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6화
그의 마음이 격하게 동요했다. 다만 지금껏 황제의 말을 거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가 당장 황제에게 맞서려니 조금은 위축되었다.
“황 형이 보기에 내게 승산이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은가?”
묵용감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팔 할은 됩니다.”
곤청락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서 내게 말 좀 해 보시게. 어찌 팔 할이나 된단 말인가?”
“전하의 저택엔 문객이 삼천이나 되지요. 문객들은 생각이 빨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병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전하께선 상림군을 쥐고 계시지요. 정예병은 아니지만, 수적으로는 태자의 기영을 크게 뛰어넘습니다. 전하께선 문무를 모두 손에 쥐고 계신 겁니다. 이것으로도 이미 태자 전하와 막상막하인 셈이지요.
이는 대외적인 상황이고, 대내적으로는 근비 마마께서 후궁을 수년간 맡고 계십니다. 조정 신하들에게 황후로 가장 적당한 분을 고르라면 단연 근비 마마를 고를 것입니다.
또한 전하께서는 총명하시고 용감하십니다. 매년 양 잡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셨을 정도로 황자들 중 가장 뛰어나시지요. 지금 전하께선 가장 유리한 시기와 배경, 민심을 모두 가지신 셈입니다. 승산이 팔 할이라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지요.”
곤청락은 그의 말에 점점 더 확신이 생겼다.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태자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황제 또한 그에게 기대를 품고 있지 않은가? 다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황제의 태도는 좀 애매모호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다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사적으로만 쑥덕댈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모처럼 깨어 있는 자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득의양양해졌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구름 위를 걷는 듯, 당장이라도 천지를 뒤집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황 형, 하면 내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 조정 신하들은 대부분 태자 편에 서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이때 반기를 들고 나서시면 신하들은 자연스럽게 전하를 다시 볼 것입니다.”
지금은 묵용감이 어떤 말을 하든 곤청락은 전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찌 묵용감에게 탁자를 쪼갤 만한 신력이 생겼는지, 그가 몽달의 조정에 대해 왜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었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심지어 인내심이 바닥난 묵용감의 표정도 읽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자신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는 것… 그래서 그가 이 기회를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여전히 걱정거리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이 일은 부황의 체면과 관련된 일이니 당장 조정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좋지 않을 듯하네. 차라리 영향력 있는 신하 몇 명을 거느리고…….”
“안 됩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전하와 신하 몇 명으로는 일국의 군주와 맞설 수 없습니다. 이 일은 더 크게 벌일수록 승산이 있습니다. 황제께선 이제 연로하셨으니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전하야말로 최고의 전성기이자 몽달의 굳건한 기둥이십니다. 저는 전하의 투지로 전하와 전하의 모비께서 마침내 영예를 얻으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곤청락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사람이 많으면 힘도 커지는 법. 아무리 황제라 해도 한 여인 때문에 조정을 적으로 삼진 않을 것이다. 그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날 일깨워 주어 참으로 고맙네. 어찌해야 할지 이제 나도 잘 알겠네.”
묵용감이 말했다.
“당장은 경거망동하시면 안 되고 좋은 기회를 찾으셔야 합니다. 또한…….”
곤청락이 물었다.
“또 다른 걱정이 더 있는 것인가?”
“전하의 안위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태자께서 마수를 뻗치기 전에 말입니다.”
“역시 황 형은 생각이 치밀하군. 태자에게 본 전하도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지난번 백도탑에서의 일도 아직 갚지 못했거늘.”
“상림군에는 실력이 뛰어난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혼재하니 어떻게든 기영에 맞설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절 믿으신다면 저택의 삼천 문객을 제게 맡기십시오.
문객은 무력을 쓰진 못해도 말재주가 뛰어나 누가 앞에서 이끌어만 준다면 전하의 가장 강력한 선봉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별다른 재주는 없지만, 그래도 전하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싶습니다.”
곤청락은 크게 기뻐했다. 육황자는 일찍부터 묵용감이 비범한 자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런 그의 말에 당장 두 손을 맞잡아 가슴 위로 들어 올렸다.
“황 형이 그리 의를 중시하다니! 참으로 감동이네. 이 일만 끝나면 황 형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네. 하면 삼천 문객은 황 형에게 보내겠네.”
“전하의 신임을 받다니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다만 문객이 너무 많으니 그들에게 보여 줄 증표 하나를 제게 하사해 주십시오. 그 증표가 있어야 문객들도 제게 복종할 것입니다.”
곤청락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곧장 허리춤에서 황자의 신분을 알리는 옥패를 끊어 그에게 건넸다.
“이 옥패는 황자가 출궁 후 저택을 받을 때 부황께서 직접 하사한 것일세. 잘 가지고 있다가 이 일만 끝나면 다시 돌려 주게.”
“전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일만 끝마치면 바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은 공수하며 말했다.
“시간이 급박하니 더는 전하를 붙잡지 않겠습니다.”
곤청락은 가슴에 불덩이가 타올라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황급히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묵용감의 얼굴은 곧장 싸늘한 얼음장처럼 식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방 안의 모든 것들을 깨부쉈다. 근래에 그는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없었다. 개자식! 감히 그의 부인을 넘보다니. 가죽을 벗긴다 한들 그 한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지금 당장 몽달을 발칵 뒤집기로 했다. 몽달 황제, 그 개자식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
도원곡 주인의 거래에 응하긴 했지만 그 늙은 여우가 무얼 그리 꺼리기에 잠자코 기다리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아는 것만 해도 패륜이 곳곳에 도원곡 사람들이 잠입해 있었다. 그 세력이라면 분명 황제를 끌어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한데, 무엇 하러 자신까지 끌어들였을까? 그는 도원곡 주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와장창 소리가 한바탕 이어지고 난 뒤, 방 안의 물건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문밖에 서 있던 몇몇 시위들은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절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요즘 들어 화를 낸 적 없는 황제가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분명 황후 마마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곤청락이 대체 무슨 소식을 전했길래 황제가 저리 노여워하는 것이란 말인가?
방 안이 완전히 조용해진 뒤에도 시위들은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때, 안에서 묵용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십구는 안으로 들거라.”
영십구는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바닥의 파편을 피해 그의 앞에 다가왔다.
“노야, 분부하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조천명의 사람이 떠난 지 며칠 되었으니, 어디쯤 도달했는지 가서 알아보거라. 또 그들에게 행군 속도를 높이라고 전하거라.”
영십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겠다고 답한 뒤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나머지 시위들이 그를 둘러싸고 조용히 물었다.
“노야께서 뭐라고 하시더냐?”
영십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 장군의 사람이 어디쯤 도달했는지 물어보십니다. 행군을 재촉하라고요.”
말을 마친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나머지 시위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한참 뒤, 영십삼이 말했다.
“노야께서 한바탕 크게 하실 모양이니 미리 준비해야겠습니다.”
* * *
도원곡 주인은 묵용감이 전한 서신을 받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 또한 몽달 황제가 백천범을 황후로 세우려 한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터라 묵용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방 관리에게 서신을 건넸다.
“자네는 어찌 보는가?”
방 관리가 서둘러 서신을 읽었다.
“황후를 세워선 안 될 일이지요. 적당한 방법을 강구하여 일을 망쳐야 합니다. 하지만 묵용감이 세운 계획은 우리의 생각과 너무 다릅니다. 좋지 않습니다.”
도원곡 주인은 다리의 담요를 치우고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의 스산한 겨울 풍경을 보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지 않다고 한들, 또 어찌하겠느냐? 이 서신을 보낸 것은 그저 통보일 뿐, 우리와 상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방 관리는 멍한 얼굴로 다시 한번 서신을 유심히 읽었다. 간단명료한 몇 마디 글귀는 역시 상의가 아니라 통보였다.
“주인, 그럼 우리는… 빠지는 겁니까?”
도원곡 주인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빠지려 해도 묵용감은 분명 우리를 끌어들일 것이다. 어쩌면 묵용감이 벌써 이 노부의 신분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르지.”
“주인께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다면… 그때의 일도 더는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도원곡 주인은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만약 묵용감의 계획대로라면 그때의 일을 숨길 수 없게 된다. 몽달 황제의 수치를 만백성이 알게 되는데, 그가 발붙일 근간이 더 남아 있겠는가? 방 관리가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주인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퇴위를 강요당하면 그놈은 분명 노발대발할 겁니다. 궁 안에는 우리 편이 많으니 그때…….”
도원곡 주인의 눈빛이 번득였다.
“네 말은, 기회를 엿봐서 쥐도 새도 모르게…….”
“그놈도 분명 예상치 못할 겁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 줘야지요.”
도원곡 주인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다시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았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이 방법밖엔 없겠군. 이렇게 오랜 시간 계획한 끝에 마침내 진가를 볼 때가 되었구나. 가서 잘 안배하거라. 곤청리와 묵용감 부부 중, 그 누구도 도망칠 생각을 해선 안 될 것이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주인. 소인이 잘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놈도, 묵용감 부부도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입니다.”
도원곡 주인은 손을 들어 차가운 가면을 쓸어내렸다. 서늘한 두 눈망울은 마치 불길이 타오르는 듯 이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