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2화
“왜?”
황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짐은 황제이기 때문이지. 강산과 사직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네. 그래 봤자 여인 한 명일 뿐. 그녀가 가고 싶다면 붙잡을 필요 없다고 생각했네.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짐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았지. 그녀를 곁에 잡아 두지 않은 게 평생의 한이네.”
백천범은 여제를 잘 알고 있었다. 야심 있는 그녀는 한 나라의 황후로 만족할 리 없었다. 그녀의 목표는 천하의 제왕이 되는 것이었다. 너무 강한 두 사람이 만났으니 결국 아득히 먼 곳에서 떨어져 지낸 거겠지.
여제에게는 여러 명의 부마가 있었고, 몽달 황제에게도 궁비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들 마음속에선 서로가 가장 그리운 사람이었으리라.
백천범은 하늘 아래 모든 연인이 행복하길 바랐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함께하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하지만… 황실에서는 사랑을 황권에 양보해야 했다.
그녀는 몽달 황제와 남원 여제의 불행에 탄식했다. 그리고 묵용감을 만난 자신의 행운에 감사했다. 만약 천하에 강산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사람이 정말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의 부군인 묵용감일 것이다.
대화가 여기까지 오니 진실까진 한 발짝밖에 남지 않았다. 백천범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다. 다만 현재 동월과 몽달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고민에 빠져 있는데 문득 황제가 입을 열었다.
“선생은 분명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네. 짐이 왜 이런 이야기를 선생께 하는지.”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그건 선생이 그녀를 많이 닮았기 때문이네.”
백천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폐하, 사실 소인은…….”
황제는 오히려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입을 막았다.
“짐이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는데… 선생이 승낙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말씀하십시오. 소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제는 벽 쪽에 있는 장목 상자를 가리켰다.
“저곳에 들어있는 건 다 그녀의 옷이네. 선생이 그 옷으로 갈아입고 짐이 앓고 있는 상사相思의 고통을 해소해 줄 수 있겠는가?”
그 말을 들은 백천범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황제가 이런 요구를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제가 그녀의 반응을 보고 조금 민망한지 덧붙였다.
“짐의 부탁이 너무 황당하다는 걸 알지만, 짐은 오늘 선생을 보자마자 이 소망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네. 선생이 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황당한 건 사실이었지만 백천범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움은 병이 되어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저를 치유하고자 했다.
다 늙은 황제는 머리가 다 희어지고 주름살이 가득했지만 사랑은 여전했다. 더구나 그는 그녀의 생부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천천히 장목 상자 앞으로 간 그녀는 뚜껑을 열고 연보라색 의상을 골랐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여제는 보라색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이런 귀한 색깔만이 그녀와 어울린다고 여겼다.
백천범은 옆방에서 치마를 갈아입고 동경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얼굴에 바른 것을 닦고 여자라는 사실을 밝힐까 말까 망설여졌다.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황제는 더욱 초조해져 갔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남자가 난생처음 치마를 입는데 당연히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얼마나 민망하겠는가? 그 심정을 이해하니 황제는 참을성 있게 계속 기다렸다.
그가 도무지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됐을 때, 마침내 백천범이 돌아왔다. 전 선생은 쑥스러운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치마는 꼭 처음부터 전 선생을 위한 옷인 것 같았다. 치맛자락을 바닥에 끌며 느릿느릿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 꼭 아름다운 여인 같았다. 분명 남자임을 알면서도 황제의 마음은 두근거렸다.
“고개를 들어 짐을 보시게.”
백천범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백천범 주위를 한 바퀴 빙 돌기 시작했다. 그리곤 틀어올린 머리카락을 고정하는 비녀를 뽑았다. 흑단처럼 검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늘어졌다.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더욱더 희고 작게 느껴졌다.
황제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바라본 끝에 이상한 곳을 찾아냈다. 그건 바로 눈에 거슬리는 커다란 점이었다. 그는 점을 가려 보려고 손가락을 뻗었다.
깜짝 놀란 백천범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하필 그 점은 황제의 손가락에 부딪혔다. 백천범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지만 황제의 손가락은 여전히 허공에 멈춰 있었다. 그는 제 손가락에 묻은 검은 먹 자국을 바라보았다. 방 안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만 갔다. 백천범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참 뒤에 황제가 물었다.
“이게 뭔가?”
“…….”
“손을 치우게.”
백천범은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손을 뗐다. 점은 흐릿해졌고 그 뒤로 그녀의 깨끗한 피부가 드러났다. 황제는 원래 점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곧장 짙는 두 눈썹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벽 쪽에 있는 대야를 가리키며 말했다.
“얼굴을 깨끗하게 씻게.”
백천범은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힐끔 바라볼 뿐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짐이 직접 닦아 주기를 바라는가?”
백천범은 입술을 깨물고 말없이 대야가 있는 쪽으로 갔다. 수건을 가지고 와서 물속에 비볐다.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물에 젖은 수건이 얼굴을 덮었을 때, 백천범은 한기에 몸서리를 치며 무섭게 뛰는 심장을 달랬다. 짙은 눈썹까지 닦아 낸 그녀는 수건을 있던 곳에 걸어 놓고 몸을 돌렸다.
세수를 한 그녀를 보자마자 황제는 경악했다. 처음부터 전 선생을 보자마자 여제가 떠올랐고, 치마를 입었을 땐 무척이나 친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세수를 한 저 얼굴은 그가 기억하는 여제와 똑 닮아 있었다. 눈동자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닮지 않은 데가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넋을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긴장한 상태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황제에게 다가갔다.
“폐하.”
황제는 얼떨떨해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돌아온 거요?”
황제가 그녀를 여제로 생각하고 있자 백천범이 입을 열었다.
“저는 폐하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황제의 눈동자가 점점 맑아지더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남원 여제와 무슨 사이인가?”
이렇게 닮았으니 관계가 없을 리가 없었다. 백천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숨겨둔 패를 뒤집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긴장한 마음을 달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남원 여제는 저를 낳아 주신 어머니이십니다.”
황제는 눈을 크게 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사실을 확인하니 충격이 컸다. 하나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인연인가. 삼십삼 년 전에는 여제와 만났고 지금은 그녀의 딸을 만나고 있으니 말이다. 의자 옆까지 물러난 황제는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딸이었구나. 어쩐지 닮았다 했어. 정말 네 어머니와 똑같구나…….”
백천범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생부와의 첫 만남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황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녀의 등장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는 떨리는 눈빛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설렘, 놀람, 경악, 당황함 그리고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그의 얼굴에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약간 흥분한 백천범은 조용히 물었다.
“폐하께서는 저의 어머니를 아십니까?”
여전히 황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여제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지금과 똑같은 놀라움과 감탄이 가득했다. 삼십여 년이나 세월이 흘렀지만, 늙어버린 심장은 젊었을 때처럼 맹렬하게 뛰고 있었다. 하늘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녀를 다시 데려온 것인가?
“그저 알 뿐인가?”
황제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네 어머니는 한때 이곳에서 지냈다.”
백천범은 그가 자신을 알아보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지 다른 이야기만 했다.
“이름이 무엇인가?”
그의 물음에 백천범은 잠시 주저했다. 그녀는 동월의 황후였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보다 부군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
“제 이름은 남농화藍濃華입니다.”
그녀는 단령丹靈 공주의 이름을 사용했다. 그를 속일 생각은 없었지만 동월 황제를 위해서라도 실명을 알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동월의 황후라는 걸 알게 되면 또 그녀를 이용해 묵용감을 협박할지도 모른다. 이미 어미에게서 본 전례가 있지 않은가. 황제는 의심하지 않았다. 남원에서 황족만이 남씨 성을 쓸 수 있었다.
“어머니는 잘 계시는가?”
여제를 언급하자 백천범의 말투가 냉담해졌다.
“아마 그럴 거예요.”
황제는 그녀의 말투가 변한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성격상 제위에 있지 않아서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네.”
그해 동월의 간섭으로 남원 여제가 유폐되고 남제화가 제위에 올랐다. 비록 남원과 몽달은 동월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몇 년 뒤 그 소식은 그의 귀에도 전해졌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몽달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단념했다. 자신이 여전히 여제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
그런데 지금 그녀의 딸이 몽달에 왔다. 그녀는 이미 서른셋의 나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보기엔 스무 살처럼 보였다. 마치 여제가 삼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백천범은 황제가 그녀를 바라보며 넋을 놓자 그를 불렀다.
“폐하.”
황제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계속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그의 불타오르는 눈빛이 매우 거북했다. 묵용감을 제외하고는 다른 남자가 그녀를 이렇게 바라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어, 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황제는 급히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으니 일찍 쉬시게. 내일 짐이 다시 들르겠네.”
그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돌아가 버렸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백천범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드디어 부녀가 상봉하는 줄로만 알았건만. 그냥 저렇게 가 버리다니.
황제가 떠나는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온 영십삼은 백천범의 차림새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이것으로 부녀상봉이 이루어진 건가?
백천범의 영십삼의 의혹이 가득한 시선을 알아채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봤을 때 몽달 황제가 자신의 생부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