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5화
황제가 백천범을 숨긴 이유 중 절반은 난비가 그녀를 귀찮게 하리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비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했다. 기어코 백천범을 찾아내다니.
방금 그는 정말 화가 났다. 백천범이 저를 무시무시한 군왕으로 생각할까 봐 걱정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때려죽였을 것이다. 그는 풍우정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비는……. 그때 누군가 정자 밖에서 그에게 예를 취했다.
“부황.”
황제는 그를 바라보더니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각아, 무슨 일로 짐을 찾았느냐?”
태자는 직접적으로 묻기로 했다.
“부황, 소자가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얘기해 보거라. 무슨 일이냐?”
태자는 좌우를 둘러봤다.
“바람이 찹니다. 방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황제는 잠시 침묵하더니 계단을 내려와 난각으로 향했다. 태자는 황제를 대신해 문발을 걷고 황제가 들어가길 기다렸다. 태자는 문 앞을 지키는 보초에게 턱을 들어 올려 그들이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라고 명했다. 황제는 장포 자락을 걷어 올리고 편안히 앉아 태자를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하거라.”
황제가 자리를 허락하지 않자 태자는 선 상태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부황께서는 전 선생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황제는 당연히 태자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자가 여인이라는 건 알고 있느냐?”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자도 알고 있습니다.”
황제는 약간 놀라며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녀를 돌려달라고?”
“그렇습니다.”
황제는 오랜 시간 침묵했다. 실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압박감을 느낀 태자는 식은땀이 흘렀다. 어떤 일은 서로 잘 알고 있기에 더욱더 분명히 밝힐 수 없는 법이다. 태자가 그간의 일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줄곧 고심해서 하나의 해답을 얻었다. 남원 여제에 관한, 그리고 그의 출생에 관한 해답을…….
태자는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다 안으로 삼켰다. 그가 패를 뒤집으면 황제는 자신의 얼굴을 봐서라도 전 선생을 놓아줄까? 그때 황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각아, 짐의 손에 그 사람의 약점이 있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소자, 기억하고 있습니다.”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황께서 그 사람의 약점은 ‘어떤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태자는 뭔가 알아차린 듯 두 눈을 번쩍 떴다.
“부황의 말씀은 그럼…….”
“그렇다.”
황제가 말했다.
“그 약점이 바로 네가 전 선생이라 부르는 여인이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남농화藍濃華, 남원 여제의 딸이다.”
태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남농화와 그 사람이 무슨 관계입니까?”
“아주 대단한 관계지.”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태자는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그럼, 그녀는…….”
황제는 언짢아했다.
“짐이 데리고 있는데 뭐가 그리 불안한 것이냐?”
태자는 속으로 말했다.
‘폐하 곁에 있으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입니다.’
“부황, 남농화와 난비가 좀 닮지 않았습니까? 모르고 보면 자매인 줄 알겠습니다.”
황제는 흥 하고 비웃었다.
“그래? 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다만 난비께서는 좀 더 젊고, 남농화는 나이가 좀 많을 뿐이죠. 듣자니 서른셋이라더군요. 소자와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데 벌써 혼인도 해 아이도 낳았다고 합니다.”
그는 황제에게 백천범의 용모가 아름답지만, 결코 젊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혼인도 했고 아이도 낳았으니 총비가 되기에는 부적합했다. 황제는 조금 놀란 듯 대꾸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오히려 태자에게 반문했다.
“그녀 같은 아낙네가 이곳 몽달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부황께서는 그녀에게 물어본 적이 없습니까?”
태자가 말을 이었다.
“남원 여제의 딸이면 남원 공주인데… 한 나라의 공주가 사복을 입고 유람을 다닌다는 건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혹시 어떤 목적을 갖고 몽달에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를 잡아서 짐이 그녀에게 물어보겠다.”
태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다시 물었다.
“부황, 그녀를 이용해서 그 사람을 끌어낼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그럼… 그다음은요?”
“그 후?”
눈살을 찌푸린 채 태자를 바라보던 황제는 금세 웃는 표정을 했다.
“그 후의 일을 누가 알 수 있겠느냐?”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태자는 허공에 매달린 채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심정이었다. 한동안 말을 아끼던 태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소자, 부황의 확답을 듣고 싶습니다. 그 일이 끝나면 그녀가 살 수 있는 것입니까?”
황제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물론이다. 짐이 있는 한… 그녀는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태자가 용기를 내어 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때가 되면 부황께서는 그녀를 소자에게 돌려주시는 겁니까?”
황제는 그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돌려주다니? 그녀가 너의 것이냐?”
“아닙니다.”
태자는 황제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다만 그녀는 소자가 궁으로 데리고 들어온 자입니다. 그때 잠시만 이곳에서 지내기로 약속했습니다. 소자, 실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황제는 피곤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나중에 할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거라. 일단, 눈앞의 일을 살핀 다음에 의논해야지. 모레가 열여드레인데… 계획은 다 되었느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태자는 공수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소자가 반드시 잡겠습니다.”
황제는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자는 눈치 빠르게 예를 행하고 물러났다.
* * *
묵용감은 백도탑 맞은편에 있는 다루에 앉아 담담한 얼굴로 맞은편 사찰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십일이 별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그의 곁에 섰다.
“나리, 백도탑 사방에 수많은 보초들이 숨어 있습니다. 왼쪽에 우유차 노점을 차린 주인과 점원, 길거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거지, 벽에 기대어 있는 노역자… 이들이 전부 암초暗銷입니다. 그리고 참배를 하러 온 향객 중에도 섞여 있습니다.”
묵용감은 피식 웃었다.
“곤청각은 그래도 총명한 편인가 보군. 이 나리의 고심이 헛되지 않겠어.”
영십구가 물었다.
“나리, 정말 계획대로 행동합니까?”
“당연하지.”
묵용감이 말했다.
“곤청각이 사전에 준비만 철저하게 해 줬으면 화재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우리는 임무를 완수했으니 해독제를 주어야 하지. 지난번에도 줬으니 이번에도 주어야 할 것이다.”
“도원곡 주인이 직접 나올까요?”
묵용감은 이미 식어 버린 찻잔을 내려놓고 입가를 당겨 웃었다.
“올 거다. 두 원수가 드디어 만나야 할 때가 되었지.”
영십일은 무표정한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나리, 그날 혼잡한 틈을 타 궁에 가서 부인을 모셔오면 어떻습니까?”
백천범을 언급하자 묵용감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는 며칠 동안이나 백천범이 치는 북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녀가 궁에서 어찌 지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미 부녀 상봉을 했는지 아니면 아직도 말할 기회를 찾고 있는지. 왜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는 걸까?
그는 속으로 영십일이 낸 의견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우선 백천범을 데려와서 불안한 마음을 진정한 뒤에 계획을 세워도 늦지 않다. 만약 그녀가 아직 부녀 상봉을 하지 않았다면 먼저 수만 명의 대군으로 국경을 압박하고 그와 백천범의 정체를 밝히면 된다. 그러면 이렇게 숨고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다. 떳떳하게 진실을 말하면 된다.
남원 여제도, 몽달 황제도, 백천범만 원한다면 그는 그녀를 위해 뭐든 다 할 것이다.
그는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래 기다렸으니… 내일은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 * *
날이 채 밝기도 전, 곤히 자던 백천범은 시녀의 손에 의해 억지로 일어나야 했다. 탁자에는 커다란 등불이 활활 타오르며 방 안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어리둥절 눈을 뜬 그녀는 어제보다 시녀가 조금 더 많아진 걸 깨달았다. 그녀는 곧장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지금이 몇 시죠?”
“부인께 아룁니다. 지금은 초묘初卯(오전 5시) 일각입니다.”
“이렇게 일찍 깨우다니…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한 시녀가 대답했다.
“폐하께서 부인과 출궁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백천범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이른 시각에 출궁하다니. 그녀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 밖으로 내려와 시녀들이 그녀의 옷을 갈아입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 겹 또 한 겹… 치마와 상의를 걸쳤다. 모두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겉옷은 짙은 자줏빛이며 자수가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손바닥 너비의 허리띠였다. 금테를 두르고, 그 위에는 사람, 화초, 짐승 등이 가득 수놓아져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똑같은 모양이 없어서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옷을 다 입은 그녀는 의자에 앉아 머리를 빗고 화장을 했다. 머리 손질도 평소와 달랐다. 타래 머리를 높이 틀어 올렸고 금색 장식이 달린 보요를 꽂았다. 커다란 금빛 꽃송이가 촘촘하게 내려와 그녀의 눈썹을 가렸다.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금빛 물결이 출렁거렸다.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왜 이렇게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죠?”
시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의 분부이십니다.”
백천범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 오늘이 바로 섣달 열여드레였다.
섣달 열여드레는 몽달 백성들에게는 큰 명절이었다. 이날 하루는 황제가 성에서 향불을 가장 많이 피우는 사찰 백도탑에서 직접 향을 피우고 복을 기원한다. 모든 백성들도 총출동하여 사찰 주위에 무릎을 꿇고 축복을 빌면서 황제를 우러러본다. 하지만, 올해의 기원은 예년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열여드레, 제사 적당, 환한 불빛. 커다란 화재가 예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천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황제가 그녀를 백도탑으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그때 동경에 비친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 오늘 저를 데리고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황제의 옷차림도 화려했다. 금테를 두른 흑색의 장포에 허리에는 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머리카락도 굵게 땋아 있었다. 머리에는 옥관을 써서 군왕의 기상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궁중에서 답답해하는 것 같아서 짐이 널 데리고 나가려고 한다.”
“어디로요?”
“짐을 따라 사찰에 가서 기원을 드리는 게 어떠냐?”
“어느 사찰로 가죠?”
황제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백도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