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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61)화 (961/1,192)

제961화

태자의 말에 난비는 속으로 덜컥 겁이 났다. 그녀에게는 아들도 없었기에 제왕의 총애는 그녀가 설 수 있는 근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총애를 잃는 것은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태자는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더 이상 난비에게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백천범이 갇혀 있던 곳의 정확한 위치를 묻더니 입을 열었다.

“어쨌든 궁정 안에 있을 겁니다. 본궁이 직접 가는 것은 불편하니 난비께서 알아봐 주시지요. 소식이 있거든 곧장 본궁에게 전해 주셔야 합니다.”

예전에 태자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태자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만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다시 황제의 총애를 얻게 된다면 어떻게든 그의 아이를 갖고 태자의 옆을 굳건히 지키리라.

만약 육황자가 제위에 오른다면 근비는 분명 그녀의 목숨부터 앗아갈 것이다. 이제 그녀는 부귀영화를 기대하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난비는 발톱을 숨기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비가 떠나자 태자는 먼 곳에 있던 시위에게 눈짓을 보냈다. 태자는 곧장 몸을 날려 담장 사이의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는 난비의 설명대로 백천범이 묵던 방을 쉽게 찾아냈다.

문을 열자 벽에 걸린 호로사가 눈에 들어왔다. 궤 위엔 남색 꽃무늬 천이 보였다. 침대 기둥에는 남원의 특색이 느껴지는 장막이 걸려 있었다. 난비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건 그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과거 남원 여제가 이곳에 묵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런 곳에 황제가 백천범을 가둔 것이다. 한데 어째서 장소를 옮긴 것인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장대에는 머리 장신구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전부 다 정교하게 조각된 고급 장신구였다. 떠나면서 물건은 그대로 둔 걸 보면 급히 자리를 옮긴 듯했다.

황제가 갑자기 방을 옮긴 건 태자와 난비뿐만 아니라 백천범 또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새롭게 꾸며진 방을 바라보며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황제는 흥이 났는지 방 안 장식품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특별히 널 위해 꾸민 것이다. 마음에 드냐?”

백천범은 기대에 부푼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어르신, 좀 색다르게 하실 수는 없는 거예요?”

황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어찌해야 색다른 것이냐?”

“방을 동월 느낌으로 꾸미면 절 잡아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백천범이 눈을 희번덕였다.

“애당초 여제의 방도 남원 느낌으로 꾸몄지만 결국 여제도 떠났잖아요.”

호의가 짓밟힌 것도 모자라 과거까지 들추어내자 황제는 수치심에 성이 났다. 하지만 여제와 똑 닮은 백천범의 눈을 바라보니 절로 화를 누를 수 있었다.

“네 어미는 그 방을 아주 좋아했다. 오랜 시간 그곳에서 지냈지.”

“저한테 아무리 말씀하셔도 소용없어요. 전 여기 있을 수 없어요.”

“…….”

“됐어요.”

백천범이 말했다.

“차라리 예전 방이 더 나아요. 갑자기 방을 바꾸려니 불편해요.”

이제껏 그녀가 요구한 건 모두 다 들어주었지만 이번만큼은 힘들었다.

“그래도 이곳에 묵거라. 환경을 바꾸면 네게 더 좋을 것이다.”

백천범은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바깥은 작은 정원과 맞닿아 있었다. 정원에는 각종 꽃과 나무가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풍경은 제법 아름다웠다. 밥그릇만 한 국화와 원추리가 피어 있었고, 새빨간 보리수나무 열매가 잔뜩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정원 가장자리 쪽 커다란 나무에 멈췄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제게 큰 북 하나만 주세요.”

황제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주고 싶었다. 다만 여전히 어르신이라는 소리는 듣기 불편했다. 어르신이라는 소리에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싫었지만 그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가 물었다.

“북은 무엇 하려고?”

백천범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북 치는 걸 좋아해서요. 동궁에서 지낼 때도 날마다 쳤으니 태자 전하도 알 거예요.”

황제도 기억했다. 그때 난비의 꿰임에 동궁을 찾았을 때, 전 선생이 북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황제가 백천범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 그것은 난비와 태자의 방해를 받기 싫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 사람을 막기 위한 이유가 더 컸다. 백천범이 그의 손에 있는 한 그 사람은 분명 그를 찾아올 것이다. 황제는 그자가 자신을 찾아오는 건 괜찮았지만 그자의 손에 백천범을 빼앗기는 것은 절대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이곳에 숨겨 둔 것인데, 여기서 북을 친다면 그자가 이곳에 백천범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겠는가? 애써 백천범을 잡아 뒀는데 여기서 망칠 순 없었다. 그가 마음을 다잡고 대꾸했다.

“북만 빼고 말해 보거라. 원하는 게 있거든 짐이 모든 다 주겠다.”

백천범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겠어요. 그럼 소라도 주세요.”

“…….”

그는 슬쩍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농화야, 말 좀 들으면…….”

백천범은 재빠르게 손을 피했다. 황제는 허공에 있는 손을 거두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 부끄러워할 것 없다. 너와 나 사이에 조만간…….”

“어르신.”

백천범이 그를 크게 불렀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어르신이에요. 다 늙은 분이 주책없이 행동하시다니요!”

황제는 그녀 때문에 화가 나서 이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짐은 황제다!”

“황제면 뭐요? 황제면 혼인한 여인을 마음대로 강탈해도 되는 거예요?”

백천범은 소매에서 표창을 꺼내 손 위에서 가볍게 굴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함부로 행동했다간 이 표창이 어디에 박힐지 장담하지 못해요.”

그녀는 그의 배를 힐끔거렸다. 놀란 황제는 몸을 움찔했다. 어떻게 된 계집이 제 어미보다 흉포하단 말인가!

* * *

묵용감은 백천범의 소식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초조했던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밤중에 몽달 황궁을 뒤지기 시작했다. 궁 안엔 명위와 암위들이 이전보다 몇 배 더 늘어나 있었다. 어둠 속에 흔들리는 인영은 마치 커다란 우물을 파 놓고 그 안에 빠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묵용감 곁에 있는 시위들 또한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백천범을 황제에게 뺏긴 영십삼은 자책하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묵용감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영십삼을 바라보았다.

“일어나거라. 지금은 일손이 부족하니 우선 부인을 데려온 뒤 다시 얘기하자꾸나.”

영십삼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가져갔다.

“노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인을 데려오지 못하면 소인이 목을 바치겠나이다.”

묵용감이 손을 내저으며 영십오와 영십육에게 분부했다.

“부인은 죽음만 기다릴 성격이 아니다. 분명 어떤 수를 써서라도 소식을 전하려 할 것이야. 너희 둘은 종이와 붓을 들고 궁전 주변을 잘 지키거라. 무슨 소리가 들리거든 곧장 적어 내게 가져와야 한다.”

“예, 노야.”

십오와 십육은 명을 받잡고 물러났다.

“십삼, 넌 그간 궁에 머물렀으니 궁전의 위치를 그려 낼 수 있겠지?”

십삼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십구는 방법을 강구하여 성안에 흩어져 있는 정예병들이 황궁으로 모일 수 있게 연락을 취하거라. 또한 성 밖의 삼백 정예병 중 이백은 성에 들여보내거라. 빼앗은 군마들도 함께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동서남북 네 곳의 성문을 잘 지키게 하거라. 남은 이들은 명을 대기하라 전하고.”

영십구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쟁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인원이 적지만 우리의 군사들은 용맹하게 싸울 것입니다.”

영십일은 좀 더 어른스럽게 말했다.

“노야께선 만일을 대비해 말씀하신 것이다. 가능한 한 전투는 하지 않는 게 낫지. 우린 고작 오백 명인데 어찌 몽달의 천군만마를 대적하겠느냐?”

하지만 영십구는 더더욱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리 노야께서 어떤 분이십니까. 천하를 호령하던 군신이 아니십니까? 설령 성안의 이백만 움직인다고 해도 노야께선 몽달군을 전멸시키실 겁니다.”

묵용감이 조용히 그를 흘겼다.

“내게 그런 재주까진 없다. 군신이 정말 신인 줄 아느냐? 십일의 말이 옳다. 가능하다면 전투는 하지 않는 게 좋다. 몽달 태자는 바보가 아니다. 한 번 속일 수는 있어도 두 번은 못 속인다. 수백 명으로 만 명을 치는 건 승산이 없는 싸움이다.”

영십구가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노야 말씀이 맞습니다.”

영십일이 말했다.

“노야, 어째서 도원곡 주인의 힘은 빌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몽달의 천하를 뒤집을 수 있을 텐데요.”

영십삼이 제 우려를 말했다.

“부인의 안전이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기에 천하를 뒤집는 건 시기상조입니다. 태자가 부인을 동복누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로 부인을 지켜 주려 하였지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태자는 몽달 황제에게 부인을 보여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묵용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뭐라? 동복누이? 대체 무슨 이유에서?”

“저도 해막도 일로 알게 된 것입니다. 난비와 몽달 황제가 동궁으로 왔을 때 태자는 부인을 그의 밀실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때, 부인께서 남원 여제의 초상화를 보신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만 보기엔 태자의 생각은 조금 억지인 것 같았습니다.”

묵용감은 손가락을 구부려 탁자 위에 가볍게 두드렸다. 태자가 백천범을 누이라 여기는데… 몽달 황제에겐 보여 주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몽달 황제는 백천범의 생부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부친과 누이의 만남을 막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몽달 황제가 백천범을 데리고 가던 그 모습이 떠오르자 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몽달 황제가 백천범의 생부가 아니라면 그녀의 생부는 대체 누구인가? 남원 여제는 분명 삼십여 년 전 몽달에 왔었고 남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월에서 백천범을 낳았다. 시간상으론 그자가 분명…….

그 순간, 그의 눈이 번득였다. 머릿속에 가면을 쓴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도원곡 주인이 백도탑에서 임무를 중단시킨 게 설마! 백천범을 때문이란 말인가? 탁자를 두드리던 그의 손가락이 한참 동안 허공에 멈춰 있다가 천천히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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