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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63)화 (963/1,192)

제963화

백천범의 처소를 떠나던 몽달 황제는 한숨을 내뱉었다. 여인이 아니라 조상을 모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를 좋아하는 자신을 탓해야지. 그녀는 젊은 시절 그의 꿈이자 추억 속의 소중한 장미였다. 비록 가시가 돋아 있긴 해도 그에게 늘 기쁨을 주었다. 그게 바로 그녀의 첫 모습이었다…….

백천범이 그의 뜰에만 머물러 준다면 그 어떤 소란을 피워도 상관없었다. 북을 만들고 싶으면 그리하라지. 그는 그녀가 북을 만들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온 시각. 한 시종이 황급히 황제를 찾아와 고했다.

“폐하, 남 부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시종의 말에 정신이 번뜩 깼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어찌 안 보인단 말이냐. 처소를 지키던 자들은? 전부 다 죽었단 말이냐?”

시종은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벌벌 떨었다. 황제가 남 부인을 중시한다는 건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예전에 난비를 총애하던 것도 남 부인과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 부인은 난비와 달리 황제에게 감히 막말까지 했다. 만약 난비가 그랬다면 목이 달아났겠지만, 황제는 남 부인 앞에서 못 들은 척까지 했다. 이건 너무나 명확한 차이였다.

황제는 며칠 동안 백천범에게서 받은 화가 폭발하여 꿇어앉은 시종을 발로 힘껏 걷어찼다.

“이런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

바닥에 쓰러진 시종은 이를 악문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황제는 서둘러 백천범의 처소로 향했다. 저 멀리 시위들이 처소를 에워싼 모습이 보였다. 다들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일찍 도착한 오특민은 황제가 다가오자 곧장 그를 맞이했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 부인을 찾았습니다.”

황제는 마침내 마음을 놓았다.

“어디, 어디 있단 말이냐?”

오특민은 아무 말 없이 나무를 가리켰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두운 허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만에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백천범을 발견했다. 기쁨도 잠시… 그는 또다시 가슴을 졸였다.

“어찌 나무에 올라갔단 말이냐?”

옆에 있던 시종이 대꾸했다.

“부인께서 나무를 타고 올라가셨습니다.”

“…….”

존귀한 공주가 어찌 나무를 탄단 말인가.

“어서 내려오게 하거라. 저러다 넘어지면 어찌한단 말이냐?”

다들 서로 눈치만 보았다. 어디 그녀가 얌전히 말을 듣는 사람이던가?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직접 구슬리기로 했다. 목청을 가다듬은 그는 온화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다들 황제의 모습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기를 쓰고 참았다.

“농화야, 어서 내려와야지? 다리에 힘이 빠져 내려오지 못하는 것이냐? 걱정하지 말거라. 짐이 병사들에게 이불을 가져오라고 하마. 밑에서 받아 줄 테니 겁먹지 말거라.”

백천범은 나무 따위는 무섭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녀는 조용히 탄식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지!

백천범이 나뭇가지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제는 그녀가 내려오는 건 줄 알고 말을 멈추었다. 그런데 그녀는 더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금세 꼭대기까지 올라 나뭇가지 끝자락을 안았다. 얇은 가지는 그녀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이리저리 흔들렸다. 황제의 마음도 그녀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무얼 하려는 건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뭇가지는 더욱 크게 휘청거렸다. 황제는 조급한 마음에 크게 소리쳤다.

“어서, 어서! 어서 그녀를 밑에서 받을 방법을 생각하거라. 남 부인이 다치면 짐이 너희의 목을 벨 것이다!”

시위들은 네 명씩 한 조를 이루어 이불을 붙잡고 나무 아래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백천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담벼락 바깥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주시했다. 기회를 엿보던 그녀는 휘청거리는 나무의 탄력을 이용해 껑충 뛰어올랐다.

그녀의 낙하에 몽달 황제의 정신이 툭 끊기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비틀며 오특민의 품에 쓰러졌다. 순간 모든 이들이 난리 법석을 떨며 여기저기서 고함을 질렀다.

그 시각, 백천범은 다른 나뭇가지를 안전하게 붙잡고 있었다. 나무 아래로 내려왔을 땐 철혈시위들이 이미 그녀의 주변을 에워싼 뒤였다.

이렇게 많은 이들을 뚫고 도망칠 수 없다는 건 그녀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본 것이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경험이라도 쌓는 셈 치지.

막상 그녀를 에워싼 시위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그녀가 안전하게 처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줬다.

백천범이 처소로 들어가자 몽달 황제도 정신을 차렸다. 몽달 황제는 눈물을 글썽이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농화, 짐이 너 때문에 죽을 뻔했다.”

백천범이 멀리서 그를 유심히 살폈다.

“왜 그러세요?”

옆에 있던 시위가 대답했다.

“폐하께서 잠시 혼절하셨습니다.”

백천범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노인들은 이런 걸 못 보시죠.”

“…….”

‘짐이 너무 일찍 깬 듯하구나…….’

백천범은 대야 앞으로 걸어가 손을 씻은 뒤, 자리에 앉아 바늘에 실을 꿰었다. 북 가죽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에만 몰두할 뿐 몽달 황제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몽달 황제는 한사코 그녀 곁으로 다가가 미움을 샀다.

“농화야, 나무에는 대체 왜 올라간 것이냐?”

“그냥요. 재밌잖아요.”

“…….”

“앞으로는 그러지 말거라. 놀라 죽을 뻔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

“농화야, 난 황제이니라. 짐을 존중하려무나.”

백천범이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먼저 절 존중해야 저도 당신을 존중할 수 있어요. 지금이라도 절 궁 밖으로 내보낸다면 폐하라 불러 드릴게요.”

몽달 황제는 안색을 굳히고 최대한 자신의 위엄을 내비쳤다.

“꿈 깨거라.”

“당신도 꿈 깨세요.”

백천범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몽달 황제가 아무리 성격이 좋다 한들, 이런 말까지 참을 수 있을까?

“두고 보거라. 조서만 쓰면 넌 짐의 황후가 되는 것이다. 영원히 짐 곁을 지켜야 한다.”

“그럴 일은 없어요.”

백천범이 말했다.

“연세가 지긋하신데 저보다 훨씬 빨리 돌아가시겠죠.”

“…….”

황제는 한참 동안 그녀를 노려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그는 소매를 뿌리치며 성이 잔뜩 난 기색으로 방을 나섰다.

오특민이 황급히 황제 뒤를 따랐다. 서재에 간 황제는 화가 난 얼굴로 텅 빈 조서를 바라보았다.

“폐하.”

오특민이 적당한 때를 보아 충언을 건넸다.

“황후를 책립하는 건 심사숙고하셔야 합니다. 남 부인의 성정으로 봐선…….”

언젠가 폐하가 그녀 때문에 화병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짐을 비웃겠지. 왜 하필 남 부인이냐면서 말이야.”

오특민이 곧장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황공하옵니다.”

“일어나게.”

황제는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조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이 과거에 놓친 사람이 있었네. 한데 하늘이 짐에게 다시 만회할 기회를 주었어. 이 기회를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 걸세.”

오특민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감정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가 아는 거라고는 황제는 천하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원하는 여인은 누구든 손에 넣을 수 있는 황제가 어째서 저딴 여인에게 목을 맨단 말인가?

* * *

몽달 황제는 이날 밤 푹 잠들지 못하고 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세찬 불길 위에 댓잎 밥처럼 꽁꽁 묶여 있었다. 그 주변엔 온갖 요괴가 붉은 눈을 부릅뜨고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불길이 거세게 일 때마다 요괴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별안간 시끄럽게 떠들던 요괴들이 양쪽으로 물러나며 길을 텄다. 누군가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불빛 너머로 발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자는 금색 가면을 쓴 채 서늘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그자는 계속해서 그에게 걸어왔고, 발소리 역시 계속 이어졌다. 발소리는 점점 더 커져 나중엔 천둥소리처럼 땅이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 엄청난 소리에 그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둥둥, 둥둥둥, 둥둥둥, 둥, 둥둥…….’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바깥에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황제가 몸을 일으켜 앉아 시종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소리더냐?”

밤새 곁을 지키는 시종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대답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남 부인 처소에서 들리는 소리입니다. 꼭 북소리 같습니다.”

북소리? 황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정말 북을 만들었단 말이냐?”

시종은 황제가 남 부인을 아낀다는 걸 알았기에 적당히 아부를 떨었다.

“남 부인께선 솜씨가 좋으시니 분명 만들어 내셨을 겁니다.

북소리를 듣던 황제는 금세 문제점을 발견했다. 북소리는 둔탁하여 좀처럼 소리가 멀리 퍼지지 않았다. 적막한 밤이긴 해도 고작해야 그에게만 들릴 소리였다. 황제는 머리가 아팠다.

“한밤중에 잠도 자지 않고 어찌 북을 친단 말이냐?”

시종이 말했다.

“폐하, 듣자니 남 부인께서 동궁에 계실 때도 밤마다 북을 치셨다고 합니다.”

입을 놀리던 시종은 별안간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황제는 역시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백천범을 동궁에서 빼앗아 온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다른 이가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건 싫었다. 노인이 아들의 여인을 빼앗아 오다니! 혹여 바깥에 소문이라도 난다면 그의 체면이 곤두박질칠 것이다.

“뺨을 치거라.”

“예.”

시종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양쪽 따귀를 번갈아 가며 때렸다. 철썩철썩, 하는 소리가 방 안에 맑게 울려 퍼지니 저 묵직한 북소리와 박자를 맞추는 것 같았다.

* * *

영십오는 궁전 옥척에 엎드려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때, 별안간 둔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북쪽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 그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어쩐지 익숙한 장단이었다.

그가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자 영십육이 멀지 않은 지붕의 서수瑞獸(기린 등 상서로운 짐승)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영십오는 달빛에 의지해 손짓했고, 영십육도 곧장 손짓으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엄호하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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