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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54)화 (953/1,192)

제954화

내전으로 돌아온 난비는 황제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자 오특민에게 한바탕 화풀이를 했다. 그리곤 난로를 끼고 복도에 서서 찬바람을 맞았다.

금궁에서 가장 큰 궁전을 가진 황제에게 사람 한 명 숨기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봉황처럼 갸름한 눈을 가늘게 뜨고 왼쪽에 있는 아치문을 훑어봤다. 그곳은 황제의 침전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녀가 황제의 침전에서 묵을 때면 늘 지나는 곳이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에 있는 아치문은 평소에 지나다닐 일이 없었기에 어디로 통하는 곳인지 알지 못했다. 난비는 뒤따르던 시녀에게 물었다.

“저 아치문은 어디로 통하는 것이냐?”

그러자 시녀가 대답했다.

“마마께 아룁니다. 거기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처소가 있을 뿐입니다.”

“빈 처소?”

눈살을 찌푸린 난비는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 녹슨 철문을 밀었다. 철문 밖으로 청석을 깐 좁은 샛길이 나타났다. 거무스름한 담벼락을 보니 딱 봐도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을 것 같았다. 난비는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좁은 길을 보면서 들어가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녀는 궁 안에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은 다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그 여자는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혹시 황제가 그 여자를 이곳에 숨겼나?’

그녀가 문지방에 발을 내딛자 시녀는 우물거렸다.

“마마, 정말 들어가실 겁니까? 여긴 너무 으스스합니다.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난비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대낮인데 뭐가 무서운 것이냐?”

시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양쪽의 높은 담벼락이 시야를 가렸다. 회백색의 벽이 굽이굽이 이어져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어두컴컴한 곳을 왼쪽으로 걷다 다시 서쪽으로……. 아무리 봐도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난비는 이유 모를 기시감도 느껴져 겁도 났지만 이왕 들어온 거 끝까지 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가 눈앞에 휙 나타나더니 길을 가로막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검은 복면을 한 사내였다. 매서운 눈빛을 번뜩거리는 게 한눈에 봐도 무섭게 생긴 사내였다.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앞에는 길이 없으니 마마께서는 돌아가십시오.”

난비는 온종일 황제와 함께 있었기에 황제의 철혈시위영을 알고 있었다. 암위인 그들은 황제가 직접 관장하고 평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난비는 총비의 위세를 드러내며 앞을 가로막은 자를 노려봤다.

“네가 누군데 감히 본궁의 길을 막느냐?”

그자는 물러설 기색이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마, 어서 돌아가십시오.”

옆에 있던 시녀는 대뜸 호통쳤다.

“무엄하다! 이분은 난비 마마이시다.”

그러나 그 시위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냉랭한 얼굴을 한 채 앞을 가로막을 뿐이었다.

난비는 그들의 신분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들은 황제 외에는 누구에게도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만약 평소 같았으면 화를 내며 소리쳤을 텐데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시위영 사람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오직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 바로 황제가 그 여자를 이곳에 숨긴 것이다.

그녀는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 신발이 다 닳도록 찾아도 찾지 못했던 사람을 여기서 찾아내다니. 그 여자가 바로 코앞에 숨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반드시 그 여자를 만나야 했다. 난비가 손난로를 시녀에게 맡기더니 허리띠를 풀어냈다.

“마마, 이게 무슨…….”

난비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증인이 되거라. 이 사람이 본궁에게 무례를 범했느니라.”

태자 말이 맞았다. 여자는 한번 한을 품으면 못할 짓이 없었다. 아무리 철혈시위라도 난비처럼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인을 만나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난비는 원하는 대로 방 안에 숨어 있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 있던 백천범을 본 순간, 난비는 번개를 맞은 것처럼 아연실색했다. 방 안의 여인은 그녀와 친자매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닮아 있었다.

만약 그날 밤 황제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황제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녀가 저 여자를 닮은 대용품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난비가 백천범을 훑어보는 동안, 백천범도 그녀를 훑어보고 마찬가지로 놀랐다. 궁중에 어떻게 그녀와 이렇게 닮은 궁비가 있을 수 있을까? 설마 황제가 여제를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대용품을 찾은 것인가. 그녀가 남원에 갇혔을 때, 묵용감은 종종 현비를 만났다. 현비의 귀에도 그녀와 같은 위치에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비는 총비의 자태를 잃지 않고 백천범을 오만하게 바라보았다.

“당신이 폐하께서 숨겨 둔 여자인가요?”

그녀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백천범은 냉랭하게 물었다.

“누구시죠?”

시녀 또한 자기 주인처럼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분은 난비 마마이십니다. 어서 예를 갖추세요!”

백천범는 마음이 약간 움직였다. 이제 보니 이 사람이 바로 난비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난비가 왜 총애를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난비는 불쌍한 여자였다. 평생 다른 사람의 대역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백천범의 말투가 좀 누그러졌다.

“이제 보니 난비 마마셨군요. 어서 앉으세요.”

난비는 천천히 실내를 살폈다. 바깥은 삼엄했으나 안은 호화로웠다. 가구나 장식품 중에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곳곳에 쌓여 있는 금은보화까지……. 무엇보다 단순한 화려함을 떠나서 이 처소는 한눈에 봐도 정성껏 꾸며져 있었다. 모든 물건이 꼭 맞는 곳에 있어서 세심한 정성이 엿보였다.

황제는 난비에게도 좋은 물건을 자주 보내 주었다. 굳이 비교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한번 비교하기 시작하니 끝이 없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은 이곳에 있는 보석과 견줄 수 없을 정도의 하등품이었다.

난비는 손이 가는 대로 머리 비녀를 하나 들어 올렸다. 자신도 비슷한 비녀를 가지고 있지만, 그건 은비녀에 녹보綠寶를 박은 것이다. 이건 금비녀에 녹보가 달려 있었다. 녹보도 그녀의 비녀보다 훨씬 상등품이었다. 난비는 탁자 위에 비녀를 내던지며 냉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당신을 아주 후대하시는군요.”

백천범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대꾸했다.

“오해하셨어요. 폐하께서 저를 대하시는 건 마마께서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난비는 비웃음을 지었다.

“본궁이 뭘 오해했나요? 폐하께서 정예병까지 보내서 이곳을 지키고 있는데? 분명 본궁이 들어와 난리를 칠까 두려워서 그러셨겠죠. 게다가 이렇게 정교한 방은 물론이거니와 금은 장신구들을 무더기로 하사하셨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본궁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죠?”

백천범은 사건의 진상을 그녀에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시 다물었다. 자신은 할 말이 없었다. 황제가 아직 그녀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만일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우스갯소리만 되지 않겠는가?

“왜 대답이 없어요?”

의자에 앉은 난비는 그녀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백천범은 비록 난비를 동정했지만, 무례한 태도를 그대로 받아줄 수는 없었다. 백천범은 뜨거운 우유차 한 잔을 마실 뿐 그녀를 상대하진 않았다. 혼자 성질을 부리다 화가 난 난비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황궁의 규율을 잘 모르죠? 본궁이 가르쳐 줄게요.”

난비는 말로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시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건 새로 온 사람에게 본때를 보여 주는 일이었다. 시녀는 자신 있게 백천범에게 다가갔다.

백천범 주위에 있던 시녀들은 움찔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이 나서기도 전에 영십삼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의 매서운 눈빛에 그 시녀는 심장이 덜덜 떨려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난비는 이제야 영십삼의 존재를 눈치챘다. 왜 처소에 남자가 있는 것일까? 너무 이상한 상황이었다. 남자 시위의 호의를 받는 궁비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뭔가 이상했다.

“물러서라.”

영십삼이 그 시녀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시녀는 고개를 돌려 난비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난비를 측근에서 모시는 수석 시녀로 다른 이들과는 신분이 달랐다. 누구든 그녀 앞에선 웃는 얼굴을 하며 상냥하게 대했다. 그런데 감히 그녀에게 호통을 치다니!

영십삼은 물러나지 않은 시녀를 더 봐줄 수가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시녀의 목을 조른 채 뒤로 밀어냈다.

난비와 그녀가 데리고 온 아랫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황제의 곁을 지키는 철혈시위조차 감히 난비의 사람에게는 손을 댈 수 없는데… 저자는 간덩이가 부은 것이란 말인가? 난비는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탁자를 치며 일어났다.

“자, 감히 본궁에게도 그리할 것이냐!”

그때, 문 앞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감히 여기에서 건방지게 구는 것이냐!”

그 목소리에 놀란 난비는 몸을 돌렸다. 뒤를 돌자마자 무섭게 가라앉은 황제가 보였다.

난비는 지금 어떤 기분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입궐한 후, 지금까지 황제는 한 번도 차가운 말투로 말한 적 없었다. 언제나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모든 것을 다 들어줬다. 오늘 아침에도 크게 난리를 쳤지만, 그는 화내지 않고 조용히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녀는 황제가 그래도 그간의 정을 중시한다고 여겼는데, 지금은…….

“폐하.”

난비는 선제공격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곧장 영십삼을 가리켰다.

“신첩에게 불경을 저지른 저자를 혼내려던 참이었습니다.”

황제가 느릿느릿 걸어 들어오더니 물었다.

“저자가 무슨 불경을 저질렀단 말이오?”

“저자가…….”

난비는 억울한 듯 울먹거렸다.

“저자가 신첩을…….”

백천범이 비웃으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난비 마마께서는 우리가 다 눈먼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난비는 그녀를 노려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첩의 사람을 건드렸습니다.”

황제가 물었다.

“저자가 왜 비의 사람을 건드렸소?”

“왜냐하면…….”

난비는 조심스럽게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유리할지 망설인 것이다. 영십삼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고작 일개 시녀가 우리 부인께 궁궐 규율을 가르치려 하다니!”

이 말을 들은 황제는 난비 옆에 있던 시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게 누구냐?”

몇몇 시녀들은 황제의 노여운 모습에 놀라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갑자기 나타난 저 궁비를 혼내려던 것인데! 백천범을 혼쭐내려 했던 시녀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했다. 황제는 쉽게 그녀를 알아보았고 냉소적으로 명했다.

“여봐라. 저자를 끌고 가서 장살杖斃하라!”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백천범만이 의아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곧 자신이 그녀를 놀라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바꿨다.

“장형 이십 대로 바꾸거라. 죽고 사는 건 자신의 업보니라.”

난비는 부랴부랴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폐하,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맞아야 한다면 신첩이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

황제가 차갑게 내뱉었다.

“짐이 못 때릴 것 같소?”

말을 마친 황제는 소매를 뿌리치고 나가 버렸다. 난비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땅바닥에 나뒹구는 것 같았다. 시늉만 했을 뿐, 이 궁비에겐 손도 대지 못했는데! 자신의 시녀를 때려죽이겠다니. 황제의 애정에… 난비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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