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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53)화 (952/1,192)

제953화

백천범은 황제가 너무 감격해 그리 돌아간 거라 생각했다. 어떤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을 때도 있다. 그녀는 황제가 냉정을 찾으면 모든 게 제 생각대로 될 거라 믿었다.

이튿날 아침, 백천범은 여느 때처럼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장막을 걷어 올린 그녀는 깜짝 놀랐다.

장막 밖에는 시녀들이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천범은 뜻밖에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황제는 자신의 딸인 걸 깨닫고 이제야 공주 대접을 해 주려는 것일까?

“부인, 일어나셨습니까?”

맨 앞에 선 시녀는 분홍색 장막을 걷었다. 다른 한 명은 웅크리고 앉아 백천범에게 푹신한 신발을 신겨 주었다. 수석 시녀가 말했다.

“부인, 폐하께서 오늘부터 소인들이 부인을 모시라고 명하셨습니다.”

본래 이런 시중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십여 년 동안 황후로 살면서 어느 정도 적응한 후였다. 그녀는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고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빗고 화장을 했다. 마치 예전으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침 식사 또한 동궁에서 먹던 것보다 가짓수가 훨씬 더 많았다. 아기자기한 다과에 고소한 우유차도 빠지지 않았다. 백천범이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나요?”

시녀는 가볍게 대답했다.

“소인은 부인을 모시는 일만 해서 폐하의 행적은 잘 모르겠습니다.”

* * *

한편 황제는 백천범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난비의 눈물 바람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후궁의 여인은 쉬운 사람이 없었다. 오랫동안 총애를 받던 난비도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도처에 사람을 심어 두었다.

황제가 한 여자를 자기 궁전에 숨겨 놓았다는 소식은 그녀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직 제 나이가 한창인데 버림받는다고? 절대 그럴 순 없었다!

그녀는 원래 새로 온 여자를 몰래 만난 후 계획을 세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그녀를 꽁꽁 숨겨 둔 탓에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난비는 황제에게 직접 그 여인에 대해 물었다. 그는 사실을 부인하진 않았지만 난비에게 만남을 허락하진 않았다.

“폐하.”

난비는 무릎을 꿇고 앉아 슬피 울었다.

“폐하, 신첩을 쫓아내실 겁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를 애지중지하던 남자가 하루아침에 냉혹한 사람이 되다니. 사실 그녀는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지만, 질투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 것도 황제의 총애를 믿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황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새로 온 여자는 기껏해야 용모에서 우위를 점할 뿐, 어떻게 몇 년이나 황제와 함께한 자신과 비할 수 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자신과 황제는 정말 정이 깊이 든 사이였다.

하지만 황제는 칭얼거리는 난비를 보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었다. 그의 뇌리에 난비는 결코 떼를 쓰며 강짜를 부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에 상대를 배려하며 단정할 때는 단정한 모습을 보이고 애교를 부릴 땐 애교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성격만 따지자면 남류청보다 훨씬 나았다. 게다가 눈썹 사이도 남류청을 꽤 닮았다. 그는 난비를 정말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썩은 복숭아처럼 너무 못나 보였다. 이렇게 보니 남류청과 닮은 점을 단 한 구석도 찾을 수 없었다.

남류청은 한 번도 울면서 떼를 쓴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할 뿐.

삼십여 년 전, 이미 그는 자신이 다룰 수 없는 여인이라는 걸 알았다. 그 이유로 그녀가 유폐되었다는 걸 듣고도 데려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딸이 찾아왔다. 똑같은 얼굴이지만, 성격은 남류청이 젊었을 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그는 그녀의 혼을 꼭 빼놓는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니 다시 넋을 놓고 말았다.

난비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황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애처롭게 바라보았으나 황제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전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도 연민도 없었다. 그녀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정말 그의 감정이 바닥을 드러낸 것일까?

덜컥 겁이 난 그녀는 황제 앞으로 기어갔다. 겁에 질린 난비는 두 손으로 황제의 무릎을 짚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정말 신첩을 버리실 겁니까?”

황제는 시선을 내려 배꽃에 비가 내린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말 애처로워 보였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난비가 그에게 준 위로를 떠올렸다. 결국 마음이 약해진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짐이 어찌 비를 버리겠소? 그대는 짐의 애비愛妃가 아니오.”

난비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도저히 더는 행패를 부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눈물을 닦으며 그녀는 말했다.

“신첩이 너무 방자하게 굴었습니다. 새로운 자매가 입궁해서 신첩과 함께 폐하를 섬기는 것은 좋은 일이죠. 신첩이 폐하를 너무 사모한 나머지 폐하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서 충동적으로…….”

황제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짐은 다 알고 있소. 화나지 않았소. 이 얼굴 좀 보시오. 빨리 씻어야겠구려. 지금 이 모습은 별로 예쁘지 않소.”

황제가 체면을 세워 주니 난비는 얼른 상황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폐하, 신첩을 잠시만 기다려 주시어요. 얼른 가서 씻고 오겠습니다.”

황제는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그녀를 배웅했다. 난비가 문턱을 넘자마자 그는 느릿느릿 일어나 장포를 고쳐 입고 돌아섰다.

황제가 백천범에게 향했을 때, 그녀는 금빛 장신구 더미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인상을 쓴 그 모습까지 아름다워 보였다.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마음에 들지 않다면 다른 걸로 다시 보내라 하겠다.”

백천범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폐하.”

“원래는 더 일찍 보러 오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 지체되었구나.”

황제는 금빛 주화珠花가 한 송이 달린 장신구를 집어 들었다.

“이것도 마음에 안 드느냐?”

꾸미는 걸 싫어하는 여인은 없다. 백천범은 아직도 묵용감이 초왕 시절 주었던 비녀를 보배처럼 아꼈다. 하지만 그것 외에 이런 물건들은 그녀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백천범은 말했다.

“싫다는 게 아니라 너무 많습니다.”

황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것은 많을수록 좋지. 짐은 네가 매일매일 아름답게 꾸몄으면 좋겠다.”

예전에 묵용감이 보석을 산더미처럼 들고 왔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황제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아버지로서 딸이 매일 예쁘길 바라는 것이니 나쁜 건 아니었다. 황제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너는 어머니의 옷이 아주 잘 어울린단다. 그때 네 어머니도 지금 이 정도 나이였는데…….”

백천범이 그의 말을 끊었다.

“폐하, 저는 이미 서른이 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스무 살도 안 되셨어요.”

그녀는 황제에게 자신의 나이를 일깨우고 싶었다.

“넌 아무리 봐도 서른 살 먹은 사람 같지 않구나.”

황제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짐의 눈에는 스무 살 남짓으로 보이는데? 당분간은 어머니 옷을 입거라. 짐이 옷을 만드는 직조처織造處에 새 옷을 만들어 주라고 분부했다. 직조처에서 치수를 재 갔느냐?”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그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 오래 있을 수 없으니 옷을 만들 필요는 없어요.”

순간 황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딜 간다는 것이냐?”

묵용감을 포함해서 대개 모든 군왕은 변덕스러웠다. 몽달 황제가 급변했을 때도 백천범은 놀라지 않았다. 황제는 몽달에 오래 있지 못한다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난 것이었고, 그녀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몽달 황제는 부녀 관계를 인정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 테다. 여제가 살던 방을 그녀에게 주고, 곁에 시종까지 붙여 주었다. 그녀에게 좋은 것들은 다 주려 하며 그녀가 떠나는 것은 아쉬워했다. 그저 부녀 관계임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았을 뿐.

* * *

황제는 그녀에게 좋은 물건들을 많이 선물해 주었다. 상자 안에 다 담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가 준 것들은 탁자 위를 포함해 방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었다. 방 안이 어두컴컴한데도 황제가 준 것들은 반짝거리며 빛났다.

백천범은 진주나 보석이 휘황하게 빛나는 방에 앉아 있어도 무료함을 참을 수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나가니 두 명의 보초가 서 있었다. 그녀는 영십삼에게 눈빛을 전했다. 두 사람이 함께 문밖을 나가려고 하자 보초들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인, 폐하께서 명이 있으셨습니다. 부인의 안전을 위해 함부로 문을 나서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백천범이 반문했다.

“궁 안에 무슨 위험이 있단 말인가요? 누군가 저를 적대시한단 말인가요?”

보초 한 명이 대답했다.

“소인은 명령에 복종할 뿐입니다. 부인께서는 부디 소인을 난처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백천범이 헛기침을 하자 영십삼이 보초를 밀어냈다. 하지만, 백천범은 결국 문턱을 넘지 못했다. 순식간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은 매서운 두 눈만 반짝였다.

영십삼이 그대로 앞으로 나가려고 하자 백천범이 그를 붙잡았다. 비록 그녀가 최근 몇 년 동안 귀한 대접을 받고 풍족하게 살았지만, 어릴 적부터 길러온 경각심을 잃지는 않았다. 저 남자들에게서 분명 살기가 느껴졌다. 영십삼이 목숨을 걸고 덤벼도 승산이 없었다.

이건 보호일까? 연금일까. 그녀의 마음속에 조금씩 의심이 일었다.

* * *

한편, 태자는 백천범의 소식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궁 안에서 황제가 난비를 총애하는 이유에 대해 아는 이는 태자뿐이었다. 난비가 남원의 여제를 닮았기 때문에 황제는 난비를 총애한 것이다.

황제는 외가 인척이 없는 태자를 어렸을 때부터 각별히 사랑하며 옆에 두었다. 황제의 옆을 머물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여제의 초상화를 보게 된 것이다. 그 앞에서 눈물 흘리던 황제의 모습 또한.

그때부터 그는 초상화 속의 여인이 그의 생모라고 생각했다. 계후가 들보에 목을 매고 자살했다는 소문은 여제가 몽달을 떠난 것을 숨기기 위한 거짓일 뿐이리라.

열심히 그림을 배운 그는 몇 년에 걸쳐 그 그림을 모사하여 자신의 밀실에 걸어 두었다. 나중에서야 그 여인이 남원 여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생모가 남원 여제가 맞는지 확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남원 여제에 대한 황제의 감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전 선생은 비록 남자지만 용모는 여제를 꼭 닮아 있었다. 게다가 문약하게 생겼기에 별생각을 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 안에서 서성거리는 태자 앞에 총관이 다가와 몇 마디 속삭였다. 태자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해 보였다.

“그게 정말이냐? 확실한 것이냐? 그자가 여자였다고?”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순자東順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동순자는 황제 곁을 지키는 환관이었지만, 이미 태자에게 포섭된 상태였다. 태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자는 단순히 여자일 뿐만 아니라 여제의 딸이기도 했다. 만약 여제가 그의 어머니라면… 그녀는 바로 그의 누이가 된다. 어떻게 자신의 누이를 황제 곁에 둘 수 있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태자는 명을 내렸다.

“사람을 보내서 난비를 주시하라고 명하거라. 하나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그는 전 선생을 찾지 못했지만, 어쩌면 난비는 찾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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