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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60)화 (960/1,192)

제960화

폭신한 의자에 앉은 난비는 새끼손가락 끝에 꽂은 호갑투를 어루만지며 넋을 놓고 있었다. 그 여자가 나타난 뒤로 황제는 그녀를 두 번 다시 부르지 않았다. 설마… 자신이 정말 황제의 뇌리에서 이렇게 잊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녀의 심복인 시녀가 조용히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마마, 새로 온 부인이 성질을 내며 그릇을 다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래?”

난비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았다. 황제는 너무 소란스러운 여인을 싫어했다. 그 여인이 난동을 부릴수록 그녀에게 유리했다.

“그릇을 다 뒤엎은 이유가 무엇이냐?”

시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셨느냐?”

“폐하께서는 다시 음식을 보내라고 명하셨습니다.”

가슴이 서늘해진 난비가 다시 물었다.

“폐하께서는 화를 안 내셨느냐?”

시녀는 희망이 가득한 상전의 표정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황제가 화를 전혀 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난비의 눈동자가 점점 빛을 잃고 어두워졌다. 다시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온몸에서 울적한 기분이 느껴졌다. 시녀는 가만히 곁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마마, 노비는 새로 온 부인이 어떤 사람을 닮은 것 같습니다.”

난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새로 온 부인이 어떤 사람을 닮은 게 아니라 그녀가 새로 온 부인을 닮은 것이다. 첫눈에 백천범을 보았을 때, 그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때를 다시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런데 시녀가 중얼거리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혹시 태자 전하께서…… 아닌가?”

난비가 축 늘어진 채 물었다.

“태자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

“새로 온 부인이 태자 전하의 손님이었던 전 선생과 똑같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난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천천히 일어났다. 전 선생이라면…….

처음 백천범을 보았을 때, 그녀는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듯 친숙했다. 알고 보니 그건 자신과 닮아서가 아니라 예전에 전 선생이란 자를 본 적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문득 모든 걸 깨달았다. 전 선생과 백천범의 얼굴이 하나로 겹쳐졌다. 분명 같은 사람이다.

그녀는 몹시 화가 났다. 그렇다는 건 태자가 배후에서 이런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녀 대신 백천범이 황제의 곁을 차지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 태자는 황제와 백천범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두 번이나 불러도 달갑지 않은 듯 갖가지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난비는 방 안을 어지럽게 서성거렸다. 화려한 옷자락이 두툼한 융단을 쓸고 다니느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자는 동궁에 한 여자를 숨겼고 남자 행세를 하게 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피했다.

설마……. 그녀가 입을 가리고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의 여인을 빼앗다니! 전해지면 백성들의 웃음거리가 될 일이었다. 무력감을 순식간에 털고 일어난 난비는 흥분으로 두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가자! 태자를 찾아가야겠다.”

시녀는 난비가 태자를 찾아가 행패를 부릴 거라는 생각에 걱정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마, 태자 전하를 건드리면 수습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마마께서…….”

“뭘 두려워하느냐? 본궁은 태자 전하와 거래를 하려는 것이다.”

그래도 시녀는 걱정이 되었다.

“내명부는 유별해야 하니 혹시 폐하께서 아시게 되면…….”

난비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황제의 마음은 모두 그 여자에게 가 있단다. 본궁이 외간 남자를 만나도 그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잠시 고심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굳이 본궁의 약점을 만들어 줄 순 없지.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서 동궁에 말을 전하거라. 태자 전하와 불탑에서 만나길 원한다고. 본궁이 중요한 걸 알려 드리겠다고.”

시녀는 알겠다고 답하고 총총히 사라졌다. 난비는 잠시 방 안에 서 있다가 시녀에게 풍루風褸를 걸치게 하고 천천히 문을 나섰다. 얼마 안 가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우님께서 어딜 가시나?”

난비가 고개를 들고 빙그레 웃었다.

“근비 형님, 오늘은 웬일로 산책을 나오셨어요?”

난비가 총애를 독차지한 후, 근비는 좀처럼 궁전 문을 나서지 않았다. 난비의 소문을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제왕의 무정함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이제 난비도 그녀의 전철을 밟았다는 소식이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통쾌했다. 오늘 이렇게 민란궁 근처를 거닐러 나온 건 난비가 슬픔에 잠긴 꼴을 구경하고 아픈 곳을 몇 번 더 찔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왜 혼자인가요? 폐하는?”

말투에서 이미 신랄한 비웃음이 느껴졌다. 난비가 어찌 근비의 의중을 모르겠는가?

“형님 아직 모르세요? 폐하 곁에는 새로 온 여인이 있잖아요. 저는 벌써 잊으셨죠.”

“그럴 리가?”

근비는 깜짝 놀라는 척했다.

“아우님은 아직 늙지도 않았는데 폐하께서 벌써 싫증이 나셨단 말이야?”

난비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형님, 이렇게 절 비웃으실 거 없어요. 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에요. 폐하께서 진심으로 누구를 그리워하는지 정말 모르세요?”

근비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님께서 옛날부터 말했잖아요. 내가 받는 은총은 물 위에 뜬 달에 불과하고 거울에 비친 꽃일 뿐이라고.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그녀는 근비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대용품 중에 하나일 뿐인데 어떻게 오래갈 수 있겠어요.”

결국 근비가 몸을 살짝 떨며 입을 열었다.

“아우님도 아는군요?”

“형님께서 새로 온 부인을 만났더라면 이렇게 묻지도 않으셨을 거예요.”

그녀는 입궁하자마자 황제의 총애를 온몸에 받았고, 순식간에 대단한 지위와 권력을 거머쥐어 점차 오만방자해져 갔다. 그때, 근비가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다. 당연히 그땐 질투에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건만. 이제 보니 근비의 말은 정확했다. 근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여인은 나이가 어떻게 되지요?”

“당연히 젊고 아름답죠.”

난비가 비아냥거렸다.

“오죽하면 우리 폐하께서 넋을 잃으셨을까?”

근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게 젊진 않을 겁니다.”

난비가 말했다.

“결국 또 다른 대용품일 뿐이에요. 단지 나보다 조금 더 닮았겠죠. 앞으로 형님도 저와 경쟁할 필요 없어요. 그 아우님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죠.”

근비는 멍한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난비도 대충 예를 취하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불탑에 도착하니 태자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난비께서 사람을 보내 본궁을 부르셨던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난비가 웃으며 그를 훑어보았다.

“전하, 눈 밑이 거무스름한 게 잠을 설치셨나 봐요.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본궁에게 고민거리가 있든 없든 난비 마마와는 무관합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난비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틀림없이 전 선생 때문에 심려가 크시죠? 본궁이 틀린 말을 했나요?”

태자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폐하께서 새로 들이신 부인이 동궁에 있던 전 선생이죠? 본궁의 말이 맞죠? 태자 전하?”

태자는 그녀를 경계하면서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비밀이 아니었다. 황제는 분명 동궁에서 백천범을 끌고 갔다.

“마마께서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군요.”

“당연히 알죠.”

난비는 입가를 끌어올리고 피식 웃었다.

“폐하께서는 그녀를 꽁꽁 숨겼지만, 본궁은 전하가 그녀를 만날 수 있게 해 드리겠어요.”

태자는 잠시 침음했다.

“왜 본궁을 도와주는 것입니까?”

난비는 풍루를 가지런히 정돈하며 말했다.

“당연히 폐하께서 원앙 한 쌍을 갈라놓는 게 못마땅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태자 전하와 거래를 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태자는 난비가 백천범과 자신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해명을 하려던 그는 해묵은 일을 떠올리곤 그냥 묵인하기로 했다.

“원하는 걸 말씀해 보십시오.”

“전하께서 새로 온 부인을 데려가시는 게 본궁을 크게 돕는 일입니다.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본궁도 전하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 일조할 거예요.”

태자는 그녀가 예전의 자리를 되찾길 원한다는 걸 알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에 응하겠습니다.”

* * *

난비는 태자를 만난 뒤, 그와의 거래를 지키기 위해 몰래 후전後殿으로 향했다. 한데 무슨 일인지 백천범이 갇혀 있는 곳으로 가는 길 내내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방 안 물건들은 전부 그대로 있었지만, 백천범은 물론이고 그녀의 시중을 들던 시녀들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넋을 놓은 그녀는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다. 어쩐지 아무도 지키는 이가 없더라니……. 이미 황제가 다른 곳으로 옮긴 듯했다.

그런데 어째서 옮겼단 말인가? 설마 태자와의 거래를 황제가 벌써 알아차린 것이란 말인가? 불과 반 시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 그리 황제의 귀에 빨리 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그녀를 경계하기 위해서?

생각해 보면 그건 더 말이 안 된다. 그녀는 그저 일개 궁비일 뿐이다. 황제가 그녀를 경계할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총애까지 잃은 뒤가 아니던가.

그녀는 화장대에 놓인 금잠金簪을 들고 위쪽 끝에 달린 술을 가볍게 흔들었다. 가느다란 금 사슬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반짝이는 물결을 만들었다. 그걸 보고 있던 난비는 갑자기 짜증이 일어 뾰족한 잠 끝으로 탁자를 힘껏 내리찍었다. 하지만 탁자엔 옅은 흔적만 남을 뿐이었다.

백천범이 사라진 것보다 태자의 신용을 잃은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이번에 그와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렵사리 얻은 얄팍한 신뢰조차 앞으로 기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태자는 역시나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폐하께서 왜 남농화를 옮기셨단 말입니까?”

난비가 떠보듯 물었다.

“본궁과 전하의 거래를 폐하께서 알게 되신 건 아닐까요?”

태자가 냉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아셨다면 난비께서 지금 본궁 앞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총애를 잃은 궁비는 그저 보잘것없는 여인에 불과했다. 애정 없는 여인을 죽이는 건 황제에게 개미 한 마리를 밟아 죽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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