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2화
방 관리는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안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들어오거라.”
그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주인, 동월에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금색 가면 위로 보이는 눈망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원곡 주인이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게 틀림없었다.
“뭐라더냐?”
“분명 동월 황제 묵용감이 북쪽으로 친정으로 떠났다 합니다.”
방 관리가 말했다.
“그의 곁에는 늘 영씨 성을 가진 수행원이 따른다고 합니다. 분명합니다. 천선지인은 동월 황제가 틀림없습니다.”
도원곡 주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의 눈은 정확하지.”
“소식이 아직 더 남았습니다.”
방 관리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이건 그저 소문이긴 한데… 동월 황후 또한 북쪽 국경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우리 쪽 밀정이 백성에 있는 동월군을 염탐했지만 동월 황후에 대한 소식은 없었다고 합니다.”
가면 뒤에 가려진 눈빛이 무엇인가를 곱씹는 듯했다. 도원곡 주인은 의자에 달린 커다란 바퀴를 밀며 천천히 방 안을 돌았다.
“이 노부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지금 동월의 황후는 십여 년 전 동월로 시집간 남원의 무양 공주일 테지?”
방 관리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동월 황후는 몽달에 왔다. 게다가 지금은 황궁에 있지.”
방 관리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동월 황후가 몽달 황궁에 있다니요. 설마 몽달과 동월이 손을 잡은… 아니, 묵용감의 정체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니 몽달의 황제는 분명 이 사실을 모를 겁니다. 한데 어찌 몽달 황제가 동월 황후를 황궁에 끌어들였단 말입니까?
설마 동월 황후로 묵용감을 견제하려고요? 그놈이 부인을 이용해 묵용감을 견제한다면 우리의 일에도 영향을 받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도원곡 주인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묵용감은 위협을 당할 자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해독제를 얻기 위해 이 임무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노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나의 신분과 목적을 알아내는 것이다. 지난번에 내가 그에게 제안한 거래는 무시하더군. 그런데 이번엔 노망난 작자가 그의 여인을 미끼로 삼았으니!”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두고 보거라. 묵용감은 머지않아 날 찾아올 것이다.”
방 관리는 반 박자 늦은 반응을 보였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방 관리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주인의 말씀은… 그날 영감태기가 백도탑에 데려간 여인이 동월 황후란 말씀이십니까?”
도원곡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남류청과 그리 똑같이 생겼는데 그녀의 딸이 아니라면 누구겠는가? 방 관리가 놀란 표정을 거두지 못하고 무심코 한 마디 내뱉었다.
“주인, 그날 동월 황후를 보시고 임무를 중단하신 것입니까?”
도원곡 주인의 눈에서 매서운 빛줄기가 쏘아졌다. 방 관리는 그의 서늘한 눈빛에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일에 대해서 도원곡 주인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그가 언급을 원치 않으면 아랫사람들은 절대 물어선 안 되었다. 그 또한 이곳의 규율 중 하나였다.
방 안엔 정적이 흘렀다. 방 관리는 자신의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마다 방 관리는 도원곡 주인 앞에서 바들바들 떨어야 했다. 한참 뒤, 도원곡 주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만 물러가거라.”
“예.”
방 관리는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남원 공주에 대해 생각하던 주인의 안색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 * *
오특민은 몽달 황제가 붓을 든 채 한 글자도 적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황제가 무얼 하려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 난감했다.
황제는 나이가 들더니 자꾸만 황당한 짓을 저질렀다. 조서를 내려 백천범을 황후에 봉하려 하다니! 이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힐 게 자명한 일이라 대대적으로 추진하지도 못했다. 어찌 신원도 불분명한 여인을 몽달의 황후로 세울 수 있단 말인가?
황제 또한 큰 파문이 생길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저 제 옆을 지키는 총관리 오특민에게만 자신의 뜻을 내비쳤다. 오특민은 황제에게 조심스럽게 권했다.
“폐하, 황후 책립은 응당 심사숙고하셔야 합니다. 남 부인의 신분 때문에 백성들의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황제는 오히려 억울한 듯 표정을 찡그렸다.
“짐은 자네에게만 근심을 털어놓을 수 있다네. 그녀를 황후로 삼는 건 짐의 일생일대의 소원이네. 그저 짐의 한을 푸는 일이라고 생각해 주게.”
오특민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여인을 안 지 이제 고작 며칠이었다. 한데 일생일대의 소원이라니…….
게다가 황제는 그 여인을 조금 무서워하는 듯했다. 그는 남 부인이 황제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걸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그는 너무 놀라 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지만 황제는 듣지 못한 척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황제의 낯짝이 참으로 두껍다고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천자의 권위가… 겨우 이 정도일 뿐이라니.
황제는 좀처럼 글씨를 쓰지 못했다. 그 역시 정당한 절차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적당한 구실을 찾지 못했다.
오특민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할 때, 한 시종이 그의 귓가에 넌지시 속삭였다. 오특민은 화들짝 놀라며 곧장 방 안을 바라보았다. 황제도 그의 움직임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오특민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폐하, 남 부인께서…….”
황제는 백천범의 일에 매우 민감했기에 곧장 붓을 내려놓았다.
“남 부인이 왜?”
“폐하께서 소중히 보관하시던 오우敖牛 가죽을 가져가셨다고 합니다.”
황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난 또 뭐라고. 원하는 게 있거든 뭐든 주거라. 그저 소가죽일 뿐인데 그리 놀랄 것 없다.”
오특민과 시종을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우는 기후가 훨씬 열악한 서북 지역에 서식하는 야생 소라서 몽달에서는 볼 수 없었다. 원래도 매우 희귀한 종이라 한 마리를 잡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황제의 오우 가죽은 소국인 서번西番이 올린 진상품인데, 황제는 이를 매우 소중히 여겨 그 누구도 만지지 못하게 했다.
난비가 총애를 받던 시절, 그녀 또한 오우 가죽을 탐냈지만 황제는 끝내 하사하지 않았다. 한데 남 부인이 가져갔다는 소식엔 그저 소가죽에 불과하다고 말하다니! 황제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몽달은 동월보다 추우니 분명 추위를 참기 힘들 테지.”
그의 목소리에는 괴로움이 섞여 있었다.
“짐이 세심히 살피지 못하였구나. 진작 오우 가죽을 주었어야 했는데.”
남 부인이 멋대로 가져간 것인데 황제는 화조차 내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조금 흐뭇해했다. 그녀가 그를 남이라 여기지 않았으니 그의 물건을 쓰는 것 아니겠는가?
여인은 마음이 약한 법이었다. 그가 이렇게나 잘해 주는데, 그녀도 조금은 마음에 두었을 테지. 황제는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아져서 활짝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짐이 좀 보러 가야겠구나.”
그는 신이 나서 백천범의 처소로 향했다. 백천범은 탁자 앞에 앉아 은색 가위를 들고 가죽을 싹둑싹둑 자르고 있었다. 황제는 깜짝 놀라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농화야, 지금 무, 무엇 하는 것이냐?”
백천범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북을 만들고 있어요.”
황제는 익숙한 소가죽 무늬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 무엇으로 북을 만든단 말이냐?”
“당연히 소가죽이죠.”
백천범이 그제야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이 소가죽 어르신 방에서 가져온 거예요. 꽃무늬가 아주 예쁘더라고요.”
그녀는 가위를 내려놓고 가죽을 들어 올렸다.
“보세요. 괜찮죠? 북을 다 씌우고도 남을 거예요.”
문 앞에 서 있던 오특민은 시선을 거두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 귀한 것을 저리 함부로 자르고 쓰다니! 황제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북을 만들 수는 있고?”
“뭐 어쩌겠어요.”
백천범이 잘라 둔 소가죽을 한쪽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달라고 해도 안 주시는데.”
말을 마친 그녀는 장막 뒤로 손을 더듬더니 칼 한 자루를 꺼냈다. 화들짝 놀란 황제는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칼은 무엇 하려고? 어서 내려놓거라, 어서!”
그는 목청을 높여 철혈시위를 불러 모았다. 시위들은 재빨리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하지만 그들은 꿈쩍도 못 하고 황제의 명만 기다렸다. 황제가 물었다.
“칼은 어디에서 난 것인가?”
백천범이 정원을 가리켰다.
“주웠어요.”
거짓말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정원에서 어찌 칼을 주웠을까. 그런데 정원을 지키던 한 시위의 안색이 별안간 하얗게 질렸다. 자신의 검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잔뜩 긴장한 이들을 바라보며 백천범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뭘 그리 긴장하세요. 그저 대나무 좀 자르려는 것뿐인데.”
그녀가 정원으로 향하자 앞을 막고 있던 시위들이 하나둘 길을 텄다. 백천범은 대나무 앞에 멈춰서 칼을 휘둘렀다. 황제는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찌 네가 이런 일을 한단 말이냐? 어서 들어가거라. 수하들이 다 해 줄 것이다.”
하지만 백천범은 이미 대나무 가지를 치고 있었다. 그녀는 떨어진 대나무를 줍기 위해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몽달 황제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리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데 황제를 무시하다니!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겨우 화를 억눌렀지만 늙은 얼굴은 계속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시위들은 눈을 내리깔고 그 모습을 담지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귀가 정상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저들의 대화를 듣지 못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황제는 손을 휘둘러 주변을 물리곤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말했다.
“농화야, 네 마음은 상관없다. 짐은 이미 결정했다. 널 황후로 세울 것이다.”
그는 백천범이 크게 놀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않고 하던 일에 열중했다. 황제는 지금껏 자신이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해 왔다.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농화야, 몽달의 황후가 되는데 기쁘지 않은 것이냐?”
백천범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동월 황후도 별거 아닌데 몽달 황후가 뭐 대수라고.
“농화야, 대체 무슨 생각인지 말 좀 해 보련.”
백천범은 칼을 들고 대나무 가지를 깎았다.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어 황제의 용포에 툭툭 부딪혔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대로 된 부군이라면 평범한 백성이라도 상관없지만, 시답잖은 부군이라면 왕모王母(신화 속의 여신인 서왕모를 일컬음) 마마도 원치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은 매우 직설적이었다. 바로 그가 싫다는 의미였다. 몽달 황제는 가슴이 시큰거려 조용히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 한 마리가 급강하와 선회를 반복하며 날아다녔다. 그는 새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탄식을 내뱉었다.
“옛날엔 짐도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다.”
줄곧 그의 말을 무시하던 백천범은 이 말을 듣고선 웃음을 터뜨렸다.
“어르신, 사내대장부라면 과거의 용맹함은 언급하지 않는 법이에요. 어르신은 집안에 자손도 가득하니 이제 그만 편안히 복을 누리세요.”
“…….”
이 계집은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욕 한 마디 않고 그의 마음을 꽉 막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