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64)화 (964/1,192)

제964화

그들이 움직일수록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영십오와 영십육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저 소리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으나 주변에 누군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더구나 한 사람이 아니라 매우 많은 이들이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칼끝에 묻은 피를 핥는 이들은 동류의 숨결에 익숙했고 닥쳐올 위험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법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소리만 유심히 들었다.

잠시 뒤, 십오와 십육이 동시에 눈을 번득였다. 이 소린 백천범의 고어였다. 제대로 된 북을 치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장단은 유사했다. 그간 궁 내외에서 소식을 전한 것만 벌써 여러 차례였기에 백천범의 고어에도 제법 익숙했다. 의미까지 파악하긴 어려워도 종이와 붓을 이용해 북 가락의 장단 정도는 적을 수 있었다.

십오와 십육은 몇 번에 걸쳐 똑같은 장단이 반복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들은 곧장 어둠 속을 질주하여 묵용감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묵용감은 근심에 잠겨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움직임에 그가 곧장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영십일이 대답했다.

“노야, 십오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묵용감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곧장 침대에서 내려왔다. 영십일이 불을 켜자 영십오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췄다. 그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묵용감에게 전했다.

“노야, 이것 좀 봐 주십시오.”

묵용감은 등불 아래에서 종이를 펼쳤다. 영십오는 총 세 개의 장단을 적어 왔다. 첫 번째는 의미가 불완전했고 두 번째는 틀린 부분이 있었다. 묵용감은 세 번째 기록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눈으로 내용을 읽으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천천히 풀었다. 한참 뒤, 그가 종이를 내려놓고 긴 숨을 내쉬었다.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더 이상 소식이 들려오지 않으면 내가 쳐들어갈 것이다.”

사실 영십오는 이게 백천범이 전한 소식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북소리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노야, 실은 북소리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둔탁하고 기이한 게 북소리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묵용감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하면 맞게 들은 것이다. 부인이 직접 북을 만들었다더구나. 소리를 낼 수 있는 것만 해도 훌륭한 셈이지.”

그의 말에 영십오가 품었던 의혹은 전부 녹아내렸다. 어쩐지… 소리가 이상하더라니. 알고 보니 부인이 직접 북을 만든 것이었다. 마침내 백천범의 소식을 접하자 다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영십일이 물었다.

“부인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영십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부인과 노야의 다정한 대화를 뭐 하러 물으십니까?”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묵용감도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켠 뒤,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주 옅은 미소였다. 백천범이 전한 소식 때문이었다. 몽달 황제는 그녀의 생부가 아니며 그녀를 연금했다는 소식이었다. 몽달 황제는 그녀 앞에서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고 했다. 그녀를 무서워하는 것 같으니 당장은 안전하다는 내용도 함께였다.

생부가 아닌데 연금을 했다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 백천범의 신분을 알고 그녀를 이용해 자신이나 도원곡 주인을 견제하려는 것이거나…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거나. 만약 전자라면 그나마 괜찮았다. 적을 유인하기 전까지 미끼는 안전한 법이니까.

다만 후자라면… 그의 손에 있던 찻잔이 와그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도자기 가루가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어 몇 줄기 혈흔을 남겼다. 시위들은 놀란 얼굴로 그를 불렀다.

“노야.”

묵용감은 정신을 차리고 손에 있던 도자기 가루를 털었다.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

만약 몽달 황제가 자신의 부인을 넘보는 거라면 그의 말로는 이 찻잔보다 더 참혹하리.

그의 추측이 맞는다면 몽달 황제는 현재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그의 행방을 찾았을 터. 그러니 백천범이 만약 미끼라면 그 상대는 도원곡 주인이었다.

그는 날이 밝는 대로 도원곡 주인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두 노인네가 서로 싸우는데 자신의 부인을 무엇 하러 끌어들인단 말인가? 아버지를 찾는 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이다. 그는 서둘러 제 부인을 데려와야 했다.

* * *

이튿날은 날이 흐렸고 거리는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누군가 움막 아래에서 뜨거운 내장탕에 찐빵을 먹으며 거리의 행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움막 뒤로 나무에 묶인 낙타 한 마리가 하늘을 바라보며 이따금 콧김을 불었다.

어슴푸레한 불빛 사이로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걸어왔다. 그자는 바람을 막는 풍루風褸를 걸치고 있었는데, 흰색 모자 끝으로 얼굴을 가린 탓에 코와 강인한 턱만 보일 뿐이었다. 그의 모든 동작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기세가 왠지 모르게 공포심을 자아냈다.

얼마 뒤, 그의 곁을 따르던 수행원이 칼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눈에서 전해지는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그를 보던 자들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황급히 길을 재촉하던 이들은 묵용감과 영십일, 영십구였다. 백천범이 연금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 밤을 지새운 묵용감은 두 시위와 함께 길을 나섰다. 도원곡 주인을 찾아가려는 것이다.

도원곡 주인은 여전히 단잠에 빠져 있었다. 방 관리도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그는 황급히 옷만 걸치고 그들을 맞이했다.

“황 노야, 이리 일찍 찾아오시다니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묵용감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곳 주인을 만나러 왔네.”

“저희 주인께서는 아직 기침 전이십니다. 소인에게 말씀해 주시면 대신 전해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이 대꾸하기 전에 영십구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우리 노야께서 이곳 주인과 중요하게 논할 일이 있다고 전해 주시오.”

방 관리가 슬쩍 하늘을 바라본 뒤 대꾸했다.

“주인께서는 한 시진 뒤에 일어나십니다. 조금 기다리시겠습니까?”

영십구가 성을 내며 따져 물으려는데, 묵용감이 그를 막아섰다.

“괜찮다. 내가 기다리마.”

방 관리는 공수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영십구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노야, 저들은 분명 일부러 저러는 것입니다. 도원곡 주인이 뭔데 노야를 기다리게 합니까?”

묵용감은 옷자락을 가르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뜨거운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입을 뗐다.

“그래도 뜨거운 차는 내어 주었으니 그리 소홀한 대접은 아니다.”

영십일이 영십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침 일찍 찾아온 걸 보고 저자들도 우리가 마음이 급하단 걸 눈치챘겠지. 그래서 고의로 푸대접을 하는 것이다. 우리 노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자신들이 더 쉽게 이용하려고.”

“…쳇! 꿈 깨라지. 우리 노야께선 그리 쉽게 마음이 흔들리는 분이 아니시거든.”

묵용감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

“내가 마음이 심란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새벽 댓바람부터 찾아왔겠느냐?”

설령 장님이라도 그가 얼마나 초조한지 눈치챌 것이다. 백천범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언제나 초조했다. 도원곡 주인이 늙은 여우란 사실도 잊을 만큼 초조했다.

한편 도원곡 주인은 이미 일어나 아침밥을 먹는 중이었다. 방 관리가 안으로 들어오자 그가 방 관리에게 물었다.

“묵용감이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더냐?”

방 관리가 답했다.

“제법 참을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도원곡 주인이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일찍 찾아온 걸 보면 이미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아마 지금은 우리의 의도를 알아채고 담담한 척 구는 것일 테지.”

그가 손에 든 뜨거운 찻잔을 내려놓고 탄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정이 너무 깊으면 약점이 생기기 마련이지. 이 점을 명심하거라.”

방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 꼭 기억하겠습니다.”

도원곡 주인이 그를 바라보았다.

“밥은 먹었느냐?”

방 관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도원곡 주인이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이리 와 앉거라.”

방 관리는 주인의 뜻밖의 말에 머뭇거렸다.

“소인은 그냥…….”

“내가 앉으라고 하면, 넌 그저 앉으면 되는 것이다.”

도원곡 주인이 직접 뜨거운 우유차를 따라 주었다.

“시간이 정말 빠르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이리 오랜 세월이 흐르다니. 예전에 나와 함께 식사를 했을 때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 그쯤이었지?”

방 관리는 결국 자리에 앉았다. 그간 늘 평온하기만 했던 그의 눈망울에 물빛이 번득였다. 그가 목청을 가다듬고 대꾸했다.

“여섯 살이었습니다.”

도원곡 주인은 방 관리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그걸 아직 기억하는구나.”

방 관리가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소인은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합니다.”

“요즈음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네게 맡겼지. 수고 많았다.”

“주인의 근심을 나누는 것이 소인의 직책인걸요. 소인은 오히려 영광입니다.”

도원곡 주인은 입꼬리가 꿈틀거렸지만 탄식만 나올 뿐 말을 잇지 않았다. 방 관리의 시선이 앞에 놓인 고기 찐빵에 꽂혔다. 찐빵에 거의 구멍이 날 기세였다.

한 시진 후, 방 관리가 도원곡 주인이 앉아 있는 의자를 밀고 손님 방으로 들어갔다. 도원곡 주인은 묵용감을 보자마자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미안합니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묵용감이 살짝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괜찮소. 내가 일찍 온 것이오.”

도원곡 주인이 손을 휘젓자 방 관리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묵용감도 시위들에게 눈빛을 주자 영십일과 영십구가 밖으로 나갔다.

“이제 방에 다른 이는 없으니 말해 보십시오. 이 노부를 무슨 일로 찾았습니까?”

“지난번 내게 제안했던 거래가 무슨 거래인지 알고 싶소.”

도원곡 주인은 다리 위에 놓인 담요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참으로 궁금하군요. 지난번엔 이 노부의 말에 관심도 주지 않더니 이번엔 어찌…….”

“혹 지난번 백도탑에서 몽달 황제 옆에 서 있던 여인 기억하시오?”

도원곡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요.”

“그자가 제 부인이오.”

도원곡 주인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분이 동월 황후셨군요. 귀부인께서 어찌 곤청리와 함께 있는 겁니까?”

“그게 참 기이하오.”

묵용감이 도원곡 주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곤청리가 내 아내를 데려간 게 나 때문이오? 아님… 주인 때문이오?”

도원곡 주인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웃었다.

“어찌 이 노부 때문이겠습니까. 귀부인과 전 일면식도 없는 것을요.”

“그런데 우리 부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주인은 임무를 중단하지 않았소? 안 그러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