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9화
백천범은 보따리를 열었다. 안에는 시위들이 입는 의복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 난비를 보며 물었다.
“절 왜 도와주는 거죠?”
“태자와 제 일입니다. 당신과는 상관없어요.”
난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겉옷을 벗더니 찻물에 젖은 혼례복을 입기 시작했다.
백천범은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시간이 없었기에 재빨리 시위복으로 갈아입었다. 백천범이 얼굴에 복면까지 쓰자 난비가 방 뒤쪽의 창문을 열며 말했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두 번 들리거든 밖으로 뛰어나가요. 태자 전하가 밖에 있을 거예요.”
백천범이 창문 위로 기어오르며 물었다.
“당신은요?”
“옷을 갈아입고 당신인 척할 거예요.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요.”
“발각되면 어찌 빠져나가려고요?”
“당신한테 얻어맞아 정신을 잃었다고 할게요.”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바깥에서 작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백천범은 곧장 창문을 넘어갔다.
혼례복을 입은 난비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봉관을 쓰고 혼례복을 입은 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별안간 마음이 바뀌었다. 쓰러진 척하는 대신, 붉은 예복을 입고 황제와 혼례를 치러 명실상부한 황후가 되고 싶었다.
혼례를 치른 뒤 황제가 사람이 바뀐 걸 알았다 한들 어찌하겠는가.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례를 치렀으니 암만 황제라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정교한 예복을 쓸어내리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 입궁할 때, 그녀는 신분이 낮은 시첩에 불과했다. 그저 장난감처럼 황제의 침대에 보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얼굴 덕을 보고 총비로 올라서긴 했지만 그건 모두 모래성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시선을 올리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엔 점점 굳건함이 묻어났다. 눈앞에 온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그녀는 침대 가에 앉아 붉은 면사포를 쓰고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잠시 뒤, 마마와 시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새신부가 직접 예복을 갖춰 입고 가만히 앉아 있자 다들 멍청한 얼굴을 했다. 난비가 보이지 않는 게 조금 수상했던 마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인, 난비 마마께서는요?”
난비가 목을 누르며 백천범과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갔어요. 밖에 서 있었는데 못 봤어요?”
마마는 얼굴을 붉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소인이 막 측간에 다녀와서 보지 못하였나 봅니다.”
사실 잠시 차를 마시러 다녀왔다. 나이가 드니 추위를 참는 게 힘들었다. 문 앞에 잠시 서 있던 그녀는 다른 방으로 몸을 피했다. 어차피 옆방이니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신부가 면사포를 쓰면 다신 벗을 수 없었다. 혼례를 다 마친 뒤, 황제가 직접 면사포를 넘겨 주어야 했다. 마마는 불안한 마음에 또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인, 난비 마마께서 화장을 해 주신 것입니까?”
“당연하죠.”
“혹 마마께서 실면도도 해 주셨나요?”
“네.”
“분도 칠해 주셨고요?”
“네.”
“붉게 색채 화장도 해 주셨습니까?”
“했어요.”
난비는 성가신 척 대꾸했다.
“할 건 다 했으니 다음에 만나면 고맙다고나 하세요. 여기서 당신들이 할 일은 없으니 그만 나가요. 길시가 되면 그때 들어와요.”
그녀의 말에 마마도 더는 묻지 못했다.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남 부인이 소란을 피우지 않는 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해야 했기에 조용히 물러났다.
* * *
묵용감은 유심히 주위를 살피며 걸어갔다. 그가 웃으며 도원곡 주인에게 말했다.
“몽달 황궁에 이런 비밀 통로가 있을 줄은 몰랐소. 어찌 발견한 것이오?”
도원곡 주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쓴 금색 가면만 어둠 속에서 차가운 빛을 뿜어낼 뿐이었다. 바퀴 의자를 밀던 방 관리도 무표정하긴 마찬가지였다. 검은 옷을 입은 그의 수하들은 부채꼴 진영으로 주인 곁을 지켰다. 묵용감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대수롭지 않은 척 단단한 석벽을 두드렸다.
“몽달 황제는 여길 모르나 보오? 어찌 병사들을 보내지 않고?”
도원곡 주인은 조금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많은 걸 물으시는군요.”
묵용감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얼 더 감추겠다는 것이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지만, 난 아직도 그대가 누구인지 모르오.”
도원곡 주인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묵용감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알겠소.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하지만 묵용감은 속으로 생각했다. 도원곡 주인을 나중에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묵용감 일행은 거의 반 시진이나 비밀 통로를 걸었다. 구불구불 끊임없이 이어진 통로는 마치 영원히 끝이 나오지 않을 것처럼 온통 암흑이었다. 횃불이 석벽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기괴한 형상을 그렸다. 묵용감은 유난히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웠기에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
“출구까진 얼마나 더 가야 하오?”
도원곡 주인이 모처럼 농을 건넸다.
“왜요, 도착했을 때 부인이 이미 몽달의 황후가 되어있을까 봐 겁이 납니까?”
묵용감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
“정말 그러하다면 내 곧장 몽달 황제를 죽일 것이오.”
방 관리가 묵용감을 힐끔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반면 도원곡 주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내를 끔찍이 아끼는 애처가라 하더니… 역시 진짜로군요. 이 노부도 그 마음에 퍽 감동했습니다. 마음 놓으세요. 일을 그르치진 않을 테니.”
묵용감이 무의식적으로 석벽을 긁으며 물었다.
“당신도 누군가를 깊이 은애해 본 적 있소?”
도원곡 주인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흠칫 놀랐지만, 금세 시선을 옮긴 채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 노부는 그런 마음을 품어 본 적 없습니다. 사랑은 너무 번거로우니까요.”
묵용감도 더는 떠보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빗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이제 곧 밖으로 나간다는 의미였다. 역시나 조금 더 걸으니 도원곡 주인이 그들을 멈춰 세웠다. 그가 앞을 가리키며 묵용감에게 말했다.
“저기가 출구입니다. 어서 가십시오.”
묵용감이 물었다.
“나 혼자 나간단 말이오?”
도원곡 주인이 말했다.
“물론 저도 나갑니다. 하지만… 길이 다르지요.”
묵용감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몽달 관원들이 입는 장포를 훑었다.
“몽달의 조정 신하가 되었으니 정전에서 혼례를 지켜봐야겠군. 제법 떠들썩할 텐데… 구경하지 않겠소?”
도원곡 주인이 말했다.
“이 노부는 조용히 있는 게 좋습니다. 떠들썩한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묵용감이 또다시 물었다.
“일을 마친 뒤에는 어떻게 다시 만나면 되오?”
도원곡 주인은 그에게 애매모호한 말을 남겼다.
“만나야 할 때, 자연히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 마나인 말이었지만, 묵용감은 그의 말을 알아듣고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위로 들어 올렸다.
“하면 난 먼저 가 보겠소. 다음을 기약합시다.”
도원곡 주인도 예를 갖췄다.
“다음에 또 봅시다.”
가면 뒤로 보이는 그윽한 눈망울이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출구는 물이 다 마른 폐우물 바닥이었다. 통로가 발각될 것을 대비해 우물은 수직으로 뚫려있지 않았고 중간에 모퉁이를 돌아 아치형으로 이어졌다. 석벽에는 밟고 올라갈 수 있도록 좁은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우물 바닥 움푹한 곳에 기름 주머니가 놓여 있었는데 안에 화절자와 도롱이, 요패 등이 들어 있는 거로 보아 그를 위해 준비해 둔 것 같았다.
묵용감도 사양하지 않고 안에 든 물건을 품에 쑤셔 넣고 도롱이를 입었다.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때, 그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쏟아졌다. 묵용감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음침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화살촉처럼 떨어졌다.
그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빗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방심할 수 없었던 그는 우물 속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우물을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궁의 외딴곳인 듯했다.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가 폐우물을 가리고 있었다. 왼쪽엔 얼룩덜룩한 궁전 담벼락이 있었고 오른쪽엔 광활한 땅이 펼쳐져 있었다. 앞쪽은 자그마한 숲이 있었는데 대부분 잎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바람에 나부꼈다.
묵용감은 허리를 숙이고 굵직한 풀줄기를 주워 동그랗게 만들더니 진흙탕에 던졌다. 그는 그 풀줄기를 밟고서 성큼성큼 숲으로 향했다.
숲을 가로질러 가자 웅장한 궁전이 퍼붓는 빗속에 가려져 회색 윤곽만 드러났다. 그는 궁전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황궁 지도를 떠올렸다. 그는 입꼬리를 올려 스산한 냉소를 짓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앞으로 걸어갔다.
묵용감이 궁전에 다가갈수록 오가는 사람도 점점 더 많아졌다. 다행히 도롱이를 입고 모자를 쓴 데다 비까지 억수같이 퍼붓고 있어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빗소리를 뚫고 우렁차고 긴 종소리가 다섯 번 울렸다. 묵용감은 무의식적으로 궁전의 서남쪽을 바라보았다. 백천범이 그곳의 작은 처소에 갇혀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울린 종소리는 길종吉鐘 소리였다.
길종은 일각마다 한 번씩 울리는데 아홉 번 울리면 길시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땐 신부가 정전으로 보내져 황제와 혼례를 치르게 될 것이었다.
그는 시선을 거두고 궁벽을 따라 걸어갔다. 맞은편에서 순찰병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빗줄기가 그들의 갑옷 위로 떨어지며 탕탕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침착하게 그들을 지나쳤다.
벽 끝까지 걸어간 그는 재빨리 좁은 길로 돌아서서 순찰병을 피해 성벽에 올랐다. 비가 쏟아졌지만 성벽 위에선 여전히 병사들이 순찰 중이었다. 허리에는 활을, 어깨에는 화살통을 맨 병사들은 수상한 이가 나타나면 가차 없이 활을 쏠 기세였다.
묵용감은 인내심을 갖고 순찰병들이 벽 모퉁이를 돌 때까지 기다렸다가 귀신처럼 빗속을 뚫었다. 얼마 뒤, 궁벽 옆 거대한 오동나무 뒤로 흔들거리는 인영이 보였다. 묵용감은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예상보다 좀 더 일찍 도착했다. 그는 눈을 번득이며 찾아야 할 사람을 빠르게 찾아냈다.
그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그에게 손짓을 보냈다. 묵용감 또한 손짓으로 답하며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사람이 다시 나무 뒤로 물러나자 묵용감도 벽에 몸을 붙인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가 드넓은 전정에 돌아왔을 때, 길종이 여섯 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