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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50)화 (949/1,192)

제950화

황제는 여전히 멍하니 반응이 없었다. 난비가 불쾌한 듯 말했다.

“불이 났으면 얼른 사람들을 시켜서 끄면 되지. 야심한 밤에 폐하를 깨워서 어쩌자는 거예요?”

정신을 차린 황제는 가늘게 눈을 떴다. 그는 장막을 젖히고 나와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패륜이성에 불이 났다니! 오늘은 열여드레가 아니지 않느냐? 아직 날짜가 안 됐는데 어떻게… 불길이 센가?”

“태자 전하께서 화재를 진압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 폐하께 만사를 조심하시라고 전하셨습니다.”

황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빨리 왔단 말인가?”

그가 별안간 허둥대며 소리쳤다.

“빨리! 짐의 뜻을 전하라! 기영군을 보내 궁문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하라. 누구도 성안에 들여보내지 말라 전해! 파리 한 마리도 날아 들어오지 못하게!”

난비와 오특민은 황제에게 더 눈을 붙일 것을 권했다. 하지만 황제가 어찌 잠을 잘 수 있겠는가. 그는 피곤한 맹수처럼 새빨간 눈을 뜨고 반백인 머리카락을 엉클어뜨린 채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난비는 그에게 애정은 느끼지 못했지만 최소한 그를 경외하긴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냥 겁에 질린 늙은이일 뿐이었다. 군왕의 위엄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그녀는 속으로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날이 밝자 마침내 소식이 전해졌다. 화재는 모두 진화되었고 다행히 주루 한 채만 태웠을 뿐 피해는 크지 않았다. 인명 피해도 없었다.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은 결과였다. 황제는 보고를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황성을 불태운다는 것이 고작 이런 건가? 이건 그자의 방식이 아닌데?

“아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리가 없다…….”

“폐하.”

난비가 조용히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가 잘못됐습니까?”

황제는 그녀를 보곤 순간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애비愛妃는 짐과 함께 있느라 한밤중에 깨서 잠도 못 잤군. 수고가 많았소. 어서 들어가 쉬시오.”

그는 본래 그녀에게 온화했다. 예전에 난비라면 그녀에게만 보이는 온화함에 흡족해했겠지만 지금은 그게 거짓이란 걸 알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황제는 그녀를 총애하는 척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걸 철석같이 믿고 우쭐거렸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자신이 줄곧 누군가의 대용품이란 걸 알았다.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은 그녀는 자신의 침궁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침의를 입고 침대 가장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평소와 달리 난비를 배웅하지도 않고 한참을 침묵한 채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오阿烏, 네가 짐의 곁에 얼마나 있었지?”

오특민이 대답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이미 삼십삼 년이 넘었습니다.”

“그렇게 오래되었느냐?”

황제는 탄식하며 한숨을 내쉬다가 또 금방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면 충분하지.”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오특민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 날이 차츰 밝아왔다.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오는 빛이 어두워 새벽인데도 마치 저녁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멍하니 앉아 있는 황제를 보며 오특민이 입을 열었다.

“폐하, 소인이 옷을 갈아입혀 드리겠습니다.”

황제는 말없이 일어나 오특민의 시중을 받았다. 시녀가 물을 들고 들어와 황제의 세안을 도왔다. 오특민은 아침 식사를 차렸지만, 황제는 입맛이 없어서 대충 몇 입 먹고 그만 치우라 명했다.

그는 뒷짐을 지고 겹겹이 세워져 있는 궁전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랐고, 이곳의 황제가 되었다. 훗날 그의 후손들 역시 이곳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자가 왔다. 결국 그자가 왔구나……. 황제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뒷짐을 지고 밖으로 나갔다. 오특민이 그의 뒤를 따르려 하자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따라올 필요 없다. 잠시 홀로 걷겠다.”

오특민이 즉시 시녀에게 분부했다.

“폐하의 피풍을 가져오너라.”

시녀가 피풍을 가지고 오자 오특민이 황제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날씨가 춥습니다. 폐하,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들어오십시오.”

황제는 짧게 대답하곤 문턱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깥은 역시 날씨가 쌀쌀했다. 스산한 한기가 얼굴을 스치자 가슴속까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요즈음 그는 불안함에 온몸이 떨리고 밤에는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때때로 옛날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통하는 것처럼 그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삼십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마침내 그 사람이 돌아왔다.

그는 그 사람을 잘 알았다. 그 사람은 여태껏 한 번도 승산 없는 싸움은 벌이지 않았다. 돌아왔다면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니… 그의 수명이 다한 셈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랴? 황제는 시든 꽃이 가득한 화단에 서서 냉소를 지었다. 가장 좋은 시절에는 그래도 그가 군왕이었다.

어디선가 잎사귀가 날아와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누렇게 시든 잎사귀였지만 군데군데 푸른 빛깔이 남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잎사귀를 바라보며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잎사귀는 정말 그 사람 같았다. 제대로 피어날 겨를도 없이 시들어 버렸으니까.

그는 고개를 들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왼쪽은 호리호리한 키에 싸늘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었다. 오른쪽은……. 그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신이 환각을 보는 걸까? 그는 힘껏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지만, 그 얼굴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와 이렇게나 닮은 사람이 있다니.

황제는 잠시 비틀거리다 다급히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황제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비록 두꺼운 오자를 입고 있었지만 말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소인, 폐하를 뵙습니다.”

백천범은 허리를 굽히고 예를 취했다.

“소인의 성은 전이며, 이름은 범자를 씁니다.”

황제는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그녀를 다시 한번 훑어봤다.

“이제 보니 자네가 바로 태자의 귀한 손님이군. 짐이 몇 번이나 소견하려 했는데 자네가 자리를 비웠지. 짐과 자네는 인연이 없는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에서야 이렇게 만나는군.”

“폐하를 뵙게 된 것은 소인의 복입니다.”

백천범은 마음속으로 매우 감격하여 손을 소매 속으로 모으고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눈앞의 노인을 자세히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정말 내 생부일까?’

황제의 시선이 백천범의 짙은 눈썹에 머물렀다.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못생긴 눈썹이었다. 또한 얼굴에 있는 점도 거슬리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저 눈동자는……. 그는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자를 살피며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하늘 아래 이렇게 닮은 사람이 또 있을까? 정말 똑 닮아 있었다. 난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전범.”

황제는 그 이름을 천천히 음미하듯 내뱉었다.

“동월인인가?”

“네, 소인은 동월 사람입니다.”

“혹시 남원에 가 본 적이 있는가?”

“소인은 남원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자의 목소리는 성별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성적이었고 생김새도 아주 수려했다.

백천범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황제가 자신을 알아본 건 아닐까? 비록 제 모습이 여제와 꽤 닮아 있었지만… 어떻게 갑자기 여제를 떠올릴 수 있겠는가?

어미에게 상처받은 전례가 있었기에 그녀는 황제가 자신을 좋아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동월의 황후라는 걸 알고 여제처럼 그녀를 이용할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고민으로 그녀의 속마음은 갈팡질팡했다.

“전 선생은 유람하는 걸 좋아하고 식견이 꽤 넓다고 들었네.”

“과찬이십니다. 소인은 그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할 뿐입니다.”

“짐도 선생이 밖에서 쌓은 견문을 듣고 싶군.”

황제는 그녀를 계속 바라봤다.

“밖은 날씨가 차가우니 짐의 거처에 가서 잠시 앉았다 가시게. 짐이 선생에게 좋은 차를 대접하리다.”

백천범은 잠시 망설였다. 그의 말대로 바깥의 바람이 차가워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십삼을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소인이 염치 불구하고 기꺼이 황명을 받들어 폐하께 좋은 차 한 잔 얻어 마시겠습니다.”

황제는 손짓하더니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갔다.

영십삼은 백천범의 뒤를 따르면서 황제를 힐끔 바라보았다. 백천범의 곁에서 수행한 그는 대략적인 속사정을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부녀가 재회하게 됐지만 그가 알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반 백성들이었다면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을 텐데… 그들은 서로를 탐색하며 불안해했다. 이런 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황가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 * *

동궁으로 돌아온 태자는 황제가 백천범을 데려갔다는 말에 황급히 움직였다. 그는 두 사람의 만남을 막기 위해 백천범에게 자신의 밀실까지 내어 주었다. 전 선생을 꽁꽁 숨겨 놓으려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 두 사람은 만나고 말았다.

대전에 이르자 차를 마시고 있는 황제가 보였다. 태자가 찾아온 것에 전혀 놀라지 않는 기색이었다.

“부황.”

태자가 다가와서 예를 취했다.

“소자, 방금 궁 밖에서 돌아왔습니다.”

“일은 어떻게 됐느냐?”

“주루에서 불이 났을 뿐,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다행이구나.”

“모두가 부황의 은덕이옵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렇다는 건… 어젯밤 일은 그 사람의 여흥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진짜 ‘환한 불빛’은 아니구나.”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열여드레까지는 아직 사흘이나 남았고, 요즘 시내로 들어오는 물자 중에는 기름이나 연료는 전혀 없습니다.

간밤에 불이 난 장소도 주루 부엌이었습니다. 가게 문을 닫을 때 아궁이 불을 끄는 것을 깜빡 잊어 숯이 튀어 올라 땔감에 떨어져 불이 났다고 합니다. 소자가 면밀히 살펴보니 확실히 그 말이 맞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그자는 일을 매우 신중히 하는 것 같습니다. 의심스러운 점은 조금도 남기지 않고…….”

황제가 태자의 말을 잘랐다.

“처음부터 잘못 짚었을지도 모른다. 황성을 전부 태우려는 게 아닐 수도 있어. 그렇다면 연료도 많이 필요하진 않겠지.”

태자는 어리둥절했다.

“황성을 불태우는 게 아니라면 어디란 말입니까?”

황제가 말했다.

“저들은 우리에게 벌써 답을 알려 줬다. 바로 열여드레.”

태자는 순간 번뜩 생각이 떠올라 두 눈을 크게 떴다.

“백도탑白圖塔입니다!”

백도탑은 성 내에서 가장 향불을 많이 피우는 사찰이었다. 황제는 섣달 열여드레만 되면 관례에 따라 백도탑에 찾아가 다가올 새해에 비바람이 순조롭기를 기원한다. 또 모든 백성들이 백도탑 주위에 몰려들어 황제가 구 층 높이의 탑 위에서 향을 피우는 걸 바라보았다. 황제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가 태우려는 건 황성이 아니라 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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