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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57)화 (957/1,192)

제957화

기영은 일을 처리할 때 많은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진한다. 당연히 상림군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다만, 상림군의 인원수가 많아 시간이 걸릴 뿐이다.

태자가 온 뒤에야 기영은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지만, 실내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화가 난 태자는 상림군 병사 하나를 호되게 발로 걷어찼다. 불을 지르지도 않았는데 이미 분위기는 어수선해졌다.

묵용감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단 위로 몸을 날렸다. 백천범의 곁을 지키려 했지만, 공중에서 커다란 그물이 떨어졌다. 묵용감이 놀라 몸을 피했고 겨우 그물 아래로 빠져나왔다.

땅에 떨어진 그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백성들의 몸에 부딪혔다. 아수라장이 된 이곳엔 법기, 깃발, 채색 끈이 여기저기 흩어져 나뒹굴었다. 사람들 발에 밟히니 정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묵용감이 품속에서 신호탄을 꺼내 하늘로 던지자 보라색 빛이 허공을 스쳐 지나갔다. 이를 본 모든 기영군이 즉시 높은 단상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몽달 황제는 충분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기영군이 영십일과 다른 호위들을 가두었다.

묵용감이 다시 단상에 올랐을 때, 그에게 맞선 건 기영이 아니라 철혈시위였다. 묵용감도 홀로 다섯을 상대하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백천범은 머리에 꽂힌 비녀를 뽑아 묵용감을 도와주려 했지만, 그 순간 그녀의 뒷목을 누군가 가격했다. 몽달의 황제가 그녀를 기절시킨 것이다. 몽달 황제는 그녀를 받아 안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묵용감은 백천범이 끌려가는 것을 빤히 보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태자가 다루에 뛰어들었을 때, 실내는 온통 난장판이었다. 땅바닥에는 여러 구의 시체가 누워 있었는데, 대부분 상림군이었다. 두세 구는 검은 옷 사내들이었는데 은색 가면을 쓴 것이 마치 기영처럼 보였지만, 가면을 벗기니 낯선 얼굴이었다. 태자는 이들이 바로 신비로운 조직이라는 걸 깨달았다.

안에서는 아직도 기영과 상림군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태자는 뒤쪽 벽에 큰 구멍이 뚫린 걸 보고 그들의 퇴로를 파악했다. 태자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뒤쫓았다.

구멍을 통과하자 밖은 좁은 골목이었다. 백성들은 벽 앞에 물건을 어지럽게 쌓아두곤 했는데 이미 그 물건들은 바닥에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흔적을 따라갔다. 마침내 앞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자가 달려가자 기영군도 그 뒤를 따라갔다.

태자가 처음 맞닥뜨린 사람은 육황자 곤청락이었다. 그는 상림군을 데리고 흑의를 입은 괴한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 흑의인들 뒤에는 흑색 장포를 입은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중 키가 큰 한 남자는 금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린 태자는 곧장 담벼락을 넘어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 남자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자 태자는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확신했다. 금색 가면을 쓴 사람은 바로 황제가 말한 그 사람이었다.

태자를 막아선 흑의인의 실력은 실로 대단했다. 태자가 잠시 낙담하던 순간 다행히 기영군이 제때에 도착했고 인원수가 많은 기영은 서서히 흑의인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원병이 끊임없이 달려왔기에 태자는 크게 기뻐하며 검을 들고 돌진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곤청락이 그를 막아섰다.

“태자 형님, 왜 이러십니까? 일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죠. 저 사람을 잡으면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접니까? 아니면 형님입니까?”

태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걸 따지고 있느냐? 비켜라! 일단 붙잡고 나서 얘기해라.”

“잡고 나서 얘기하면 너무 늦습니다.”

곤청락은 냉소만 짓고 물러서지 않았다. 황제는 그에게 태자와 함께 신비로운 조직을 찾으라고 했다. 그는 황제에게 간청해서 마침내 상림군을 손에 넣었다. 상림군은 비록 기영에 비해 약했지만, 대신 인원수가 많으니 태자와 맞서 싸울 수도 있었다. 가까스로 태자보다 앞서 나가고 있는데 어떻게 공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이 한참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모든 흑의인들이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태자와 육황자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시커먼 물건 몇 개가 공중에 던져졌다. 태자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외쳤다.

“어서 피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커먼 것이 허공에서 터졌고 거대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적지 않은 상림군과 기영군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 * *

백천범이 깨어났을 땐 이미 궁으로 돌아온 뒤였다. 눈을 뜨니 황제가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천범은 깜짝 놀라 얼른 일어나 앉았다.

“폐하, 왜 저를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너무 예뻐서 그런다.”

백천범은 그의 말이 너무 이상했다. 마음속에서 왠지 불길한 예감이 떠올라 그를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왜 저를 기절시켰죠?”

“누가 너를 빼앗아 갈까 봐 겁이 났단다.”

백천범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과연 황제는 묵용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냉랭하게 물었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농화야, 긴장하지 마라. 짐의 마음속에는 네가 제일 중요하단다. 짐은 아무도 널 다치게 하지 않을 거고 아무도 널 데려가지 못하게 할 거란다.”

“저는 떠날 겁니다. 저는 부군과 아이들이 있어요. 그들 곁으로 돌아갈 겁니다.”

“아니다. 농화야! 앞으로 너는 짐 곁에 있거라. 아무 데도 가지 마라. 짐이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너를 만났으니 짐 곁을 떠나면 안 된다.”

백천범은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지금 저를 알아보는 겁니까? 저를 당신 딸로 인정하십니까?”

황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의아한 듯 되물었다.

“누가 너를 짐의 딸이라 했느냐?”

백천범이 어안이 벙벙했다. 몽달 황제가 한 말들을 떠올려 봤을 때, 그녀는 그가 이미 인정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때가 되자 오히려 그녀는 담담해졌다.

“삼십삼 년 전 남원 여제가 몽달을 떠날 때 배 속에 아이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동월에서 아이를 낳았고, 남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그녀는 황제를 응시하며 물었다.

“설마 그 아이가 폐하의 핏줄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황제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넌 짐의 딸이 아니다. 그리고 짐의 딸이 아니기에 영원히 짐 곁에 있을 수 있다.”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백천범은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순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황제가 했던 말, 했던 일을 되짚어보았다. 무수한 기억의 조각이 뇌리를 떠돌았다. 탁자를 손으로 짚은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황제는 그녀가 자신의 딸이 아님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일부러 그럴듯하게 말한 이유는 그녀를 현혹하고 진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부녀인 것처럼 오인하게 해서 순순히 그와 백도탑에 가게 했다. 그녀가 가면 묵용감은 불을 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은 이미 성공했다. 백도탑이 불타오르지 않았으니 이제야 그가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고 파도처럼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녀와 묵용감이 잘못 생각했다. 그들 모두 틀렸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물었다.

“그럼, 폐하께서는 저의 생부가 누군지 아십니까?”

황제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도 모른다.”

그러나 백천범은 그의 말이 진실이 아님을 간파했다. 거짓을 말하는 자에게 좋게 대할 그녀가 아니었다.

“설마 여제가 사랑한 사람이 폐하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란 말입니까?”

황제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옛날 일은 다 지나갔으니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구나.”

순간 그는 또 얼굴에 환한 미소를 보였다.

“농화야, 짐을 따르거라. 짐은 네 어미보다 너에게 훨씬 더 잘해 줄 것이다.”

백천범은 도덕군자인 양 점잔을 빼는 그의 낯짝이 역겨웠다. 그녀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제 수행원은요?”

“그는 입궁하지 않았다.”

모두 황제가 꾸민 짓이다. 이번 기회를 빌려 영십삼과 백천범을 떼어 놓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백천범은 이제야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황제는 묵용감과 신비한 조직을 일망타진하고 그녀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물었다.

“저를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황제가 말했다.

“그때, 네 어머니를 나의 황후로 세우지 못했지. 그게 짐에게는 천추의 한이 되었다. 이제 하늘이 너를 보내 줬으니 평생 한을 풀려고 한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농화, 짐은 너를 황후로 삼겠다.”

백천범은 그가 이런 대답을 내놓을 거란 걸 짐작했지만, 마음속으론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직접 듣고 나니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한쪽 입가를 끌어올려 비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자격으로 날 원하지? 나의 부군이 누군지 알아요?”

황제는 백천범을 바라봤다. 그녀는 탁자 옆에 서서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청명한 눈빛에 만만치 않은 기세가 도는 게 꼭 그 당시 여제가 떠올랐다.

사실 그녀의 용모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것이 여제처럼 날카로워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줄곧 그녀가 여제보다 대하기 편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 모친에 그 딸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두 모녀가 똑같이 흉악하기가 그지없었다. 황제는 화를 누르며 좋은 말로 그녀를 달랬다.

“농화야, 짐도 이 일이 너무 갑작스럽다는 걸 알고 있다. 아마 금방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겠지. 네 아이들을 데려와도 된단다. 짐이 친자식처럼 대해 주마. 너의 부군에게는 짐이 미인을 여러 명 보내 주마. 분명 기분 좋게 받을 것이니…….”

백천범은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노망나셨습니까? 부군과 아이들은 둘째 치더라도, 저는 이렇게 젊고 폐하는 이렇게 늙었는데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이로 따지면 제 아버지뻘이십니다.”

황제는 그녀의 적나라한 비난에 얼굴이 붉어졌다.

“짐의 후궁들은 다 젊고 용모가 아름답다. 그녀들은 모두 짐의 여인이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짐은 천자이니라. 어찌 너랑 어울리지 않다는 것이냐?”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어울리지 않죠. 폐하는 늙고 못생겨서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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