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6화
백천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그녀를 백도탑으로 데려가려고 하지? 설마 묵용감의 신분을 알아차렸나?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자세히 훑어봤다. 어머니도 미인이었지만, 딸의 용모는 훨씬 더 수려했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물오른 부용처럼 예뻤고 화장을 하니 도리桃李처럼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백천범은 은근슬쩍 그의 의도를 떠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폐하께서 복을 기원하는데 왜 저를 데려가시는 거죠?”
황제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다 내보냈다.
“올해 서른셋이라고?”
백천범은 순간 심장이 쿵쾅거렸다. 황제가 먼저 나이 이야기를 꺼내다니! 이제야 부녀가 상봉하는 건가?
“예, 폐하.”
황제는 탄식을 쏟아냈다.
“짐은 네 어머니와 처음 만난 순간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단다. 바로 어제처럼 눈에 선한데 벌써 삼십여 년이나 지났다니, 정말 세월이 빠르구나.”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니가 떠난 지 삼십여 년이 흘렀고, 짐이 그녀를 그리워한 것도 삼십여 년이 넘었구나. 짐은 너무 기쁘단다. 하늘이 짐을 불쌍히 여겨서 널 짐에게 보내 준 거다. 짐이 아주 잘 챙겨 주마.”
그가 좀 쑥스러워하며 덧붙였다.
“짐이 너를 농아濃兒라고 불러도 되겠느냐?”
백천범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드디어 황제가 그녀를 딸로 인정한 거겠지? 근데 왠지 좀 애매하게 들리는데…….
아버지가 딸을 그렇게 부르는 게 안 될 건 없었지만, 묵용감에게서만 듣던 호칭을 들으니 좀 이상했다. 설령 그 사람이 아버지일지라도.
“폐하께서는 저를 농화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농화, 짐이 너를 백도탑에 데려가는 건 신의 은택을 받아서 너의 무사 평안을 기원하려는 것이다. 짐은 세상의 좋은 것은 다 너에게 주고 싶구나.”
황제는 눈시울도 붉어졌다. 그는 다소 감격한 것 같았다. 백천범도 마음속으로 약간 감동했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과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길 바랐다. 얼른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번에도 말을 끊고 침묵했다. 백천범이 먼저 입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오특민이 다가왔다.
“폐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여전히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일어서며 말했다.
“농화, 어서 가자.”
백천범은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녀는 일단 기회를 엿보며 상황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는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 수 있기에 방화를 찬성하지 않았다. 다만, 임무를 완수해야만 영십일의 해독제를 받을 수 있다. 그녀는 묵용감이 정도를 잘 지킬 거라 믿었다.
백도탑은 일찍이 모든 준비를 마쳤다. 다시 채색된 탑은 붉은색은 선명하고, 녹색은 짙푸르며, 금은색도 새로 칠해져서 휘황찬란하게 반짝거렸다. 계단마다 승려가 한 명씩 서 있었고, 길을 따라 올라가니 붉은색 승의들이 붉은 호를 이루었다. 흰 계단 위의 붉은 옷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계단 위에는 높은 단이 있었다. 그 위엔 네모난 큰 솥이 놓여 있었고 채색 깃발이 나부꼈다. 네 모서리에는 팔뚝 굵기의 백촉白燭을 태웠는데, 바람이 불어 촛불이 쉴 새 없이 흔들거렸다. 그래도 불꽃이 다시 되살아나기를 반복했다.
병기를 착용한 호위병들은 살의를 내뿜을까 봐 모두 멀리서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많은 암위를 배치했다. 일부는 백성들 사이에, 또 일부는 환관으로 둔갑해서 곳곳에 섞여 있었다.
황제의 마차가 천천히 다가오자 백성들은 거리 양쪽에서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맞이했다. 백천범은 창문 발을 살짝 걷고 몰래 밖을 내다보려고 했다. 묵용감에게 자신이 온 것을 빨리 알리고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차 밖에 있는 호위가 발을 내리며 작게 말했다.
“부인, 지금 발을 걷어 올리는 건 좋지 않습니다. 신께서 노하실 겁니다.”
결국 백천범은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는 장식을 정리했다. 그녀는 마차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수밖에 없었다.
백도탑의 맞은편 다루에서는 도원곡 주인이 마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다리 위에 놓인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삼십사 년 오 개월 여드레, 검은 머리칼이 희어질 때까지 기다린 끝에 드디어 이날을 맞이했다. 그가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묵용감이 정보를 흘려서 황제가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을 알고 있었다. 태자 곤청각이 모든 것을 안배했으니 황제는 불이 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테고, 묵용감 또한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금방 꺼질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모두 틀렸다. 가면 아래에서 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저들은 모두 틀렸다.
태자도 오늘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은테를 두른 흑색 장포에, 허리춤에는 고운 수를 놓은 허리끈을 맸는데 황제의 것보다 너비가 조금 좁았다. 머리카락은 똑같이 땋았지만, 관은 쓰지 않았다. 땋은 머리 위에 비취빛 옥비녀를 하나 꽂았을 뿐인데 화려함 속에서 운치가 느껴졌다.
명황색 우산 아래에 선 태자는 저 멀리 무릎을 꿇고 절하는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군중 속을 훑으며 그 사람을 찾고 있었다.
황제는 그 사람을 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껏 그 말의 의미를 계속 궁리했지만 결국 하나도 얻은 것이 없었다. 솔직히 그는 황제의 말에 회의감이 들었다. 자신은 그 사람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시선을 거두어 기영을 바라봤다. 기영군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똑바로 서 있었고, 얼굴에는 검은 복면을 한 채 예리한 눈빛만 보였다. 몸에서는 일종의 살기가 풍겨 나왔다. 그는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그 신비로운 조직이 머리를 내밀기만 한다면 절대로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몽달 백성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기영군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풍문에는 기영군은 하나하나가 모두 열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용사로, 영민하고 무공이 뛰어난 인재라고 했다. 심지어 오십 척 밖에서도 적군의 수급을 벨 수 있다고 했다. 예년에 비해 오늘 기영군이 몇 배나 많은 것도 일부 백성들의 수근거림을 부추겼다.
“기영이 총출동했나?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듣자 하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던데? 거리에 엄청 큰 물항아리가 여럿 놓여 있는 거 못 봤어?”
“맞아요. 상림군까지 얌전해졌으니 분명 무슨 큰일이 있는 거예요.”
“상림군이 아무리 예의 바르게 굴어도, 기영에는 절대 미치지 못하오. 저기 좀 보시오. 기영군은 하나같이 백양처럼 단단하고 곧게 서 있지 않소?”
다들 기영군을 바라보며 갑론을박을 이었다.
영십구는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는 게 매우 불쾌하지만, 뭐라고 화를 낼 수 없어서 속으로 냉소만 지을 뿐이었다. 기영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첩자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는데?
그와 영십일은 기영군에 몰래 잠입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육황자 곤청락의 도움이 있었다.
곤청락은 묵용감의 작은 계책에도 너무 순조롭게 넘어왔다. 사실 깃발만 태워도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그렇게 붙은 불이 얼마나 타오를 수 있는지는 그들의 소관이 아니었다. 이쪽이 시끄러울 때, 그들이 황궁에 잠입해 백천범을 데려올 계획이었다.
묵용감은 멀지 않은 곳, 어떤 집의 굴뚝 뒤에 숨어서 백도탑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문객을 통해 곤청락에게 오늘 신비로운 조직의 수장이 나타날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 곤청락이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공을 가로채기 위해 도원곡의 주인을 잡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육황자의 능력으론 도원곡의 주인을 잡진 못할 것이다. 아무리 잘해 봤자 타초경사로 도원곡 주인을 놀라게 해 억지로 끌어내려 할 터. 어쩌면 이때 몽달 황제와 도원곡 주인이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진 그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물을 흐리게 하려는 것뿐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진상이 드러날 테니까.
그는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두 대의 마차를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황제의 마차가 천천히 계단 아래에 서자 시종이 즉시 발을 걷었다. 또 다른 시종은 허리를 굽히고 서 있었다. 황제는 시종의 허리를 밟고 내려와 백성을 향해 뒤로 돌아섰다.
뒤편 마차 안에 있던 사람도 마차 밖으로 나왔다. 시야가 가려져 묵용감은 수놓인 꽃만 봤을 뿐이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궁비일지도 모른다.
도원곡 주인은 냉랭한 눈초리로 황제가 한 걸음 한 걸음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곁을 따라가는 여인이 보였지만,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도원곡의 주인도 벌떡 일어났다. 맹렬히 수축한 동공이 떨렸다. 그는 자신의 눈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녀가 여길?
어떻게 그녀가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창문가로 달려간 그의 눈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저 여인은 분명 삼십여 년 전의 그녀였다…….
묵용감 또한 백천범을 보고 놀랐지만 바로 냉정을 되찾았다. 백천범과 몽달 황제가 함께 백도탑에 나타났다는 건 몽달 황제가 그녀를 딸로 인정했다는 뜻인가?
그는 백천범이 나타나자 불을 지를 생각이 사라졌다. 그의 마음속에서 아내의 안위는 영원히 최우선이었다. 그는 절대로 백천범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다친다면 그는 오랫동안 마음이 아플 것이다.
도원곡 주인은 가늘게 떨리는 팔을 뻗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아래층에 있던 사람이 그것을 보자마자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윽고 묵용감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계획 중지!
묵용감은 백천범을 본 것보다 이 소식이 더 놀라웠다. 도원곡 주인이 이번 계획을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했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두 호랑이가 싸우는 모습을 보려 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을 중지하다니. 대체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모든 과정이 전부 다 순조로웠다. 그저 계획에서 백천범만 추가됐을 뿐인데. 설마 도원곡 주인이 백천범을 보고 계획을 멈춘 것일까?
그는 의심스러운 듯 다루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화살 한 자루가 허공을 뚫고 가더니 다루의 창문으로 파고들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도원곡 주인을 대신해 옆에 있던 검은 옷의 사내가 몸을 날렸다. 검은 옷 사내는 등에 화살을 맞았고 그 자리에서 숨이 끊겼다.
또 다른 검은 옷의 사람이 뛰어왔다. 그는 한 손으로 화살을 맞아 죽은 사내를 들어 그를 방패로 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인을 감싸고 뒤로 물러났다. 한 자루 한 자루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허공에 들린 검은 옷 사내는 이미 고슴도치가 되어 있었다. 아래층에서 기영군이 다루 대문 쪽으로 돌진했으나 뜻밖에도 상림군이 그들을 막았다.
“지금 다루 안에서 역적을 잡는 중이니 들어갈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