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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67)화 (967/1,192)

제967화

황후를 책립한다는 조서가 발표되자 엄청난 파동이 일어났다. 후궁의 궁비들은 제각기 속상해하거나 실의에 빠졌지만 대부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체 후궁에서 황후 책립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근비와 난비.

근비의 아들인 육황자는 일찍이 출궁해 저택을 하사받았음에도 왕에 봉해지지 않았다. 황제의 마음은 대충 추측이 가능했고 근비 또한 줄곧 후궁의 일을 관장해 왔다. 만약 황후를 책립해야 한다면 근비야말로 가장 적절한 후보였다.

그런데 도중에 난비가 입궁했다. 난비는 궁에 들어오자마자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난비가 들어온 후, 황제는 다른 궁비를 만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늘 붙어 다니며 금실 좋은 부부처럼 지냈기에 모든 궁비들이 이를 갈며 질투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많은 이들은 황제가 난비를 황후로 세울 거라 추측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결국 황후로 책립되는 주인공은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남 부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황후가 없기 때문에 후궁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은 근비였다. 게다가 후궁까지 관리하고 있으니 난비를 제외한 모든 궁비들은 근비에게 문안 인사를 하러 왔다. 궁비들은 근비 마마가 자리에 없자 남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 온 분이시랍니까? 남 부인이라니…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듣긴 했지요. 그분이 오고 난 뒤 난비께서 총애를 잃으신 건 사실이니까요.”

“분명 젊고 예쁘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폐하께서 어찌 그리 홀리셨겠습니까?”

“그런데 부인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그리 어리진 않을 것 같은데요?”

“어느 궁에서 지내고 있답니까? 조금 이따 찾아가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는 게 어떨까요?”

“당연히 가야지요. 황후 마마이신데 말이에요.”

다들 신나게 떠드느라 근비가 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근비는 문 앞에 서서 궁비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비밀에 싸인 남 부인이란 자가 궁금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난비가 하는 말을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없었다. 그때 한 궁비가 비밀스러운 말을 하듯 수군거렸다.

“듣자니 남 부인께서 본래 동궁에 계셨답니다. 한데 폐하께서 빼앗아 가신 거래요.”

다들 별안간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요? 남 부인이 원래는 태자의 사람이었대요?”

근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그날 불탑에서 보았던 어린 사내를 떠올렸다. 하얀 피부는 문약해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누구보다 빛났다. 초상화 속 여인이 절로 생각날 얼굴이었다. 난비가 자신보다 더 닮은 사람이라고 하더니. 만약 정말 그 사람이라면……. 그녀가 천천히 기둥에 기댔다. 황제가 황후에 책립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 *

조서가 내려진 그날, 태자는 조정에 없었다. 황후 책립에 관한 소식을 접한 그는 완전히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가장 걱정하던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황제가 그의 친누이를 황후로 삼다니. 소문이라도 나면 몽달 황실의 체면이 어찌 되겠는가? 그는 혼이 나간 얼굴로 의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자비는 그의 모습이 적잖이 의심스러웠다.

“전하, 궁 안에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남 부인이 예전 우리 궁에 있던 전 선생이라고…….”

태자는 화가 나서 정신이 사나웠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오. 부황께서 그 여인을 황후로 세우시겠다고 결정하셨는데. 본궁은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태자비는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전하께서 일찍이 남 부인을 궁에 들이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닙니까.”

태자는 그녀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해명하고 싶지도, 해명할 방법도 없었다. 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녀를 어서 찾아와야…….”

태자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전하, 설마 그분을 빼앗아 올 생각이십니까?”

그때, 시녀가 들어와 고했다.

“전하, 난비 마마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태자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어서 모시어라.”

난비는 분명 좋은 소식을 가져왔을 것이다. 태자비는 기가 막혔다. 설마 난비와 결탁하려는 것이란 말인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온 난비는 태자비를 발견하고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인사를 먼저 건넸다. 태자는 다른 핑계를 대고서 태자비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녀를 찾은 것입니까?”

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제 시녀가 폐하의 궁 서남쪽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답니다. 북소리는 아니었는데 장단은 북소리와 같았다고 하더군요. 본궁도 남 부인이 북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어 오늘 일부러 찾아가 보았습니다. 한데 어찌 되었게요?”

“어찌 되었단 말입니까?”

“남 부인을 보진 못했지만, 그 처소 주변을 시위들이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이리 대대적으로 지킨다는 건 남 부인이 분명 그 안에 있다는 뜻이지요.”

태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디 있는지 찾기만 해도 일이 훨씬 수월했다. 난비는 그를 바라보며 떠보듯 물었다.

“폐하께서 이미 황후로 책립한다는 조서를 내리셨는데… 그런 분을 전하께서 빼앗아 올 수 있겠습니까?”

태자가 두 눈을 드리운 채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신하들이 전부 반대하고 있습니다. 본궁이 빨리 빼돌리기만 하면 되돌릴 여지는 있습니다.”

난비도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전하께서 본궁을 필요로 하신다면, 본궁은 언제든지 전하를 도울 것입니다.”

궁전 깊은 곳, 기둥 뒤에 숨어 있던 태자비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 * *

황제는 특별히 아무도 묵지 않는 서남쪽 모퉁이에 백천범의 처소를 마련했다. 너무 외딴곳이라 평소 그곳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무 말썽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오래 머무른다고 해도 발각되지 않을 곳이었다. 하지만, 백천범이 숨긴다고 숨겨지는 사람이던가. 한밤중엔 북을 치고 대낮엔 나무를 타는 여인은 요란해도 너무 요란스러웠다.

황제는 우선 모든 준비를 제대로 마친 뒤에 백천범을 풀어 주고 황후로 책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백천범은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여인이 아니었기에, 그는 아예 끝장을 볼 생각으로 황후 책립에 대한 조서를 먼저 발표했다. 신하들의 거센 반발은 무시한 채 그 사람의 반응만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든 그는 백천범을 이겨 내지 못했다. 북소리 때문에 밤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어 낮잠이라도 자려고 하면 어김없이 밖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왔다. 조상님보다 더 무서운 여인이 북을 치는 소리였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그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백천범은 틈만 나면 북을 쳤다. 묵용감이 그녀에게 소식을 전할 수 없으니 그녀가 일방적으로 전달할 수밖에. 묵용감에게 소식이 전해졌는지도 알 수 없어서 그저 반복적으로 북을 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더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백천범을 찾아갔다. 그녀에게서 볼품없는 북을 빼앗아 올 작정이었다.

성이 난 채로 들어섰지만 백천범을 보는 순간 모든 노여움이 사라졌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농화야, 어찌 좀 쉬지 않고.”

백천범은 북 위에 엎드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어르신은 지금 낮잠 주무실 시간 아니에요? 어찌 나오셨어요?”

“…….”

그걸 물어볼 낯짝이 있단 말인가…….

“농화야, 한밤중과 오후에는 북을 치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

백천범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제 북소리 때문에 제대로 못 주무셨군요. 그럼 제가 나가야겠네요.”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북을 안은 채 밖으로 향했다. 황제가 서둘러 두 팔을 뻗으며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간단 말이냐. 황후를 책립한다는 조서를 내렸으니 넌 이제 짐의 황후다!”

백천범은 조서에 대한 일은 알지 못했기에 화들짝 놀랐다.

“어르신,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세요?”

“짐은 네게 진심이다. 지금껏 농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

황제가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농화야, 지금껏 짐의 이 깊은 마음을 느끼지 못하였단 말이냐?”

백천범은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나중에 제가 미리 말씀 안 드렸다고 뭐라 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

“너로 인한 고생이라면 짐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웩!”

백천범은 역겹다는 듯 그와 거리를 벌렸다.

“이렇게 나이 많은 사람도 뻔뻔할 수 있군요. 얼른 가요. 내 눈앞에 얼쩡거리지 마세요.”

황제는 부처가 아니었기에 계속 조롱을 당하자 화가 치솟았다. 그는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했다.

“조서는 이미 내려졌으니 짐은 곧장 대혼을 치를 것이다. 넌 신부가 되는 날까지 얌전히 기다리거라!”

말을 마친 그는 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를 떴다. 백천범은 찻잔을 힘껏 내리쳤다. 황제의 발 언저리에서 찻잔은 산산조각 났다. 깜짝 놀란 그는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황급히 도망쳤다.

성격 좋은 백천범이 성질을 부리는 건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몽달 황제가 한 짓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조서를 내리면 모든 이들이 알게 될 테니, 분명 묵용감도 알고 있을 터.

다른 건 그렇다고 쳐도, 묵용감이 화를 참지 못해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두려웠다. 누구든 자신의 부군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개자식.”

그녀는 이내 지붕 위로 올라가 북을 치기 시작했다. 몽달 황제가 그녀를 숨기려 할수록 그녀는 제 존재를 알려야 했다. 묵용감이 못 들으면 궁 안에 있는 이들에게 그녀의 존재를 알려야 했다. 그녀를 찾아와 성가시게 해도 상관없었다. 우선은 그녀가 있는 위치를 어떻게든 노출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황제는 성을 내며 밖으로 나갔다. 찬바람을 맞은 그는 겨우 냉정을 되찾았다. 자신이 화를 참지 못해 목소리를 높였다는 걸 깨달았다. 어쨌든 이미 조서를 발표했으니 일을 길게 끌면 문제가 생기는 법. 서둘러 제때 혼례를 치러야 했다.

결정을 내린 그는 자리를 뜨려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또다시 성가신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차마 다시 돌아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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