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2화
몽달 황제는 백천범을 발견하자마자 조금씩 정상적인 눈빛을 되찾았다. 그가 힘을 풀자 난비는 진흙 인형이라도 된 양 푹 쓰러졌다. 그때 묵용감도 기둥을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도리가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당신도 참… 어찌 그리 감정을 누르지 못하는 것이오.”
백천범이 말했다.
“난비가 절 구해 줬단 말이에요.”
묵용감이 말했다.
“저 여인이 구해 주지 않았더라도 내가 그대를 구했을 것이오. 게다가 저 여인이 그대를 구한 건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지. 절대 진심이 아니었소.”
백천범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자신을 꺼내 준 건 난비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몽달 황제의 손에 죽어 가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대전은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지만, 두 사람은 일상적인 잡담을 나누듯 여유로웠다. 자연스럽게 모든 이들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대부분 의아한 얼굴이었다. 한데 몇몇 노신들이 백천범의 모습을 보고 귀신을 본 듯 놀랐다. 그러면서도 대충 상황을 파악한 눈치였다.
몽달 황제는 더욱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의 여인과 가까이 있는 사내라면 모두 없애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저놈은 다정하게 굴기까지 했다.
“넌 누구냐?”
황제는 묵용감을 내려다보았다. 묵용감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감히 내 아내를 넘봤겠다?”
몽달 황제가 흠칫 놀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대혼을 치르고 남농화를 아내로 맞을 수 있었건만! 그녀의 부군이 찾아오다니.
“네가 저 여인의 부군이더냐?”
“이 여인에게 부군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겠다?”
묵용감이 냉소를 지었다.
“오늘 네 신하와 자식들에게 제대로 보여 주마. 백성의 아내를 강탈한 황제가 얼마나 후안무치한 사람인지.”
몽달 황제는 남농화 옆에 꼭 붙어 있는 사내를 보고 천불이 일었다. 백성의 아내를 뺏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단폐를 성큼성큼 내려갔다.
“마침 잘 왔구나. 오히려 짐의 일을 덜어 주겠어. 짐의 마음을 다 알았으니 남아서 혼례나 구경하고…….”
묵용감은 황제의 헛소리에 화를 내기는커녕 웃음을 보였다. 백천범은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그녀는 혹여 그가 충동적으로 행동하여 계획을 망칠까 봐 걱정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묵용감은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붙잡고선 다른 한 손으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몽달 황제를 당장에 때려죽이고 싶은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아직 재미난 공연이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몽달 황제가 단폐를 다 내려오기도 전에 영십일이 검을 들고 호통쳤다.
“물러나시오.”
태자는 상림군 좌대사의 관복을 입고 있는 영십일의 모습에 모든 책임을 곤청락에게 돌렸다.
“담도 크구나. 어찌 감히 부황께 불경을 저지른단 말인가? 정녕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냐?”
곤청락은 상림군이 안으로 들어온 뒤로 혼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그는 태자의 호통에 정신을 차리고 영십일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어찌 자네가……?”
그가 화들짝 놀라 묵용감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 주인장, 대체 자네는 누구인가? 왜 날 불의에 빠뜨린단 말인가?”
묵용감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육 전하도 부황의 황후 책립을 막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해서 제가 이리 도와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림군은 어찌, 어찌…….”
“상림군이 왜요?”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상림군은 전하의 사람들이고, 전하께서 옥패를 주시어 입궁한 것이지요.”
곤청락은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난 자네와 원수지간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 날 가지고 노는 것인가?”
묵용감이 고개를 저었다.
“전하, 어찌 그리 섭섭한 말씀을. 전 전하와 벗이 아닙니까. 남들이 전하를 바보 취급하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지요. 정말 전하를 가지고 노는 사람은 저 부황이라는 자입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몽달 황제를 바라보았다.
“아비 같지도 않은 놈! 아들마저 이용해 먹다니. 넌 태자가 날로 강대해질까 봐 육황자를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 두며 허황된 미래를 꿈꾸게 했다. 육황자가 태자를 견제하게 하려고. 어때, 내 말이 틀렸나?”
그가 이번엔 곤청각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태자 전하는 똑똑하여 진작 이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저 조용히 참을 뿐이었지. 어쨌든 황태자 자리에 앉아 있으면 황제가 죽을 때를 기다려 즉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바보 같은 육 전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해 오랜 시간 바둑알 취급을 받아 왔다. 그 모습이 어찌나 눈에 너무 거슬리던지.”
태자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황제가 곤청락을 이용해 자신을 견제한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 묵용감 말처럼 황태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황제가 서거하면 곧장 제위를 이어받을 테니 꾹 참고 기다렸다.
사실 황제의 마음은 신하들도 속으로 훤히 꿰고 있었다. 다만 그저 못 듣는 척, 아무 말도 못하는 척 굴 뿐이었다. 그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다들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지 못했다.
곤청락은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몽달 황제를 바라보았다.
“부황, 소자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자의 말이 거짓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자가 지금 소자에게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뭐라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상처받은 황자 따위는 지금 몽달 황제에게 그리 중요치 않았다. 그는 그저 음흉한 눈빛으로 묵용감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정체를 추측했다.
곤청락은 황제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태자를 바라보았다. 태자도 육황자의 눈을 피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늘 자신을 성가시게 하던 아우인지라 미치도록 그가 싫었지만, 가족을 이용한 건 그 역시 마음에 걸렸다. 곤청락은 뒤이어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묵용감의 말이 거짓이라고 말해 주길 바랐으나 다들 그의 시선을 피할 뿐,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곤청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조소를 지었다.
“부황께서 줄곧 저를 왕에 봉하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었군요. 어쩐지… 제 저택에 문객을 삼천이나 들이는 것도 눈감아 주시더니. 태자 형님이 황위에 오르면 이를 구실 삼아 저를 제압했을 테지요. 한데 아들이 그리 많으시면서 어째서 저를 고르신 겁니까? 설마, 제가 부황의 아들이 아닌 겁니까?”
몽달 황제는 곤청락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마구 성을 내며 소리쳤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가 함부로 떠들어 대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단 말이냐? 짐은 네가 상림군을 데리고 입궁한 이유를 아직 묻지 않았거늘, 오히려 네가 감히 짐에게 따져 묻다니? 여봐라, 당장 저 첩자를 잡아들이거라!”
기영군은 황제의 명에 곧장 묵용감에게 달려들었다. 상림군은 곧장 묵용감의 앞을 막아섰다. 또 양측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영군의 안색이 하나둘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평소 상림군의 실력은 기영군과 격차가 엄청났다. 한데 지금 앞에 있는 이들은 전부 비범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상림군이 아니었다!
묵용감은 기영군이 주저하는 틈을 타 목청을 높이며 그들의 격투를 말렸다.
“멈추거라!”
우렁찬 호통은 마치 천둥소리처럼 모든 잡음을 뒤덮었다. 서로 맞서던 양쪽 병사들도 일제히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은 다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분명 막을 수 없는 싸움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줄곧 궁금했던 일이 하나 있는데, 여기 있는 모든 이들도 나와 같으리라 믿는다.”
그가 대전 안에 있는 이들을 보며 말했다.
“대신들과 태자, 황자뿐만 아니라 단상 위에 저 뻔뻔한 놈 또한 의혹을 품고 있을 테지. 오늘 우리가 그 의혹을 풀어 주마.”
그는 심오한 미소를 지으며 목청을 높였다.
“도원곡 주인, 오래 기다렸소! 들어오시오!”
묵용감의 외침에 다들 대전 입구를 바라보았다. 바퀴 달린 의자에 탄 사내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한 무리의 상림군이 뒤따랐다. 몽달 황제는 그 사내를 보고 질겁한 표정을 했다. 이내 다리가 풀려 단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도원곡 주인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가면을 벗었다. 방 관리가 깜짝 놀라며 그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읊조렸다.
“주인.”
“괜찮다.”
도원곡 주인이 담담히 대꾸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을 봐야지.”
잠시 망설이던 방 관리는 결국 손을 풀었다. 도원곡 주인은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그의 맨얼굴이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가면을 벗은 사내의 얼굴은 몽달 황제와 똑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가진 기질은 완전히 달랐다. 몽달 황제가 정교한 보석을 박은 날카로운 은검이라면, 도원곡의 주인은 다시 주조한 검 같았다.
비록 예기는 이미 다했지만, 위력은 훨씬 더 강해 보였다. 도원곡 주인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몽달 황제를 바라보았다.
“곤청리, 그간 무탈하였느냐.”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모두의 안색이 급변했다. 황제의 이름은 분명 곤청롱이거늘… 곤청리라니? 단폐 위에 서 있는 자가 곤청리라면, 곤청롱은…….
조정의 중신과 노신들은 곤청리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그들은 줄곧 곤청리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고 알고 있었다. 한데, 황제의 대혼 날, 곤청리의 이름을 다시 들을 줄이야. 그것도 멀쩡히 살아 있는 그를 보게 되다니.
태자와 황자들은 얼이 빠진 얼굴로 어리둥절해했다. 어찌 부황과 저리 닮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곤청리는 또 누구고? 부황의 함자는 분명 곤청롱이거늘.
몽달 황제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다시 자리에 섰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라 겨우 옥좌에 앉았다. 옥좌 팔걸이에 손을 걸친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짐은 네가 패륜이에 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해서 일부러 농화를 백도탑으로 데려간 것이지. 황후로 세운다는 조서를 내려 이리 황급히 대혼을 치른 것도 다 널 이리 부르기 위함이다. 결국 이렇게 와 주었구나. 곤청리, 내 아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