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8화
무려 황제 폐하인 그가 언제 여인에게 이런 비난을 들었겠는가? 황가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황제가 한마디 했다.
“짐 앞에서 이리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백천범은 그가 화를 내든 안 내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좀 나가 주세요. 저는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요.”
황제는 단시간에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그녀가 제 손안에 있으니 달래는 건 급한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함께할 날이 길고, 또 남는 건 시간이었다.
“그럼.”
황제가 다정하게 말했다.
“쉬고 있거라. 짐이 조금 있다가 다시 널 보러 오마.”
황제의 눈빛에선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백천범이 혐오가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자 황제는 결국 몸을 돌렸다.
백천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탁자를 짚고 천천히 앉았다. 영십삼이 곁에 없으니 지금부터는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해야 했다. 비록 최근 몇 년 동안 묵용감이 그녀를 잘 보호했지만, 그녀는 결코 응석받이가 아니었다. 곤경에 처했을 때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탁자 앞에 앉아서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원래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면 몽달과 동월의 병력 차이가 크기 때문에 자신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몽달 황제가 그녀를 미끼로 삼아서 묵용감을 잡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묵용감를 잡으면 동월 황후라는 그녀의 신분도 쓸모가 없어진다. 때문에 무엇보다 지금은 묵용감이 잡혔는지 안 잡혔는지 알아보는 게 제일 중요했다.
* * *
황제가 주전으로 돌아오자 난비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맞이했다.
“폐하, 백도탑에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신첩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짐은 괜찮소.”
이제 애지중지하는 여인이 생겼으니 그녀에 대한 황제의 태도가 어느새 시들해졌다. 그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난비의 귀에는 척연할 정도로 너무도 분명하게 들렸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
“폐하는 천자이시니 당연히 하늘이 보우하셨을 겁니다. 새로 온 자매가 많이 놀랐나요?”
황제는 난비가 백천범을 언급하는 게 언짢았다.
“그건 난비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소. 그녀는 괜찮소.”
난비는 황제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지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점점 애정이 줄어드는 과도기도 없이 이렇게 변하다니……. 남자의 감정이 변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천자는 모두 박정한 사람이라는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외모가 늙기도 전에 그녀는 버림받은 여인이 되고 말았다. 난비는 다시 한번 그에게 손을 내밀려 했지만 황제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하여 그녀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 않은 채 잔을 들어 우유차를 마셨다. 김이 모락모락 퍼져서 얼굴에 약간의 습기가 묻어났다. 그자가 돌아온 것을 알았을 때는 차도 밥도 맛이 없었고 밤잠도 설쳤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려웠는데 황송하게도 하늘은 은혜를 베풀어 백천범을 그의 곁으로 보내 주셨다.
그는 자신이 반드시 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역시나 백천범을 백도탑으로 데려가니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다. 환한 불빛이라는 말도 그저 우스갯소리가 된 것이다.
이제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이미 삼십여 년이 지났다. 지금의 그는 그때의 그가 아니며 당연히 그 사람도 당시의 그가 아니었다. 천하가 그의 것, 그 사람은 영원히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가 무슨 자격으로 그와 다투겠는가?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태자를 억제하기도 했지만, 태자에게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그는 태자가 반드시 그 사람을 잡을 거라고 믿었다. 그 사람을 잡고 나면 마음을 놓을 수 있다. 황제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오특민에게 물었다.
“아직 소식이 없느냐?”
오특민은 밖을 한번 내다보더니 대답했다.
“폐하,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아직 시간이 이릅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폐하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황제의 입가에 웃음기가 돌았다.
“태자는 짐에게 실망을 준 적이 없지. 이번에도 그러기를 바란다.”
평생 동안 그의 인생에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하나는 얻고 싶고, 하나는 망가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얻고 싶은 건 얻지 못했고, 망가뜨리고 싶은 것도 망가뜨리지 못했다. 만약 이번에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된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태자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 사람을 못 잡았느냐?”
태자가 무릎을 꿇고 고했다.
“소자, 무능하여 그자를 놓쳤습니다.”
황제의 마음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왜 못 잡았느냐? 잡을 수 있다고 짐에게 장담하지 않았느냐?”
태자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계획을 그리 주도면밀하게 세웠으나 중간에 변고가 너무 많았다. 설마 곤청락이 그런 상황에서도 득실을 따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비한 조직 외에도 또 다른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정예병들로 그의 병력을 일부 분산시켰다.
결국 두 패거리 모두 그의 코앞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태자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어서 곤청락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고, 결국 억울하다고 여긴 곤청락과 싸움이 벌어졌다. 아랫사람들은 감히 싸움을 말리지 못했고 결국 곤청락이 태자에게 한바탕 두들겨 맞는 걸 보고만 있었다.
호랑이를 산에 풀어놓고 돌아오니 어찌 겁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제는 겁이 나서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제 어쩐단 말이냐?”
황제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자 태자가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다시 얼마 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부들부들 떨고 의기소침한 모습이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 같았다. 태자는 자기도 모르게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황,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엔 도망가게 두었지만, 부황의 손아귀에 그 사람의 약점이 있으니…….”
태자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말을 하고 나서야 그 약점이 백천범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어쨌든 미끼로 삼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태자가 자신의 가벼운 입을 탓하는데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래, 짐의 손에 농화가 있구나. 농화를 위해서라도 그자는 다시 나타날 것이다.”
황제의 안색이 다시 붉어지고 눈에서 기이한 빛이 번뜩거렸다. 허공을 바라보며 흥분한 듯 황제는 한 번 더 되뇌었다.
“그자는 다시 나타날 거다.”
* * *
방 관리는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문가를 서성였지만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백도탑에서 돌아온 뒤, 주인은 혼자 있겠다며 방 안에 틀어박혀서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는 너무 걱정이 되었다.
어린 나이부터 주인을 모셨다. 그의 눈에 주인은 지혜롭고, 냉정하며, 웅대한 병법과 모략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천지에 우뚝 서 있는 큰 나무 같았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흔들렸다. 가면에 가려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방 관리는 그의 심적 동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의아했다. 그간 치욕을 참으며 삼십여 년을 기다린 건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주인의 신분이 드러날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계획 중지를 명한 건 백 번을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감히 항명할 수 없기에 치열한 몸싸움까지 하며 여기까지 돌아왔다. 그러나 희생이 너무 막심했다. 데려간 정예병도 절반이나 돌아오지 못했다.
누군가가 먼발치에서 고개를 내밀고 눈짓으로 물었다. 방 관리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도원곡 주인은 말없이 앉아서 방 안의 햇살이 물러가고 어둠이 내려앉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 자신의 심정과 같았다.
그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곤청리昆清璃 곁에 서 있던 여인은 놀랍게도 그녀였다.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머리를 망치로 두들긴 것 같았다. 도저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획을 중지한 건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껍질을 벗기고 살코기를 구워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여자이지만… 가장 급박한 순간에 보인 그의 반응은 역시 그녀의 안위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거듭 탄식을 쏟아냈다.
이게 다 업보로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했는데……. 가면 아래에서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는 태생이 자신과 상극인 걸까? 그녀만 나타나면 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 백도탑에서 본 여자는 분명 남류청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보양에 힘을 썼다고 해도 삼십여 년의 세월이 용모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럼 닮은 여인이었을 뿐인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닮을 수 있지?
손가락을 구부려 무릎을 두드리던 그는 실눈을 뜨며 기억을 되살렸다. 정말 너무 닮았다. 얼핏 보기에 삼십 년 전 남류청이 서 있는 줄 알 정도였다.
의자에 기대어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점점 냉정을 되찾았다. 그렇게 닮았다는 건 분명 남류청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혹시… 그녀의 딸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친 도원곡 주인은 별안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남류청이 돌아가서 또 딸을 낳았을까? 자신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놓고 다른 남자와 아이까지 낳았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들고 침울한 목소리로 불렀다.
“여봐라.”
문밖에 대기하던 방 관리가 부름을 듣고 얼른 답했다.
“주인, 분부하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도원곡 주인이 말했다.
“오늘 백도탑에서 곤청리 옆에 서 있던 여자… 봤느냐?”
방 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습니다.”
“그녀의 내력을 조사해라.”
“예, 소인이 곧 사람을 보내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방 관리는 발길을 돌리다가 주저하며 물었다.
“주인, 그 여인은…….”
도원곡 주인은 그가 무엇을 의아해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옛날에 알던 사람을 많이 닮았지. 곤청리가 그녀를 찾아내다니… 솔직히 깜짝 놀랐다.”
방 관리는 주인의 심사를 대충 알아차렸다.
“주인, 그러면 그 여인을 모셔올까요?”
도원곡 주인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일단 신원 파악이 먼저다.”
그때, 흑의인 한 사람이 들어와 아뢰었다.
“주인, 천선지인께서 오셨습니다.”
도원곡 주인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해독제를 달라고 왔군.”
방 관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는데… 염치도 없이 해독제를 달라고 오다니!”
도원곡 주인은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다.
“그가 염치없을 게 무엇인가? 그가 제일 잘하는 게 빈틈을 파고드는 것 아니던가.”
“아무리 그래도 황제라는 자가 떼를 쓰기 시작하더니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방 관리가 물었다.
“주인, 정말로 해독제를 원하면 주실 겁니까?”
도원곡 주인은 대답하지 않고 명했다.
“가서 모셔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