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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51)화 (950/1,192)

제951화

사실 이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다만, 황성을 태우려 한다는 생각에 미처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다. 황제만이 그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기 때문에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태자가 의아해서 반문했다.

“그 사람은 왜 이런 정보를 미리 다 흘린 겁니까? 계획이 실패할까 봐 두렵지 않은 겁니까?”

황제가 말했다.

“그건 그자가 건방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황, 안심하십시오. 소자가 절대 그의 계획을 성공할 수 없게 할 겁니다.”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자가 의아해하며 다시 반문했다.

“그자는 계획을 포기할 것이다.”

황제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말했지만, 태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지금껏 너무 많은 일을 저질렀다. 신수의 분신, 쌍두양, 군마 강탈, 주루 화재, 모두 마지막 계획을 위한 포석 아니던가? 그자가 어떻게 그 일을 포기하겠는가?

“부황,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누구나 약점은 있는 법이다. 짐은 그자의 약점을 잡았다.”

태자는 눈빛을 반짝였다.

“부황께서 그자의 약점을 손에 넣으셨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사람이다.”

“그게 누구입니까?”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황제가 이미 계획을 세운 것 같은 모습을 보이자 태자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머뭇거리다 넌지시 물었다.

“부황, 전 선생이 여기 오지 않았습니까?”

“음…….”

황제는 의자에 기대어 느릿느릿 말했다.

“그는 짐의 거처에 며칠 묵을 예정이다. 당분간은 동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태자는 뜻밖이었다.

“부황께서 그를 데리고 있겠다니, 그건…….”

“그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고 하니 짐 역시 바깥세상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런다.”

태자는 듣자마자 핑계라는 걸 알아차렸다. 애당초 그도 이런 핑계를 대고 백천범을 곤청락에게서 빼앗아 온 것 아닌가. 그가 두 사람의 만남을 막은 건 바로 이런 상황이 올까 봐 두려워서였다.

백천범은 난비보다 훨씬 더 그림 속 여인을 빼닮았다. 황제가 백천범을 어떻게 할 생각인지 태자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백천범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전 선생을 데리고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황, 소자가 전 선생을 잠깐 만나고 싶습니다. 몇 가지 해 줄 말이 있습니다.”

황제는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말이냐? 짐이 대신 전해 주마.”

태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나지도 못하게 하다니! 설마 황제가 백천범을 옥에 가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태자는 속이 타들어 갔지만, 얼굴엔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럼, 부황께서 전 선생에게 전해 주십시오. 소자가 또 다른 북을 찾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의 북 연주를 듣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입니다.”

황제는 뜻밖이었다.

“그자가 북 연주를 좋아하는가?”

“네, 전 선생은 동궁에 있을 때 매일 북을 쳤습니다.”

황제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문약하게 생겼는데 북 치는 것을 좋아할 줄은 몰랐구나.”

백천범을 만날 수 없으니 태자도 더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읍하고 물러갔다.

* * *

영십삼은 복도에 서 있었다. 그는 황실 시위 중에서도 특출 난 인재로서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민감한 감각을 지녔다. 눈에는 수비 병사 두 명만 보였지만 이미 이곳은 철옹성처럼 둘러싸여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람은 불지만,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익숙한 동류의 기운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황제가 백천범을 연금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인가. 혹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가? 어쨌든 백천범은 동월의 황후였다. 적국의 황후라는 그녀의 신분이 그들의 가족애를 가로막는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그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백천범이 그를 바라보자 영십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나갈 수 없습니다.”

백천범은 아름다운 꽃이 수놓아진 담요를 바라보았다. 푹신푹신하고 두툼해서 밟으면 발이 움푹 들어갔다. 긴 털이 발등을 거의 덮을 지경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은 그녀가 상상했던 게 아니었다. 황제가 그녀에게 여제에 대해 물어본 이유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서로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이곳에 가둬 버렸다.

방 안에는 뭐든 없는 게 없었다. 벽 쪽에는 장목으로 만든 커다란 상자가 있고, 서랍이 다섯 개나 달린 옷장도 있었다. 예쁜 장신구가 쌓여 있는 화장대와 뒤편에는 꽃이 조각되어 있는 침대도 있었다.

그녀가 걸상에 앉자 자단목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탁자 위에는 알록달록한 다과가 놓여 있었고, 백자 주전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유차가 담겨 있었다.

백천범은 하나씩 자세하게 훑어보았다. 곳곳이 모두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황제가 그녀에게 악의를 가진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곳은 아주 안락하고 화려한 새장 같았다.

그녀는 가만히 사색에 잠겼다. 황제가 그녀를 데리고 온 건 즉흥적인 일이었다. 일부러 그녀를 위해 만든 장소는 아니었다. 그리고 여긴 분명 여자가 지내는 거처였다. 어쩌면 황제의 비가 머물렀던 곳 아닐까?

그녀는 다시 방 안의 가구와 장식품을 훑어보다가 벽 위에 시선을 멈췄다. 벽엔 조롱박 모양의 물건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 물건을 잡았다. 그건 남원 고유의 악기인 호로사였다.

그녀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설마 여기가 바로 여제가 지냈던 거처인가? 그녀가 벽 쪽으로 걸어가서 장목 상자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화려한 의복이 가득했다. 대부분 몽달 의상이었지만 궤짝 바닥에 남원에서 입는 통치마가 나왔다. 딱 보기에도 색이 칙칙하게 변한 오래된 옷이었다. 그녀는 그 치마를 꼭 껴안고 상자 옆에 기대어 멍하니 넋을 놓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가 느릿느릿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백천범은 일어나 예를 취했다.

“소인, 폐하를 뵈옵니다.”

“너무 예를 차릴 필요 없네.”

황제는 허허 웃으며 직접 그녀를 부축해서 반대편 의자에 앉혔다.

“여기서 지내는 게 어떤가? 괜찮은가?”

백천범은 공손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황제는 방 안을 훑어보며 말했다.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이곳은 여자가 지내던 거처네.”

“네, 소인도 알고 있습니다.”

“선생은 짐이 왜 선생을 이 방에 데려왔는지 의아하지 않나?”

백천범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분명 남자로 변장 중이었다. 그런데 왜 여자가 지내던 방으로 안내한 것일까? 그녀가 여인의 몸이라는 것을 이미 아는 건가? 아니면 그녀와 여제의 관계를 아는 건가?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지난번에 선생이 남원에 다녀오셨다 말하지 않았는가?”

“예, 폐하. 그렇게 말했습니다.”

백천범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이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는 걸까? 황제는 영십삼을 바라보며 명했다.

“넌 나가 있거라.”

영십삼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백천범을 지키겠다고 한 건 그와 묵용감의 약속이었다.

황제는 의아했다. 지금까지 그의 말을 거역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이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단 말인가? 그가 안색을 굳히자 백천범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폐하,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소인이 말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영십삼을 한쪽으로 끌어당겨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으니 잠시 문 앞에 서 있어요. 난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영십삼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문 앞에 기립했다. 문짝 하나를 사이에 뒀으니 백천범을 보호할 자신이 있었다. 황제는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더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백천범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할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소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황제는 짧게 소리를 내곤 말했다.

“정말 닮았군.”

“소인이 누구를 닮았다는 말입니까?”

“남원에 가 봤다고 했지? 남원 여제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가?”

백천범은 심장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목소리까지 약간 불안하게 떨렸다.

“들어본 적 있습니다.”

황제는 의외라는 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남원 여제가 물러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자네처럼 나이 어린 사람이 그녀에 대해 들어봤다고?”

백천범이 대답했다.

“소인, 이미 이립의 나이가 지났으니 당연히 여제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황제는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했다.

“짐은 정말 몰라봤네. 선생이 벌써 이립의 나이를 넘었다니.”

백천범은 자신의 나이가 그에게 다른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인은 올해 서른셋입니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 하고 대꾸했다.

“벌써 서른셋이나 되었는가.”

순간, 그의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눈빛이 아득해지며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 표정은 슬픔에 잠겼다. 백천범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그가 정말 자신의 생부가 맞을까? 정말 이 사람일까? 한참 뒤에 황제는 한숨까지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정말 세월이 빠르구나. 어느새 삼십삼 년이나 되었다니. 그 해는…….”

백천범은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황제는 탄식만 내뱉을 뿐이었다. 그가 더 이상 말을 않자 그녀가 물었다.

“그 해에 폐하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황제는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던지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해에 짐은 여인을 한 명 만났었네.”

백천범의 눈가에 얕은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께서 사랑하셨던 여인입니까?”

이런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려 했지만 황제는 전 선생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걸 보았다. 가냘프게 떨리는 눈빛이 그 여인과 너무 닮아 황제는 넋을 잃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 짐은 그녀를 사랑하였다. 그래서 이번 생에는 더 이상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지.”

백천범이 말했다.

“폐하는 정이 깊으신 분이군요.”

“꽤 오랜 가슴앓이였네.”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 번 준 마음이 삼십삼 년을 갔으니.”

백천범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폐하께서 사랑했던 여인은 폐하를 떠나셨습니까?”

“떠났다네.”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폐하께서는 왜 그녀를 찾아가지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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