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8화
묵용감은 탁자 앞에 앉아 몽달 황궁 지도만 빤히 바라보았다. 이미 똑같은 자세로 족히 두 시진은 보고 있는 듯했다. 탁자에 놓인 지도는 영십삼이 그린 게 아니라 그가 곤청락에게서 얻어 온 완벽한 금궁 지도였다.
그는 백천범이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녀는 똑똑하고 담력도 좋은 여인이었다. 그걸 알지만 걱정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녀 생각이 났다 하면 자꾸만 마음이 조급했다. 이런 때에 그녀 곁에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게 죽을 만큼 괴로웠다.
그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조급해선 안 된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백천범이 궁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신이 일을 망쳐선 안 됐다.
한참 뒤, 묵용감은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얼굴 위에 검은 눈동자가 빛을 내뿜었다. 저 안쪽 깊숙이 검은 불길이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두 눈을 마주한 이들은 까닭 없이 몸을 떨었고 방 안 가득 한기가 퍼져 감히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했다.
묵용감은 지도를 펼쳤다. 이미 머릿속에 몽달 황궁이 각인된 상태라 다시 본다 한들 아무 의미 없었다. 이번 계획은 임시로 세운 것이라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래도 시간이 긴박한 만큼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백천범을 구해 오는 것이었다. 몽달 황제와 도원곡 주인이 어찌 싸우든 그와는 상관없었다.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짚어 보던 그는 이해가 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도원곡 주인은 분명 몽달 황제와 원수지간이 아니던가? 원수라면 목숨을 빼앗고 싶을 텐데 매번 중상만 입히라고 했다.
양 잡기 대회에서도, 백도탑에서도, 이번 계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철천지원수인데 어째서 죽여 버리지 않고 중상만 입히려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그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도원곡 주인의 실력은 이미 몽달을 뒤엎을 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도원곡 주인은 직접 나서지 않고 남의 손을 빌려 일을 처리했다. 자신이 복수하러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꽁꽁 숨기려는 듯했다.
그런데 아무리 숨는다 한들 노신들은 그를 알아볼 터. 도원곡 주인이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벗으면 분명 수수께끼는 금방 풀릴 것이다.
밤은 점점 깊어 가는데 묵용감은 여전히 등불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백천범이 잘 자는지 걱정이었다. 그녀는 구속되는 걸 끔찍이 싫어했다. 자그마한 처소에 연금되었으니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을 터.
탁자 위에 놓인 촛불이 조용히 타올랐다. 자그마한 불꽃은 꼭 누군가의 밝은 눈빛 같았다. 그녀를 떠올릴 땐 묵용감의 얼굴에도 비로소 따스함이 묻어났다…….
창밖에 별안간 강풍이 불어 닥쳤다. 귀신이 곡소리를 내듯 휙휙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윽고 콩알만 한 빗방울이 떨어지며 창가에 부딪쳤다. 구슬이 떨어지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였다.
묵용감은 미간을 찌푸렸다. 건조하기로 유명한 몽달의 겨울에 어째서 갑자기 비가 내린단 말인가?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냉소를 지었다. 아마 하늘마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인 것일 테지.
그 순간, 그는 안색을 굳히고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비바람 속에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묵용감은 조용히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그가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한 것이다.
* * *
다들 몽달 황제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대대로 이어지는 제도와 규율까지 무시하고 혼례를 서둘렀다. 소식을 접한 신하들은 다들 멍한 얼굴로 서로 눈치를 살폈다.
며칠 전부터 육황자 곤청락이 암암리에 신하들에게 접근하여 함께 상주서를 올려 조서를 파기하자고 설득했다. 또한 다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근비를 황후로 책립하자는 말까지 했다.
황후 문제는 나중에 논의하더라도, 조서를 파기하는 건 다들 동의했기에 암암리에 그와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데 상주서를 올리기도 전에 황제가 먼저 움직였다. 황제는 오늘 당장 대혼을 치를 테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식을 지켜보라고 했다.
어젯밤부터 억수 같은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더니 지금도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굵은 장대비가 쏟아져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하지만 그 장대비조차도 황제의 결심을 흔들진 못했다.
굵은 빗줄기 속에 청회색 우산들이 펼쳐졌다. 그 아래로 환관과 시녀들이 분주히 오갔다. 급박하게 치러지는 혼사 때문에 각 궁에서 급히 일손을 파견하여 혼례 준비를 도왔다. 큰비가 내리긴 해도 수많은 이들이 이리저리 오가며 제법 떠들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곤청락은 뜨거운 솥 안의 개미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신하들은 전부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 또한 속수무책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그는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했다. 이런 상황에선 오직 묵용감만이 그에게 분명한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식을 접한 묵용감도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였지만 재빨리 냉정을 되찾았다. 이내 붓을 들고 서신을 쓴 뒤, 소식을 전달할 이에게 넘겼다.
곤청락의 수하가 떠난 뒤, 그는 시위들을 불러 각자에게 임무를 맡겼다. 시위들은 그의 명을 받자마자 곧장 빗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묵용감은 도원곡 주인과 합류했다. 도원곡 주인을 따라 몽달 황궁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를 들어섰을 땐, 그 또한 적잖이 놀랐다. 도원곡 주인은 몽달 황실 사람일 테니 황궁의 비밀 통로를 아는 게 의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몽달 황제가 모르는 게 가능한 일인가? 어째서 그는 이 통로를 막아 두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이 당당히 들어올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인가. 아님 정말이지 몽달 황제는 이 비밀 통로를 모르고 있단 말인가?
* * *
시녀들이 봉관과 예복을 가져왔다. 백천범은 몽달 황제가 드디어 실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혼을 할 거라더니… 오늘 당장 치르려 한단 말인가.
평소 집무를 맡아 보던 마마嬷嬷도 오늘은 경사스러운 색깔인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마마는 시녀들을 이끌고 백천범에게 깍듯이 절을 올렸다.
“부인, 감축 드립니다. 곧 길시이니 소인들이 부인께 혼례복을 입혀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우선 좀 보여 주세요.”
백천범의 말투가 온화했기에 시녀들도 공손히 혼례복을 건넸다.
“부인, 한번 보시지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며칠 동안 만든 예복입니다. 오늘 아침에 완성한 덕에 다행히 길시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백천범은 탁자 위에 혼례복을 올려놓곤 은가위로 옷을 잘랐다. 마마와 시녀들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그녀에게서 가위를 빼앗았다.
“부인, 대체 무얼 하시는 겁니까? 멀쩡한 혼례복을 어찌 자르십니까?”
“전 이미 혼인을 한 몸입니다. 부군도 있고 아이도 있지요. 한데 왜 다시 시집을 가야 한단 말입니까? 당신들 황제가 실성했다고 해서 당신들까지 실성한 것입니까?”
마마와 시녀들은 서로 눈치만 보기 바빴다. 그들이 어찌 내막을 알겠는가. 그저 황제가 동궁에서 빼앗아 온 여인이란 것만 알고 있었다. 분명 적절치 못한 일이긴 했지만 누가 감히 황제에게 잘잘못을 따지겠는가? 태자조차 아무 말도 못 하고 가슴앓이만 하고 있거늘.
“되었어요. 당신들한테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라고.”
백천범은 축 처진 모습으로 창밖에 퍼붓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만들 나가요. 혼자 있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도 나갈 수 없었다. 백천범이 또다시 무슨 일을 저지른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집무 마마는 당장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황제에게 알렸다.
예복으로 갈아입은 황제는 그 소식에 부아가 치밀었다. 혼례를 앞두고도 소란을 피우다니! 평소 너무 오냐오냐해 주니 버릇이 된 모양이었다. 금테를 두른 그의 넓은 소매가 파르르 떨렸다.
“미리 준비해 둔 혼례복이 더 있지 않으냐. 이번엔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원치 않아도 무조건 갈아입히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그 죄를 물을 것이야.”
시녀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서둘러 백천범의 처소로 향했다. 시녀의 말을 들은 마마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황제의 명이 떨어진 이상, 남 부인에게 미움을 사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시녀들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녀들이 곧장 백천범을 붙잡았다.
저들이 강경하게 나오니 백천범도 더는 예를 차리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에 있던 주전자를 집어 시녀들에게 내던졌다. 주전자에 담겨 있던 찻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겨울에 몸이 젖은 채로 다니려면 제법 고통스러울 것이다.
백천범은 그 틈을 노려 밖으로 내달렸다. 또 하얀 가루를 입힌 콩을 한 주먹 뿌렸다. 시녀들의 젖은 몸에 콩이 닿자 빨간 옷에 얼룩덜룩한 반점이 생겼다. 심지어 얼굴까지 가루로 뒤범벅되었다.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던 중 누군가 목청을 높였다.
“이게 어찌 된 것인가. 가루콩은 또 뭐고? 온통 다 가루콩투성이네.”
목소리의 정체는 난비였다. 마마는 서둘러 옷에 묻은 하얀 가루를 털고 무릎을 굽히여 예를 갖췄다.
“난비 마마를 뵙습니다.”
“되었네.”
난비가 웃으며 그녀를 일으켰다.
“난 그저 새 신부를 보러 온 것이네.”
그녀를 고개를 돌려 백천범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새신부께선 어찌 아직도 옷을 갈아입지 않으셨습니까? 곧 길시인데 말이에요.”
백천범은 난비의 암시를 알아차렸지만, 아직은 그녀를 쉽게 믿을 순 없었다. 마마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난비 마마께서 남 부인께 말씀 좀 드려 주십시오. 처음 가져온 혼례복을 가위로 자르시더니 이번 건 흠뻑 적셨습니다. 다행히 수건으로 깨끗이 닦으면 입을 순 있겠으나 부인께서 영 말씀을 듣지 않으십니다. 폐하께서 재촉하시는데…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난비가 말했다.
“신부라면 누구나 긴장하기 마련이지. 자네들은 나가 있게. 본궁이 부인을 잘 타일러 볼 테니.”
마마는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처럼 중요한 때에 남 부인을 주시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난비는 그녀의 마음을 읽고 코웃음을 쳤다.
“하, 왜? 마마는 본궁이 부인을 괴롭힐까 걱정이라도 되는 것인가? 오늘이 지나면 부인은 황후 마마가 되시는 몸 아닌가? 바짝 붙어도 모자랄 판에 본궁이 어찌 감히 방자하게 굴겠는가? 걱정 붙들어 매게. 본궁은 경험자라 어찌 타일러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어서 다들 나가게.”
난비는 주위에 있는 시종들을 바깥으로 내쫓았다. 그녀는 앞서 황제의 총애를 받던 여인이기에 마마도 감히 미움을 살 수 없었다. 어차피 시위들이 처소 주변을 지키고 있었기에 큰일이 날 것 같진 않았다.
모두가 나가자 난비가 문을 닫고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매에서 작은 보따리를 꺼내 백천범에게 던졌다.
“어서 갈아입으세요. 태자 전하가 밖에서 기다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