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9화
방 관리는 우선 주인의 다리를 덮고 있는 담요를 정리하고 문밖에서 말을 전했다. 잠시 후, 묵용감이 들어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해독제를 받으러 왔소.”
도원곡 주인의 짐작이 맞았다. 이제 그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임무를 실행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해독제를 달라고 하십니까?”
“계획이 중지된 건 나와는 상관없잖소.”
묵용감이 말했다.
“이번 임무를 위해 나도 오랜 시간 준비했소.”
그 속뜻인즉슨 자신은 할 일을 다 했으니, 받을 건 받아야겠다는 말이었다. 도원곡 주인이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서 말씀하시지요.”
묵용감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담담하게 걸어가 그의 앞에 앉았다. 두 손은 무릎 위에 편안하게 올리고 두 눈은 도원곡 주인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말해 보시오.”
도원곡 주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노부에게 할 말씀이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난 해독제를 받으러 왔을 뿐이오.”
묵용감이 덧붙였다.
“만월이 뜨는 날이 머지않았소. 이번에 받는 반쪽 환을 복용하면 독이 모두 해독되는 것 맞소?”
“노부는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니… 해독제은 드리지요. 그런데.”
도원곡 주인이 덧붙여 물었다.
“해독제를 받으면 몽달을 떠나실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묵용감이 콧방귀를 뀌었다.
“남아서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고 가라고?”
도원곡 주인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전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당신을 가지 못하게 할 방법도 있습니다.”
“그렇군.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그 사실을 알리기만 해도 몽달 황제가 나를 죽이려 들겠군. 그런데 당신이 내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건 나와 거래를 하고 싶기 때문이지 않소?”
“그렇습니다. 노부는 당신과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목소리가 가면 뒤에서 들려오니 좀 답답하게 들렸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지만,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오.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묵용감은 금빛 가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소한… 당신의 실체를 보게 해 줘야 하지 않겠소?”
도원곡 주인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이내 수납장 앞으로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갔다. 그는 서랍 속에서 작은 나무상자를 꺼내 묵용감에게 주었다.
“남은 해독제입니다. 이것만 복용하면 이제 만월이 떠도 더 이상 고통이 없을 것입니다.”
묵용감은 코끝에 대고 가만히 냄새를 맡았다. 곧 상자를 품에 넣은 그는 인사를 했다.
“고맙소.”
도원곡 주인은 가볍게 웃었다.
“고맙다는 인사가 억지로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나는 사람에게 독약을 써서 협박하는 꼼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소.”
그가 대놓고 비난했지만, 도원곡 주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맞습니다. 독으로 사람을 협박하는 건 비열한 수단이지요. 하지만 독에 중독되면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독만이 사람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걸. 오죽하면 당신처럼 신분 있는 사람이 나를 위해 일했겠습니까?”
그를 잠시 바라보던 묵용감이 낮게 말했다.
“당신이 틀렸소.”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도원곡 주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노부와 함께할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 * *
묵용감이 도원곡 주인에게 틀렸다고 말한 건, 세상에 독에 중독되어도 통제할 수 없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범아였다.
그녀만 생각하면 그는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백도탑에서 몽달 황제가 백천범을 기절시키고 강제로 끌고 가는 장면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몽달 황제가 백천범을 끌고 간 것이 과연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일까? 왠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뇌리에서 그때의 장면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격렬한 몸싸움이 한창이고, 몽달 황제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백천범을 주시했다. 백천범의 곁을 둘러싸던 복면을 한 시위…….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어디가 잘못됐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는 백천범에게 접근할 수 있었으나 복면을 한 시위가 어디선가 튀어나와 실패하고 말았다. 마치 그들의 유일한 사명이 그녀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이듯. 설마 몽달 황제는 그가 백천범을 데려가려 한다는 걸 알았단 말인가? 혹시 몽달 황제가 그의 신분을 알았을까?
몽달 황제와 백천범이 철수하자 그 복면을 쓴 시위들 역시 황제를 따라 철수했다. 원래 그를 쫓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는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몽달 황제의 눈에는 동월 황제가 황후보다 못하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몽달 황제는 남원 여제와 같은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딸을 빼앗아 협박이라도 하는 걸까? 그가 아내를 목숨처럼 아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백천범만 손아귀에 쥐면 그를 상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걸까?
묵용감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몽달 황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주판을 잘못 두드린 것이다. 아무리 장인이라도 그들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면 그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 * *
몽달 황제는 백천범이 밥상을 다 뒤집어엎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어떠하냐? 도자기 조각에 긁히지는 않았느냐?”
무릎을 꿇고 앉은 시녀는 어깨를 가볍게 떨면서 겁에 질려 대답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부인께서는 괜찮으십니다. 화를 한바탕 내시더니…….”
“또 뭐라고 하더냐?”
시녀는 머리는 더 조아리며 더 작아진 목소리는 고했다.
“태자 전하를 만나겠다고 하셨습니다.”
황제의 여인이 태자를 만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하지 않았다.
황제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일어나서 후전으로 갔다. 시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처음 백천범을 모시게 되었을 때, 단단한 뒷심을 만났다는 생각에 매우 기뻤다. 이제부터는 난비를 모시는 시녀에게 굽실거리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 온 부인은 성깔이 보통이 아니어서 모시기 쉽지 않았다. 정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후전으로 가던 황제는 발걸음이 느려지더니 결국 멈춰 섰다. 그는 기둥 앞에 서서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백천범이 그에게 늙고 못생겼다고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아득히 높은 지위를 가진 황제로서 모든 궁비들은 그를 사모했고 우러러봤다.
하지만 백천범의 눈에만 미움과 혐오가 내비쳤다. 그는 분하고, 억울하고, 두려운 마음에 멀지 않은 곳의 문만 바라보았다.
한참 멈춰 서 있던 황제는 결국 발걸음을 재촉했다. 보배처럼 여기는 그녀를 굶길 수는 없었다.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황제는 실눈을 뜨고 방을 구석구석 훑어서 작은 파편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백천범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를 보더니 일어서지도 않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황제는 자신을 ‘어르신’이라고 부르자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이제 귀가 먹은 것인지 제 귀를 의심하기도 했다. 어찌 황제를 ‘어르신’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황제는 못 들은 척하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잘못해서 그릇을 깨뜨렸다고 들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이냐?”
백천범은 그의 작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그릇을 다 깨뜨렸다면 분명 실수가 아니라 고의겠지요.”
황제는 돌려서 말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눈치를 조금만 줘도 상대방은 제 분수를 잘 알아차렸다. 이것이 황제가 말하는 기교였다.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여유를 주는 대화법이 군신으로서의 지혜였다. 그런데 이렇게 직진밖에 모르는 사람을 만나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황제는 큰 풍랑을 겪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당황해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면 여기 음식이 싫었나 보구나. 집을 떠나온 지 오래돼서 고향 음식이 먹고 싶겠구나…….”
백천범이 말을 잘랐다.
“저는 부군이 그리워요.”
황제는 다른 건 다 참아 줄 수 있어도, 이런 말은 용납할 수 없었다.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그의 곁에 왔으면 이제 그의 여인이다. 마음에 다른 남자를 품고 그리워한다면 그가 뭐가 되겠는가? 황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은 생각할 필요 없다. 이제 너는 짐의 여인이다.”
백천범도 화내지 않고 천천히 부인했다.
“아뇨, 저는 제 부군의 아내예요. 제가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으니 부군이 저를 찾으러 올 겁니다.”
“오는 게 더 좋겠구나.”
황제는 냉소를 지었다.
“짐이 네가 단념할 수 있도록 직접 대면하게 해 주마.”
“어르신께서 우리 부군을 찾으실 수 있겠어요?”
“못할 건 또 무엇이냐?”
황제가 말했다.
“네 부군의 이름을 알려다오. 짐이 그를 찾아오라 명하겠다.”
“우리 부군을 찾아서 어찌하려고요, 어르신?”
“그에게 이혼서를 쓰라고 해야지. 그러면 너희는 남남이니 서로 누구와 혼인을 하든지 상관없을 게 아니냐?”
“어르신께서는 우리 부군이 당신의 말대로 따를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짐은 그를 홀대하지 않을 것이다. 금은보화를 막론하고 미인과 종복을 원하는 대로 줄 것이며 저택이나 농장도 하사할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짐이 무엇이든 다 줄 것이다.”
백천범은 그가 연극하는 것 같진 않았다. 만약 묵용감의 존재를 알았다면 지금 그가 한 말은 우스갯소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묵용감의 존재를 몰랐다면 왜 그녀를 제사에 데려간 것일까? 아니면 혹시… 그녀를 백도탑으로 데려간 건 묵용감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인가?
황제는 이 화재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얼굴도 못 본 부군이지만 그는 마음이 불편했기에 화재를 바꿨다.
“태자를 찾았다면서?”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랬습니다.”
황제는 비꼬듯 말했다.
“부군이 그립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찌 태자를 찾는 것이냐?”
백천범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르신, 당신이 더러운 생각에 빠져 있다고 다른 사람을 다 더럽게 보지 마십시오. 제가 태자를 찾는 것은 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일이냐?”
“어르신께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
그녀가 말끝마다 그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니 귀에 거슬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결국 황제는 고함을 질렀다.
“짐을 그렇게 부르지 말거라.”
백천범이 물었다.
“왜 어르신이라고 부르면 안 됩니까?”
황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도 짐을…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어요. 아마 아버지께서는 폐하와 비슷한 나이일 거예요. 그러니까 폐하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게 잘못된 건 아니죠. 그렇죠? 어르신?”
“…….”
“어르신?”
황제가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말없이 일어섰다.
“짐이 음식을 다시 보내라고 하마.”
문턱을 넘은 그 순간, 그는 저를 매섭게 쏘아보는 백천범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쳤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뭐 조상님을 떠받드는 수준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