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73)화 (973/1,192)

제973화

두 사람은 서로를 ‘곤청리’라고 칭하며 자신이 ‘곤청롱’임을 밝혔다. 대반전의 연극을 관람하던 관객들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체 누가 진짜 곤청롱이란 말인가?

묵용감은 자신이 끼어들기 적당한 때라는 생각에 도원곡 주인에게 말했다.

“저자는 당신이 곤청리라는데… 증거를 대지 못하면 불리해질 것이오. 어쨌든 저자는 지금 몽달의 황제가 아니오?”

도원곡 주인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웠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소.”

묵용감이 당당하게 대꾸했다.

“영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오. 당신이 꾸민 일이 대체 무엇이오? 게다가 우리 부부는 왜 끌어들인 것이오? 원한이 있거든 오늘 이 기회에 전부 다 갚아 버리시오. 자, 어디 한번 속 시원히 말해 보시오. 묵은 빚을 들춰내야 다들 시비를 판단하지 않겠소?”

몽달 황제는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짐의 철혈시위는 어디 있느냐. 어서 곤청리를 죽이거라!”

몽달 황제도 아예 대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철혈시위들은 유령처럼 나타나 안으로 들이닥쳤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제삼의 진영을 이루었고 천천히 도원곡 주인을 에워쌌다.

도원곡 주인은 의자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원을 그리더니 다섯 손가락을 펼치고 중지와 약지를 아래로 구부린 채 그 상태를 유지했다.

몽달 황제는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본인이 뭐라고 저런 식으로 철혈시위를 막을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인가?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철혈시위는 정말 걸음을 멈추었고 망설이는 눈빛으로 도원곡 주인을 바라보았다.

도원곡 주인은 그들을 보며 다시 다섯 손가락을 펼쳐 손바닥을 한 차례 뒤집고 재빨리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철혈시위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고 목청껏 소리쳤다.

“황제 폐하 만세!”

지켜보던 이들 모두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도원곡 주인은 몽달 황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곤청리, 철혈시위에게 주인은 오직 한 사람! 몽달의 군주뿐이지. 진정한 몽달 군주만이 이들에게 명을 내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

단폐 위의 몽달 황제가 발을 굴리며 진노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네가 저들을 매수한 것이겠지. 네가 짐의 시위를 매수한 것이야!”

도원곡 주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곤청리, 넌 삼십여 년 전, 요비妖妃 남류청의 도움을 받아 빛을 보게 되었지. 너희 둘은 이 노부를 독살할 음모를 꾸몄다. 난 독에 중독되었지만, 겨우 도망쳐 나왔지. 그리고 넌 가짜 곤청롱 행세를 하며 지금껏 몽달 황위 자리에 앉아 있었어.

넌 내 주변 사람들에게 정체를 발각될까 봐 온갖 구실을 대며 그들을 죽이고 네 사람들로 자리를 채웠다. 또 후궁의 어린 아들들과 비까지 죽이고 천연두에 걸렸다고 소문을 냈지. 그럼에도 넌 여전히 네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려워 동침한 적 없는 후비들을 전부 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의 말에 신하들은 서로 쑥덕대기 시작했다. 특히 노신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원곡 주인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황궁은 죽어 나가거나 내쫓기는 사람들 때문에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혹 자신의 목숨마저 잃을까 봐 그 일을 입에 담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 후로 몇 년 뒤, 궁 안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고 그때의 일은 세월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파묻혔다. 이제야 언급되는 옛일은 참으로 무서운 진실이었다.

묵용감의 예상대로 도원곡 주인은 몽달 황실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황제 본인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어쩐지 도원곡에 있을 때 단번에 자신을 알아보더니. 삼십여 년 전, 두 사람은 서로 만난 적 있었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백천범은 ‘요비 남류청’이라는 말에 손을 파르르 떨더니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도원곡 주인도 여제를 증오했다. 설령 그가 그녀의 생부라 할지라도 아마 그녀를 딸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묵용감은 백천범의 기분을 읽고 위로하듯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마음이 한결 따스해진 백천범은 그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깨닫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곤청리.”

도원곡 주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넌 네 신분을 감추기 위해 노부 주변의 사람들을 죽였다. 하지만, 이 노부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었지. 태자의 모친은 어째서 죽인 것이냐? 태자의 모친은 너의 황후거늘?”

그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태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모친이 남원 여제라고 믿었다. 한데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그의 모친이 부황에게 죽임을 당했다니?

“부황.”

태자가 큰소리로 물었다.

“소자의 모친은 대체 누구입니까?”

오랜 시간 가슴에 숨겨 왔던 말을 마침내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이었다. 몽달 황제는 가만히 앉아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태자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도원곡 주인이 대신 대답했다.

“네 모친은 최씨 성을 가진 여인이다. 일찍이 이 노부의 비였지만, 나중에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곤청리가 그녀를 죽이는 대신 황후로 세웠지.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네가 두 살 되던 해에 네 어미에게 하얀 비단을 하사했고, 결국 그녀는 침궁 들보에 그 비단을 걸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태자의 안색은 거의 잿빛이 되었다. 계후에 대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무래도 진실인 듯했다.

한 노신이 벌벌 떨며 앞으로 나와 도원곡 주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는 덕망 높은 노신 오씨였다. 대사독을 맡고 있는 몽달의 세도가였지만 어째서인지 몽달 황제가 그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그는 겨우 작위와 그에 맞는 녹봉만 받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노신들도 그의 전철을 밟았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황제의 뜻을 따라야만 했다. 한데 이제 모든 이유가 밝혀졌다.

어떤 대신들은 관망하고 어떤 대신들은 주저했다. 그리고 어떤 대신들은 눈물 흘리며 도원곡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만세 삼창을 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도원곡 주인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노부는 황위를 떠난 지 이미 삼십 년이 넘었으니 더 이상 자네들의 폐하가 아니네. 오히려 나를 충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저자에게 경계를 받았던 자네들의 고생이 많았지. 노부 때문에 자네들이 허송세월을 보냈어.”

대신들은 바닥에 엎드려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럽게 울었다. 단폐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곤청리는 이마의 푸른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노여워하며 그들을 손가락질했다.

“역적, 모두 역적이다! 너희 모두 짐을 배신했어. 저자가 너희들에게 뭘 해 줬냐? 짐이야말로 너희 황제다. 저자는 빛도 못 볼 요괴일 뿐이야!”

그의 마지막 말에 도원곡 주인의 눈에 섬광이 튀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조용했다.

곤청리는 점점 더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가장 놀랐던 것은 철혈시위였다. 본래는 철혈시위를 이용해 곤청롱을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곤청롱의 기묘한 손짓 한 번에 그에게 충성하던 철혈시위들이 단박에 그를 배신했다. 기만도 분수가 있지, 그는 단상 위에서 욕을 쏟아 냈다.

“이 간신 역적들아! 그동안 짐이 너희들에게 후하게 대해 줬던 걸 생각하라. 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깡그리 죽여 버렸을 것이다. 이 충심도 의리도 모르는 것들!”

하지만 그의 발악은 아무 소용 없었다. 욕설을 듣던 대신들은 천천히 도원곡 주인 곁으로 다가갔다. 곧 단폐 아래 있던 대신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들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본 곤청리의 눈에 핏발이 잔뜩 섰다. 곤청리는 기세등등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역시도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옥좌에 풀썩 주저앉았다.

대전이 다시 조용해졌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들 조용히 서 있었지만 막막하고 두려웠다.

수수께끼는 풀렸지만 사람들 마음속의 의혹은 여전했다.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황제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던 걸까? 묵용감은 의문스럽다는 듯 도원곡의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진작 진상을 밝히지 않고 지금까지 기다린 거요?”

“노부는 독에 중독되어 말을 할 수도, 걸을 수도 없어 그동안 쭉 약을 먹어 왔습니다. 십 년 전에 겨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일어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하면 지금껏 곤청리가 당신 행세를 하며 산 것이군. 한데 왜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황자의 실종은 보통 일이 아니잖소.”

묵용감이 되물었다. 도원곡 주인의 표정이 안 좋아졌지만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몽달 황실 사람들에게 곤청리란 오래전에 사라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다들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듯 분위기가 무거웠다.

묵용감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눈썹을 찌푸렸다. 물론 그가 몽달 황실에 대해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백천범의 신분은 제대로 알아야 했다.

바로 그때, 한참 말이 없던 곤청리가 입을 열었다. 그는 옥좌에 기대어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런지 말해 줄까?”

도원곡 주인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곤청리!”

곤청리는 갈라진 목소리로 비웃듯 웃었다.

“친애하는 황형! 아무래도 형의 계획이 저자의 강한 호기심 때문에 망가진 듯하군. 쥐도 새도 모르게 나와 당신의 위치를 바꿔치기하려는 그 계획이!”

도원곡 주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곤청리는 손뼉까지 치며 웃어 댔다.

“내 말이 맞지? 양 잡기 대회에서도 형의 계획을 눈치챌 수 있었어. 나를 공격해 의식을 잃게 만들어 남몰래 이 자리에 형이 오르려고 했겠지. 그래서 어의원에 형의 사람이 있었던 거야. 아니, 형의 사람들은 벌써 패륜이 구석구석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르지. 길거리에도 있고 조정에도 있고……. 분명 여기저기 손을 써놨을 터.

그렇다면 형이 이 자리에 앉아도 의심하는 이가 없었겠지. 하지만 형의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았더군. 형이 보낸 자객이 목표를 착각했으니 말이야. 또 ‘환한 불빛’이라 불리던 작전도 수포로 돌아갔지. 아마 남류청과 꼭 닮은 얼굴을 보고 차마 불을 지를 수는 없었겠지?

황형, 삼십여 년 전에도 남류청에게 놀아나더니 아직까지도 그녀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군. 그 얼굴만 보면 마음을 독하게 먹지 못하는 거야. 그 여자는 형이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굴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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