황후가 된 거지?”

묵용감은 백천범을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곤청리의 얼굴이 뚫어질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 조심하거라.”

곤청롱은 곤청리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

“저 여자는 남농화가 아니라 백천범이다. 수년 전, 동월로 시집간 남원의 무양 공주이니라.”

곤청리가 알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소식을 들었던 것도 같군. 동월 황후면 어떤가. 내가 아내로 맞이할 뻔했는데 아깝군.”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상황을 파악한 묵용감은 곤청롱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임무를 완수해도 날 보낼 생각이 없었군. 나를 이용해 동월을 압박해서 당신이 원하는 것과 바꿀 생각이었어, 내 말이 맞소?”

“과연 총명하십니다. 기왕 하늘이 노부의 손에 큰 선물을 내려 주셨는데 이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묵용감이 차갑게 웃었다.

“나를 붙잡아 둘 수 있겠소?”

“밖을 보십시오. 노부가 당신을 붙잡아 둘 수 있다는 걸 곧 아실 겁니다.”

곤청롱이 밖을 가리켰다. 동시에 고개를 돌린 묵용감과 백천범이 깜짝 놀랐다. 전각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영군과 상림군이 어느새 나타나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의 차림을 보니 황성 금위군은 아니었고, 진짜 전쟁터에서 적을 죽여 본 적이 있는 사병인 출정군이었다.

비밀을 듣느라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곤청롱이 군대를 불러 그들을 포위한 것이다. 어쩌면 그의 오랜 침묵은 모두 시간을 벌기 위한 연기였을 지도 모른다. 재미난 구경거리는 이제 그만. 묵용감도 준비를 해야 했다. 묵용감은 손을 올려 눈썹을 긁적거렸다.

“어쩌자는 거요? 우리 부부를 이용해 재물을 얻고 싶소? 아니면 땅을 얻으려는 것이오.”

곤청롱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모두 아닙니다. 저는 한 사람만을 원합니다. 당신들을 이용해 그를 얻고 싶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묵용감은 잠시 멈칫했다.

“누구 말이오?”

묵용감이 물었다. 곤청롱은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은 눈으로 세 글자를 내뱉었다.

“묵용린.”

조용하던 백천범은 그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린아와 바꾸겠다니! 왜 린아를 원하는 거죠? 우리 린아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곤청롱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 그의 목소리 역시 뼈를 파고들 듯 날카로웠다.

“조상을 해치는 잘난 아드님을 키운 건 당신 부부 아닙니까?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자가 남류청을 죽였습니다.”

그 말에 백천범의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그녀 역시 죄 많은 여제를 사람 같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아들이 그녀를 죽일 줄은 몰랐다. 묵용감도 얼굴을 찡그렸다.

“어디서 들은 소식이오? 틀림없소?”

곤청롱이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남원 황궁에 있는 내 사람이 전한 소식입니다.”

묵용감은 당황했지만 이내 큰소리로 물었다.

“당신을 이 꼴로 만든 건 남류청 아니오? 그녀의 죽음을 당신도 바랐겠지.”

곤청롱이 고개를 저으며 결연한 눈으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러니 그 여자는 이 노부가 죽였어야 합니다. 한데 다른 이의 손에 그녀가 죽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자를 이 노부가 죽여야지.”

현기증이 난 백천범은 묵용감에게 몸을 기댔다.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그녀는 묵용감을 바라봤다.

그가 아니라고 말해 주길 원했지만 묵용감의 눈엔 근심이 가득했다. 아주 깊은 근심. 그래서 그녀는 곤청롱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곤청롱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저들을 잡아라!”

철혈시위들이 검을 뽑아들자 상림군으로 변장한 동월 정예병들도 검을 휘두르며 맞섰다. 태자의 명령 없이는 끼어들지 않는 기영군은 양쪽이 교전을 시작하자 즉각 태자를 둘러싸고 한쪽으로 몸을 피했다.

곧 대전에서 여러 병기들이 교차하며 요란한 접전이 시작됐다. 대신과 시종들은 금수들처럼 허둥지둥 도망쳤다. 밖에 있던 경비병들은 사람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바라만 볼 뿐 아무도 막지 않았다.

곧 대전에 있던 사람들 태반이 도망갔고, 도망갈 생각이 없거나 도망갈 수 없는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묵용감은 백천범이 다칠까 그녀를 안고 펄쩍 뛰어 단폐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던 곤청리를 걷어찼다. 그는 애초에 몽달 황실도 버린 황자였으니 모든 비밀도 드러난 지금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능력을 보자면 곤청롱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실상 몽달 황궁 옥좌에 앉은 이를 함부로 대해선 안 됐지만. 감히 그녀의 부인에게 눈독을 들인 놈을 곱게 보낼 수 없었다.

곤청리는 한 사병의 검을 향해 떨어지면서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새하얗게 번쩍이는 검이 자신의 가슴에 박히는 광경을 보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사병이 들고 있던 검이 뽑히자 핏줄기가 칼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옷 또한 붉은색으로 천천히 물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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