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5화
도원곡 주인은 잠시 눈을 번득였지만, 금세 담담한 눈빛을 되찾았다.
“그저 일이 공교롭게 겹친 것뿐이지요.”
“그저 우연이었다면 왜 임무를 중단했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소?”
“그건 당신과 관련 없는 일입니다.”
“난 임무를 수행하는 자인데, 응당 설명해 주어야 하지 않겠소?”
도원곡 주인은 그의 압박에 조금 성이 났다. 그날 일은 자신도 납득이 되지 않는데,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그저 본능적인 반응이었다고 말하란 말인가? 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노부의 계획이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묵용감은 그와 사이가 틀어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더는 캐묻지 않았다.
“하면 나와 새로운 계획을 협력하자는 거요?”
“맞습니다.”
“내가 무얼 하면 되오?”
“수하에 거느리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까?”
“성 밖 교외에 백 명 정도 있소.”
“성안에는 없습니까?”
“없소. 사람이 많고 목적이 거창해지면 쉽게 주의를 끌 수 있으니.”
“지난번 그 군마들은 당신이 강탈한 것이지요?”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눈은 절대 못 속이는군.”
“말은 어디 있습니까?”
“보냈소.”
도원곡 주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어디로 보냈단 말입니까?”
“군마는 군대에서 쓰는 말이니, 백성白城으로 보냈소이다.”
“하면 곁의 시위들을 제외하고 고작 백 명 정도가 다란 말입니까?”
“나와 부인이 평복 차림으로 다닐 땐 백 명으로도 이미 충분하오. 만약 변고가 생기지 않았다면 내가 당신을 찾아올 이유도 없었을 것이오.”
도원곡 주인이 바퀴를 밀며 앞으로 나아가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노부가 당신의 부인과 다시 만나게 해 드리지요. 대신 당신이 곤청리에게 중상을 입혀 주어야겠습니다.”
* * *
백천범은 몽달 황제가 그녀를 황후로 세우려고 한다는 건 전하지 않았다. 묵용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질투심이 강한 그인데, 몽달 황제의 추악한 마음을 알게 된다면 분명 황제를 죽이러 황궁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조정 회의에서 오특민은 황후 책립 조서를 읽었다. 놀란 신하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황제가 제정신이란 말인가? 어디서 정체 모를 여인을 데려와서는 황후로 세우겠다니!
황후 책립이 그리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자그마치 일국의 국모를 세우는 일이었다. 경악을 금치 못해 넋을 놓은 신하들은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황제의 조서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조정을 가득 메웠다.
신하들의 반대는 이미 예상했기에 몽달 황제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마치 이 일과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소란스럽게 목청을 높이는 신하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단폐에 선 오특민은 곁눈으로 황제를 힐끔 바라보며 생각했다.
‘폐하께선 참으로 침착하시구나.’
신하들이 뭐라 반대하든 몽달 황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는 그의 집념이자 남은 생에 반드시 이루고 싶은 숙원이었다. 다만 신하들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통에 머리가 다 울릴 지경이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오특민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의도를 알아차린 오 총관은 목청을 높여 퇴조를 알렸다. 비록 거센 반대의 물결에 그의 목소리가 잠기고 말았지만, 결국 절차는 모두 끝마친 셈이었다. 몽달 황제는 신하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신하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하거나 격앙된 어조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또 어떤 이들은 노파심에 거듭 충언을 쏟아 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황제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 * *
묵용감은 도원곡 주인의 거처에서 돌아온 뒤로 줄곧 한 가지 문제에 골몰했다. 백천범으로 도원곡 주인을 떠보았지만 도원곡 주인은 이 화제에 대해 언급을 꺼리는 눈치였다. 만약 도원곡 주인이 여제와 연이 닿았다면, 여제를 닮은 여인을 보고도 왜 캐묻지 않는 것이란 말인가? 묻기는커녕 오히려 회피하다니, 백천범과 여제의 관계를 알고 싶지 않은 것인가?
한 번 실수를 했으니 그는 장인어른을 찾는 일에 더욱 신중해져야 했다. 황가의 경우 가족에 대한 정이 애당초 깊지 않았다. 어쩌면 백천범의 생부는 그녀를 자신의 딸로 인정하기 싫은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제는……. 남원의 여제를 생각하자 그의 수심이 더 깊어졌다.
여제란 작자는 억세고 흉포한 여인이었다. 이 세상에 그녀를 억누를 수 있는 남자는 많지 않을 터. 만약 도원곡 주인이 여제에게 된통 당했다면,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도 싫어할 터.
그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녀의 친부를 찾는 건 생각만큼 순탄할 것 같지 않았다. 한참 근심에 잠겨 있는데 영십구가 안으로 들어와 고했다.
“노야, 육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묵용감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벗이 된 후로 곤청락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를 찾아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을 나서자 곤청락이 술 두 병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저 멀리서 그가 묵용감을 향해 소리쳤다.
“자, 자, 오늘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 보세.”
묵용감이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술이라니요. 혹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술기운을 빌려 근심을 없애시려고요?”
곤청락이 그의 앞으로 걸어와 탄식을 내뱉었다.
“황 형은 정말 대단하다니까. 그걸 한눈에 알아보다니. 본 전하가 오늘은 영 기분이 좋지 않아 술김에 좀 쉬고 싶네.”
묵용감이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육 전하, 안으로 드시지요.”
그는 영십구에게 술안주를 구해 오라고 분부했다. 묵용감은 방 안으로 들어가 곤청락에게 물었다.
“육 전하께선 무슨 일로 기분이 좋지 않으신지요. 제가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 도울 테니 말씀해 주시지요.”
곤청락은 탁자에 술을 내려놓으며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무기력하게 보이기도 했다. 마치 누군가 조상의 묘를 파헤쳤는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묵용감은 그런 그의 모습이 조금 우스워서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말씀해 보시지요.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전 선생 기억하는가? 목장에서도 한 번 만나고 함께 동래순에서 밥을 먹지 않았는가.”
묵용감은 곧장 경각심을 세우곤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요. 태자께서 전 선생을 빼앗아 가지 않으셨습니까.”
“맞네.”
곤청락이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혹 그때 알아보았는가? 전 선생이 여자였네!”
묵용감이 깜짝 놀란 척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전 선생이 여자였다고요?”
“여자인 건 그렇다 쳐도.”
곤청락이 이마를 쓸어내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태자가 전 선생을 부황께 바쳤다네. 지금은 부황의 총비가 되었어. 오늘 조정에서 부황이 전 선생을 황후로 책립한다고 선언하셨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황단목으로 만들어진 원탁이 쩍 갈라지며 그대로 무너졌다. 탁자 위에 있던 술병도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방 안은 곧장 짙은 술 내음으로 가득 찼다. 곤청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 형, 이게 어찌…….”
묵용감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전하 말씀을 들으니 제가 다 화가 나는군요.”
“황 형이 들어도 화가 나지 않나?”
곤청락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묵용감의 거친 반응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이건 누가 들어도 화가 날 만한 일이었다! 곤청락이 말했다.
“전 선생은 원래 내 사람이었네! 그런 사람을 빼앗아 가서는 자신 것인 것처럼 굴더니. 태자 그놈은 겉만 뻔지르르하다네. 말로만 인의예신이라고 떠들고는 돌아서면 간사하게 알랑거린다니까. 조정 신하들은 태자의 품행을 칭찬하지만 다 헛소리라지!”
영십일과 영십구는 굉음이 나자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튼튼한 나무 탁자가 쪼개진 모습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한데 묵용감은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곤청락과 대화 중이었다.
하지만 두 시위는 묵용감이 폭발 직전의 화산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때가 되면 그는 화염을 내뿜고 천지를 초토화할 것이다. 곤청락은 여전히 수다스럽게 제 할 말만 떠들어 댔다.
“부황께선 단 한 번도 난비를 황후로 세울 생각이 없으셨네. 우리 모비도 그걸 그나마 위안으로 삼으셨지. 난비에겐 아들이 없으니 기반이 그리 견고하지 못하네. 황후는 우리 모비의 자리인데… 남 부인이라니! 정말 상상도 못했네.
아, 듣자니 전 선생이 성이 남씨라더군. 남 부인이 오자마자 부황께서 저리 마음을 정하신 걸 보면 적잖이 마음에 드신 게 틀림없네. 태자가 바친 사람이 황후가 되면 앞으로 부황께선 태자를 더 신임하실 텐데. 남 부인이 부황 앞에서 태자 칭찬을 몇 마디만 해도 나와 모비의 앞날은 아주 힘들어질…….”
묵용감이 별안간 그의 말을 끊었다.
“한데 전하께선 어찌 기다리고만 계십니까?”
“뭐라?”
곤청락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당연히 남 부인이 황후가 되지 못하게 막으란 말씀이지요. 황후 자리에 오르셔야 할 분은 전하의 모비이십니다.”
“하지만 부황께서 이미 조서를 쓰시지 않았는가. 대신들이 전부 다 반대했지만, 부황께서 고집을 꺾지 않으시어…….”
“조서를 없애면 되지요. 신하들이 힘을 모아 압박을 가해야 할 때입니다. 전하의 모비께서 황후가 되시면 전하께서는 황적자가 되는 것이니 당연히 황태자의 자리도 전하의 것이지요.”
곤청락은 세상을 발칵 뒤집을 만한 묵용감의 말에 화들짝 놀라 넋을 놓았다. 한참 뒤, 그가 확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게… 반란을 일으키란 말인가?”
묵용감이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반란이 아니라 부황께서 잘못된 길로 가시니 바로잡아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분은 전하뿐입니다. 폐하께선 줄곧 전하를 왕으로 봉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전하께 천하를 넘기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는 있단 뜻이겠지요.
태자는 오랜 시간 국무에 관여하며 조야에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적당한 기회가 없다면 부황께서 언제 태자를 폐위하고 새로 태자를 책립하시겠습니까?”
곤청락은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이 옳았다. 조정 신하들이든 천하의 백성들이든 그가 왕에 봉해지지 않은 이유를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 그에겐 오직 최후의 기회만 남은 셈이었다. 그의 모비를 황후로 올리면 그는 자연스럽게 황태자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