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0화
백천범은 창밖으로 몸을 날려 무사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여기일세.”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니 한 사내가 모퉁이에 서서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철혈시위들이 입는 검은 옷을 입고 얼굴에 복면까지 쓴 데다 도롱이와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목소리가 매우 낮았지만, 백천범은 태자의 목소리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태자가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건넸다.
“어서 입으시게.”
백천범은 손을 뻗어 그가 건네는 것을 받아 들었다. 도롱이와 모자였다. 그녀는 도롱이를 갖춰 입고선 그에게 달려갔다. 태자는 담벼락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자신의 어깨를 밟고 담벼락을 넘으라는 의미였다.
백천범은 사양하지 않고 그의 몸을 밟아 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무사히 착지하고 보니 주변에 철혈시위로 보이는 시체 몇 구가 나뒹굴고 있었다. 입가에 자색빛 피를 흘리고 있는 거로 보아 중독된 듯했다. 그녀가 흠칫 놀라며 담을 넘는 태자를 바라보았다.
“전하가 한 거예요?”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얘기를 나눌 곳이 아니니 다른 곳에서 다시 얘기하세.”
백천범도 더는 묻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 처소와 제법 멀어졌을 때, 태자는 그제야 발걸음을 늦추고 그녀를 한 정자에 숨겼다.
얼굴을 덮은 검은 천이 비에 흠뻑 젖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백천범은 정자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모자와 복면부터 벗고 힘껏 숨을 내쉬었다.
태자도 자신의 복면을 벗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와 맞붙은 찰나의 순간, 그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남장을 하지 않은 백천범의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짙은 눈썹도, 입가에 커다란 점도, 누런 피부도 아닌 얼굴을.
이마 주변에는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어졌고 얼굴에는 자잘한 물방울이 튀어 있었다. 맑은 눈망울은 물에 씻어낸 듯 촉촉했다. 꼭 비바람 속에서도 활짝 피어난 꽃처럼 요염하고 아름다웠다. 초상화에 그려진 여인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웠다.
“당신…….”
그는 순간 목이 잠겨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천범도 그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복잡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몽달 황제가 그의 생부는 아니라 해도 그와 태자는 남매인 걸까? 시간을 계산해 보면 아마 이 관계 또한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조금 섭섭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사내처럼 공수를 하며 말했다.
“전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자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차마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을. 본궁은 자네가 원치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네는 본궁의 손님이니… 본궁이 어찌 참을 수 있을까.”
횡설수설하던 태자는 본인조차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전하.”
“그래, 말해 보시게.”
백천범은 기대가 가득 담긴 그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하려던 말을 삼키고 말았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거품이 사라지면… 그는 어떻게 될까? 그녀 또한 그와 마찬가지였다. 일찍이 혈육의 정을 갈망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진상이 수면 위로 드러나자 고통과 실망뿐이었다. 그녀가 다정한 얼굴로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간 전하께 제 신분을 속였습니다. 부디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어요.”
“본궁도 그리하는 게 더 편했을 거란 걸 잘 아네. 노여워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게.”
태자는 여제와 흡사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따스하게 웃었다.
“모친과 참으로 많이 닮았군.”
백천범이 말했다.
“전하께서는 폐하를 닮지 않으셨으니 분명 전하의 어머니를 닮으셨을 겁니다.”
태자는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이곳은 사람이 자주 들어오진 않지만, 너무 오래 머물러선 안 되네. 어서 가지.”
“전하, 제가 출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겁니까?”
태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은 황제의 대혼이라 평소보다 경비가 삼엄했지만, 궁문을 지나는 이들이 많으니 그 틈에 섞여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선 안전한 곳을 찾아 숨게. 상황이 정리되면 다시 얘기하는 것으로 하지.”
“전하께서 절 도와주신 걸 다른 이들이 알면 어찌합니까?”
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네.”
알고 있는 자들은 이미 입을 막아 버렸으니.
그들은 정자에서 나와 좁은 길로 꺾어 들어갔다. 백천범은 태자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를 믿었기에 마음 편히 따라갔다. 그때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태자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
“어찌 멈춘 것인가?”
백천범은 주변을 바라보았다. 비가 끊임없이 퍼부어 시야를 가로막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가쁘게 뛰었다. 그녀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이 같이 다니면 표적이 되기 쉬워요. 전 이쪽으로 갈게요.”
말을 마친 그는 서둘러 태자에게 공수를 하고 다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태자는 흠칫 놀라며 서둘러 그녀 뒤를 쫓았다.
“안 되네. 혼자서는 너무 위험하네. 본궁과 함께 가시게.”
백천범은 마음이 너무 조급했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전하께서는 어서 돌아가 보세요. 다른 이들한테 들키면 성가실 거라고요.”
태자는 백천범이 별안간 왜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를 극구 말렸다.
“자네는 궁 안 지리를 잘 모르지 않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잘 모를 테니 본궁과 함께 가시게. 본궁이 출궁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네.”
백천범은 설명을 다 하지 않고 서둘러 걸어갔다. 태자는 조급한 마음에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위험하다 하지 않았는가. 어찌 이리 말을 안 듣는…….”
그때, 그의 손목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빗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가 그의 손목을 억세게 잡았다.
이윽고, 그자는 태자의 손목을 비틀어 내팽개쳤다. 그의 힘에 밀려 몇 발짝이나 뒷걸음질 친 태자는 그제야 엄청난 체격을 가진 사내가 백천범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모자로 눈매를 가린 사내는 단단한 턱만 드러내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을 본 태자는 깜짝 놀랐다. 예전에 만나 본 적 있는 금수 포목의 황 주인장이었기 때문이다. 성 외곽에 다녀온 그날, 그들은 함께 식사까지 했다. 그런데 어찌 그가 궁에 나타난 것일까? 게다가 손에는 검까지 들고?
뎅, 뎅, 뎅……. 길종이 또다시 소리를 내며 일곱 번 울렸다. 태자는 그에게 호통쳤다.
“대체 뭐 하는 자인가?”
묵용감 뒤에 가려져 있던 백천범은 고개를 빼꼼 내밀며 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여긴 제 부군이에요.”
태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 이자가 어찌 자네의 부군이란 말인가? 이자는 분명…….”
묵용감은 그의 말이 영 달갑지 않았다. 그가 백천범을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가 이 여인의 부군이면 안 된단 말인가?”
태자는 그의 품에 사랑스럽게 기댄 백천범의 모습에 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전까지 서로 모른 척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남원의 공주인 남농화가 일개 몽달 상인에게 시집을 갔다고?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 내쉬며 애써 냉정을 되찾았다.
“어찌 궁에 들어온 것인가? 대체 목적이 무엇이야?”
“당연히 내 처를 구하러 입궁했소만.”
묵용감이 백천범의 손을 꼭 쥐며 그녀에게 미소를 보였다.
“갑시다. 이 부군이 그대에게 떠들썩한 구경거리를 보여 주겠소.”
말을 마친 그는 태자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백천범을 데리고 앞으로 휙 가 버렸다. 태자는 여전히 넋을 놓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가시죠, 태자 전하. 제법 볼만한 구경거리일 겁니다.”
존귀한 신분인 태자에게 그 누가 강요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황 주인장을 수행하던 사내 두 사람은 그를 보며 씩 웃었다. 태자는 그들과 격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수행원들은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양쪽에서 몸을 날렸다. 태자의 눈에는 그저 눈앞에서 뭔가 훌쩍 날아간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태자를 꽉 붙잡고 강제로 그의 입을 벌렸다. 그리곤 자그마한 환약을 입에 넣어 빗물과 함께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환약이 목에 걸리자 그들은 태자의 가슴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목에 걸려 있던 환약이 순식간에 배 속으로 쓸려 내려갔다. 태자가 환약을 삼킨 것을 확인한 영십삼과 영십구는 곧장 태자를 풀어 주었다.
“죽고 싶지 않으시거든 얌전히 정전으로 따라오십시오. 도중에 수작을 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태자는 허리를 숙이고 속을 게워 내려 했지만, 헛구역질만 나올 뿐이었다. 영십삼이 말했다.
“소용없습니다. 위액에 섞이자마자 녹았을 테니 그리 게워 낼 수도 없습니다. 말썽만 피우지 않으시면 목숨은 살려 드리겠습니다. 자, 어서 가시지요. 우리 노야께서 좋은 구경을 시켜 주신다고 하지 않으십니까.”
태자는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노려보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 결국 앞으로 향했다.
* * *
적막한 비밀 통로 안, 누군가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그는 화절자가 없었기에 흐릿한 빛에 의존하여 앞으로 걸어갔다. 매 걸음 신중하고 느릿하게 내디뎠고 주변 소리에도 귀 기울였다. 그의 시선은 양쪽 석벽에 고정되어 묵용감이 남긴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그의 약 서른 자 뒤에서도 누군가 신중하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그자의 뒤로는 한 무리가 뒤따르는 중이었다. 엄청난 수였지만,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는 영구가 이끄는 영가군寧家軍 특유의 탐색 방법이었다. 앞장을 선 사람이 주위를 살피다 만약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면 두 번째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두 번째 사람은 곧장 그 신호를 받아 뒤따라오는 무리에 전달하여 병력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들은 이렇게 조용히 어둠 속을 가로질러 한 발 한 발 몽달 황궁으로 잠입했다.
* * *
궁문 밖, 상림군 좌대사의 관복을 입은 사내가 손에 옥패를 들고 궁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말했다.
“오늘은 황상의 대혼이니 손님이 많이 오갈 것이네. 궁 안의 보초로는 부족하니 상림군을 들여보내라는 육황자의 명이 있었네. 본 장군은 육 황자의 명을 받들어 입궁해야 하니 문을 열어 주게.”
문지기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상림군이 입궁한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옥패는 분명 육황자의 것이 맞았다. 상림군도 지금은 육황자가 관리하고 있었기에 차마 좌대사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문지기는 예를 갖춰 물었다.
“좌대사 대인, 몇 명을 데리고 입궁하실 계획이십니까?”
사내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많지 않네. 삼백 명일세.”
문지기는 마음을 놓았다. 삼백 명 정도면 많지 않았다. 사실 육황자가 병사들을 데리고 태자를 찾아가 말썽을 피울까 걱정이었는데 오늘은 날이 날인 만큼 두 전하께서도 자중하실 것이다.
게다가 궁 안에는 기영과 철혈시위영이 있으니 상림군 삼백은 그들의 적수도 되지 못한다. 황자들 간의 대립이야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어느 한쪽에도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육황자의 명을 받은 이에게 순순히 인정을 베풀었다.
문지기는 옥패를 사내에게 다시 돌려 주었고 수하들에게 문을 열어 주라고 분부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어찌 이리 비가 오나 모르겠습니다. 좌대사께서 고생 많으십니다.”
사내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를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이니 고생이 아니네.”
사내가 손을 휘젓자 뒤에 서 있던 ‘상림군’들은 일제히 발걸음을 맞춰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