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1화
길종이 여덟 번 울릴 때, 묵용감은 어떤 환관을 기절시키는 중이었다. 그리곤 그의 의복을 벗겨 백천범에게 갈아입혔다. 환관 신분으로 위장하는 게 정전에 들어서기 더 편할 것이다.
묵용감이 곁에 있으니 백천범이 움직일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시중을 완벽하게 들어 주었다. 옷깃을 정리하고, 요대를 묶고, 장포에 진 주름도 그가 펼쳐 주었다. 그녀가 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자그마한 얼굴을 들고 부군에게 활짝 웃어 주는 것이었다.
묵용감은 그녀의 볼을 꼬집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땐 슬쩍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태자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굳이 눈에 담고 싶지 않아 시선을 옮겼다.
저 두 부부의 애정 행각은 정말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태자비의 옷을 갈아입혀 주는 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게다가 태자비의 얼굴을 꼬집고 입을 맞추는 건 더더욱 못할 짓이었다.
그에게 부군은 하늘이자 처첩들이 우러러봐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가 아주 살짝만 안색을 굳혀도 처첩들은 곧장 무릎을 꿇고 죄를 뉘우쳤다. 그의 처첩들 또한 그에게 저리 헤벌쭉 웃어 주지 않았다.
만약 저런 모습을 보였다면 혹 어딘가 아픈 건 아닌지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그의 처첩들은 그저 다소곳한 자세로 그의 부름에 따를 뿐, 다른 표정은 절대 짓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낯선 감정이 들어찼다. 자신의 마음속에 동경이라는 감정이 가득 찬 걸 깨달았다. 그는 불에 데인 사람처럼 몸을 흠칫 떨며 처마 밑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들떴기 때문이다.
그는 두 사람이 마치 독처럼 느껴졌다. 저들이 하는 짓이 부부의 도리가 아니란 걸 명백히 알면서도 동경하다니! 백천범의 미소가 너무 찬란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묵용감의 눈에 담긴 깊은 정이 부러워서일까? 그는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동시에 까닭 없이 성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본 그가 거친 목소리로 성을 냈다.
“어찌 서둘러 가지 않고?”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담소를 나누었다. 그들의 눈에는 서로의 모습만 보이는 듯했다. 옆을 지키던 영십삼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시지요.”
일개 수행원에게 대답을 듣자 태자는 화가 치밀었다.
“무얼 기다린단 말이냐?”
묵용감이 백천범을 이끌고 다가와 태연하게 말했다.
“당연히 길시를 기다리는 것이지.”
뎅, 뎅, 뎅……. 길종이 몽달 황궁의 상공에 가득 퍼졌다. 종소리와 함께 곧 황후가 될 여인의 의장 행렬이 천천히 대전으로 향했다. 붉은 대추색 예복을 차려입은 환관 네 명이 손에 기다란 목패를 든 채 맨 앞에서 길을 열었다.
꽃띠와 깃발을 든 시녀들 뒤에 황후의 봉련鳳輦이 따랐다. 여자 악공들이 봉련 주변을 에워싸고 각종 악기를 연주하며 정전을 향해 다가왔다.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백천범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라? 가마 안에 누가 있을까요? 설마 난비가 아직 안 들켰나?”
태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봉련에 난비가 타고 있을 거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야심 때문에 마음을 바꾸고 그와의 동맹을 깬 것이다. 그는 미간을 좁혔다. 안 된다. 반드시 저 혼례를 막아야 했다. 저 여인의 뜻대로 되게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 많은 이들 앞에서 부황의 체면이 어찌 되겠는가? 하지만 그가 발걸음을 떼자마자 영십구가 가로막았다.
“전하, 기다리십시오.”
태자가 그를 노려보았다.
“감히 본궁을 막는 것이냐? 본궁이 소리친다면 너희는 절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영십삼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빠져나갈 수 없지만, 전하께서는 목숨을 잃으실 것입니다.”
태자는 목이 꽉 막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들이 난비를 정전으로 데려와 우스운 꼴을 만들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 이들을 막지 못했다.
봉련은 정전 입구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집무를 보는 마마는 신부를 부축해 가마에서 내려 주었다. 마지막 길종이 울릴 때, 신부의 붉은 옷자락이 문턱 너머로 사라졌다.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봅시다.”
몽달 황제는 대전으로 들어오는 신부를 바라보며 만면에 희색이 가득했다. 그는 백천범이 소란을 피우다 길시를 놓칠까 봐 정말 걱정이었다. 그래도 혼례복을 자른 뒤로는 제법 얌전히 구는 걸 보니 이제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듯했다.
어여쁜 미인이 사뿐사뿐 요염한 자태로 걸어오자 황제는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오랜 염원이 곧 이루어지는데, 어찌 감정이 격해지지 않을까.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그는 규율은 무시한 채 단폐를 내려와 신부를 맞이했다.
자그마한 손이 그의 손에 닿자 보드라운 살결과 함께 얼음장 같은 찬기가 느껴졌다. 그는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분명 너무 긴장한 탓이겠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꽉 쥐고 그의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이내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단폐 위로 올랐다. 그때, 별안간 누군가 소리쳤다.
“부황, 그 여인을 황후로 세우면 아니 됩니다!”
황제는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육황자 곤청락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부황,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신하들도 우르르 무릎을 꿇더니 일제히 소리쳤다.
“폐하,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황제도 신하들이 황후 책립에 반대하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혼까지 온 마당에 소란을 피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안색이 잿빛으로 변한 황제는 신하들을 향해 마구 호통쳤다.
“다들 그리 반대를 해야겠느냐?”
예전 같았다면 신하들은 황제의 호통에 전부 몸을 바들바들 떨었겠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었을지언정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당당한 얼굴을 했다. 황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때, 곤청락이 또다시 소리쳤다.
“부황,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신하들도 그를 따라 외쳤다.
“폐하,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황제는 그제야 깨달았다. 앞장서는 사람이 있으니 다들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 황태자도 아닌 곤청락을 앞세워 이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설마 반란을 일으키려고? 그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런 뻔뻔한 놈들! 어딜 감히 대혼에서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여봐라, 당장 저들을 끌어내 호되게 매질하거라!”
정전 주변은 기영이 지키고 있었다. 황제의 명에 사병들이 곧장 안으로 들이닥쳤지만, 꼿꼿이 무릎을 꿇고 있는 신하들의 모습에 어찌 손을 써야 할지 몰랐다. 설마, 이 많은 대신들을 전부 다 끌어내야 한단 말인가?
기영의 우두머리는 무의식적으로 태자를 바라보았다. 태자 역시 그 자리에 서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또한 차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때, 곤청락이 또다시 목청을 높였다.
“부황, 충언은 귀에 거슬리는 법입니다. 내력이 의심스러운 여인을 어찌 몽달의 국모로 삼으십니까? 일국의 국모는 아이들 장난이 아닙니다. 부황, 부디 심사숙고하여 주시옵소서!”
신하들도 그를 따라 외쳤다.
“폐하, 심사숙고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엄청난 함성에 황제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안색이 거의 파랗게 질린 황제가 기영군에게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자들을 끌어내래도! 전부 끌어내어 장형에 처하라!”
기영군은 황제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기에 하나둘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별안간 밖에서 상림군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매서운 소리가 들렸다.
“누가 감히 육 전하께 손을 댄단 말이냐!”
고개를 돌린 곤청락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그저 이 혼례를 깨고 싶었을 뿐,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아니었다. 대체 누가 상림군을 안으로 들여보냈단 말인가. 이는 오히려 그에게 있어 퍽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를 보고 있던 태자는 기영 총령에게 소리쳤다.
“어찌 보고만 있는 것인가? 어서 육 전하를 잡아들이거라! 감히 역모를 꾀하고 있지 않은가!”
무릎을 꿇고 있던 신하들은 그의 말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곤청락과 선을 그었다. 그들은 그저 황제에게 청원하려는 것이었을 뿐, 역모를 꾀하려는 게 아니었다. 역모는 목이 날아가는 대죄인데, 누가 목숨을 걸고 싶겠는가. 곤청락은 황급히 황제에게 해명을 늘어놓았다.
“부황, 소자는 그저 청원을 하려는 것뿐입니다. 역모라니요. 부황을 향한 소자의 충심이 얼마나 깊은데, 어찌 역모를 꾀하겠습니까. 태자가 소자를 모함하는 것입니다. 부황, 부디 한쪽 말만 듣지 마시옵소서…….”
황제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매서운 눈빛으로 곤청락을 바라보는 게, 그의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기영군은 하나둘 패도를 뽑아 들었다. 그에 상림군도 검을 뽑아들었다. 대전은 중축을 경계로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시퍼런 칼날이 번쩍이며 궁 안을 섬뜩하게 비췄다.
검이 뽑히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난비는 결국 참지 못하고 면사포를 넘겼다. 때마침 고개를 돌린 황제는 난비의 얼굴을 보더니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확 낚아채며 물었다.
“어찌 당신이? 짐의 농화는?”
황제가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난비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고통에 얼굴까지 다 일그러진 채 용서를 빌었다.
“폐하, 신첩의 손목이 부러지겠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폐하,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요…….”
황제는 그녀의 손을 힘껏 내팽개쳤고 난비는 그대로 넘어졌다. 붉은 혼례복이 넓게 펼쳐지며 꽃이 만개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붉은 예복 덕분에 종잇장처럼 새하얀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더 하얗게 보였다.
“어서 말하지 못할까! 짐의 농화는?”
황제는 난비의 손을 짓밟으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단폐 아래의 두 진영 사이에서도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황제가 노발대발하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다시 단폐 위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말하지 못할까? 어서 말하래도!”
몽달 황제는 미친 사람처럼 난비의 손을 있는 힘껏 짓밟았다. 그녀의 섬섬옥수는 이미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난비는 엄청난 고통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황제는 그녀의 목을 힘껏 졸랐다. 혼절했던 난비는 컥컥거리며 눈을 떴다. 이번엔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입을 쩍 벌린 그녀는 힘겹게 숨을 뱉으며 말했다.
“폐, 폐하…….”
그때, 밑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비를 놓아 주세요.”
기둥 뒤에서 나온 백천범이 황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난비를 놓아 주세요. 전 여기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