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49)화 (948/1,192)

제949화

방 관리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원곡 주인을 찾아갔다.

“주인, 누군가 저희보다 앞서 말을 빼앗았습니다.”

“누구 짓이더냐?”

“알아보고 있습니다.”

도원곡 주인은 바퀴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휑한 나뭇가지를 바라봤다.

“그럴 것 없다. 누군지 알겠구나.”

방 관리도 어리석지는 않았기에 곧장 답을 내놓았다.

“천선지인입니까?”

도원곡 주인이 가볍게 웃었다.

“그가 아니면 누구겠나?”

“그가 무엇하러 말을 훔쳐 간 겁니까?”

“우리와 대적하려는 걸 수도 있고… 그자에게 그 말이 필요했을 수도 있지.”

도원곡 주인이 돌아서자 가면 속에서 매서운 눈빛이 쏘아져 나왔다.

“묵용감이 내게 이용당할 인물은 아니지만 그놈에게 주도권을 뺏겨서도 안 되지. 한데 그가 소식을 흘린 후부터 어쩐지 그의 저울이 기운 것 같구나.”

“소인도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가 생각을 바꾼 걸까요?”

방 관리가 말했다.

“알아봐라.”

“알겠습니다. 이미 패륜이에 그의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워낙 똑똑한 사람이라서 계속 사광후를 경계하고 있어 그들의 연락 방법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묵용감 곁의 시위가 영 씨라는 사람인데 동월 황궁 최고 고수인 영구가 직접 가르친 자라고 합니다. 시위 한 명이서 열 명은 거뜬히 제압할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머리도 똑똑하고 반응도 빨라서 사광후가 사람을 풀어도 늘 놓친다고 합니다.”

방 관리가 말했다.

“제왕 곁을 따르는 사람이니 당연히 뛰어나겠지.”

도원곡 주인이 다시 바퀴 의자에 앉았다.

“말을 빼앗은 것도 그놈은 우리라고 생각하겠지. 오히려 잘 됐다. 그놈에게 겁을 주는 것이 좋지.”

“무슨 뜻이십니까?”

“환한 불빛.”

방 관리도 깨달았다.

“네, 알겠습니다.”

* * *

군마를 빼앗긴 소식을 들은 태자는 몹시 성을 냈다. 그 말들은 해막도가 좌대사 자리에 있을 때 강제로 징집한 것들이었다.

태자는 강제 징집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제때 말을 보내지 않으면 와도성 군대가 불안해질 것이다. 백성은 동월 군대의 요충지여서 두 성 사이에 충돌이 생기면 소규모의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일이고, 그때 말이 없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밀 조직이 패륜이에 들어온 지금. 거리마다 순찰병들이 돌아다니고 영문 모를 커다란 독이 나타나니 백성들 사이에서 긴장감이 돌았다. 이런 상황에 다시 말을 징집한다면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분명 그자의 짓이다. 그가 짐에게 대적하는 거야.”

“부황, 그자의 약점이 무엇인지… 어찌해야 그자를 잡을 수 있는지 소자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태자가 분개했다. 황제는 두 손을 마주 잡더니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그자에게 약점이 있긴 하다.”

“무엇입니까?”

태자가 얼른 물었다. 황제의 손은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 짧은 시간에 어딜 가서 찾는단 말인가?”

황제는 멍한 얼굴이었다.

“부황, 무얼 찾으십니까?”

황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사람을 찾아야지.”

“누구 말입니까?”

황제는 아무 말 없었지만 괴이한 표정이었다. 악몽에 사로잡힌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별안간 허둥대기 시작했다.

“난비, 난비를 불러와라.”

오특민이 금방 난비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태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황제가 정신을 차린 줄 알았는데, 그의 상태는 잠시 좋아졌다 나빠지는 것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예전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곧 난비가 도착하자 황제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피곤하군, 짐과 함께 가서 좀 쉽시다.”

황제는 난비에게 크게 의지하는 것 같았다. 난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고 그를 부축했다. 그들이 뒷전으로 향하자 태자는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무력함을 느꼈다.

* * *

한밤중. 난비는 잠결에 황제가 잠꼬대하는 소리를 들었다.

“싫어, 그러지 마! 난 아니야. 날 내버려 둬……!”

얼른 눈을 뜬 그녀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황제를 살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황제의 모습에 그녀는 겁이 덜컥 났다. 놀란 난비는 황제의 팔을 잡고 흔들어 깨웠다.

“폐하, 일어나세요. 악몽을 꾸셨습니까? 폐하, 폐하…….”

덕분에 잠에서 깬 황제는 눈을 뜨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

“폐하, 악몽을 꾸셨습니까?”

난비는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겨 황제의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땀범벅이 되셨습니다.”

황제는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기라도 하는 듯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그의 공허한 눈빛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난비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가 왠지 섬뜩해서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폐하, 왜 그렇게 바라보십니까?”

황제의 눈동자가 떨리더니 그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의 손끝에서 냉기가 전해졌다. 그녀의 얼굴, 그리고 가슴까지 차가운 기운이 번지는 것 같았다. 난비는 자기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며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폐하, 손이 어찌 이리 차갑습니까? 신첩이 따뜻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문질러도 황제의 손은 따뜻해질 줄 몰랐다. 비쩍 마른 그의 손을 그녀가 품자 그제야 그의 손에도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황제는 손으로 그의 품 안을 더듬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항상 짐 곁에 있을 것이오?”

난비는 황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했다.

“물론입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폐하께서 신첩을 쫓아내지만 않으시면 그럴 겁니다.”

“짐은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 것이오. 이번엔 당신을 선택할 것이오. 강산도 필요없소. 당신만 선택할 것이야.”

난비는 어리둥절했다. 황제의 말을 추측해 보자면 예전에 놓친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기분이 좀 나빴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그래도 지금 황제가 제일 사랑하는 건 자신이었다.

“폐하의 그 마음만으로도 신첩은 이미 충분합니다. 어찌 감히 일개 궁비가 강산과 사직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다시는 그런 말씀 마시어요.”

황제의 손이 그녀의 목을 어루만졌다.

“짐을 증오하오?”

난비는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폐하께서 신첩을 이리 소중히 대접해 주시는데 신첩이 왜 폐하를 증오하겠습니까?”

“당연히 증오하겠지?”

황제가 그녀의 윤곽을 하나하나 그려내듯 얼굴을 쓰다듬었다.

“짐은 이 나이가 되어서야 잘못했다는 걸 알았소. 짐을 너무 탓하지 마시오. 알겠소?”

그는 심지어 그녀를 보며 구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비는 마침내 알아차렸다. 그가 자신을 통해 다른 여자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그는 계속 자신을 그 여자라고 여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악몽에서 한 말은 분명 그 여자에게 한 말이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질투심에 휩싸였다. 물론 그녀는 황제를 사랑하지 않았다. 젊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 왜 할아버지뻘인 남자를 사랑하겠는가? 단지 그가 황제이고 지고지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곁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황제의 노쇠함과 옆구리에 가득한 군살을 외면한 채, 오직 황제의 권력과 부귀영화만 바라보며 그의 총애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게 누구십니까?”

황제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썹을 그리며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짐은 당신을 처음 보자마자 좋아했소. 당신은 정말 아름답소…….”

난비는 너무나 답답했다. 그는 자신만의 세상에 푹 빠져 있었다. 그녀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분명히 그녀를 만지고 있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건 다른 여인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눈빛과 다정한 목소리로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만 같았다. 여태껏 자신을 이렇게 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난비는 소매 속에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뾰족한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찔렀고 그 통증에 의지해 겨우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의 뺨을 한 대 때리고 말았을 것이다.

분노로 머리에서 김이 날 지경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왠지 조금 무서웠다. 분명 노쇠한 얼굴인데 그의 눈빛에선 청초한 소년의 분위기가 흘렀다. 나이에 맞지 않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그가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만 같아 그녀의 등에는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폐하.”

“짐은 계속 당신을 찾으러 가려고 했지만 갈 수 없었소.”

“폐하…….”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온 거요.”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그녀의 콧날을 쓰다듬었다.

“당신이 이렇게 오니, 정말 좋소.”

이번엔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당신의 입술은 아직도 기억나오. 부드럽고 달콤하고 향기로웠지…….”

난비는 도무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그의 손가락을 한입에 깨물었다. 물론 감히 세게 물진 못하고 가볍게 무는 시늉만 했다. 황제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녀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입궐한 후, 그녀는 순풍에 돛을 단 듯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 그녀가 이 깊은 밤중에 굴욕적인 순간을 맞을 줄 누가 알았을까. 모든 것이 가짜였다. 황제가 진짜 사랑한 건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를 물었지만, 황제는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좋아했다. 그녀를 더욱더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당신은 예전처럼 무는 걸 좋아하는군.”

“…….”

그녀의 심장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이곳을 벗어나려고 팔을 뻗었다. 당장 그녀를 미치게 만드는 이 늙은이 곁을 떠나야 했다. 그녀가 막 몸을 일으키는데 황제가 그녀를 껴안았다.

“어디 가려는 게요?”

난비는 속으로 눈이 뒤집혔지만, 겉으로는 그를 달랬다.

“폐하, 신첩은 소피를 보러 다녀오겠습니다.”

황제는 대꾸만 할 뿐 손을 놓진 않았다. 그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기회를 틈타 도망가려는 거 아니오? 항상 남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걸 나도 알고 있소.”

난비는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남원? 황제가 좋아했던 여자가 이제 보니 남원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실력이 대단하니 언제고 날 속일 수 있을 거요.”

그는 또 그녀를 꼭 껴안으며 아이처럼 억지를 부렸다.

“난 당신을 못 가게 할 거요.”

난비는 그가 너무 꼭 껴안아서 너무 불편했다. 화가 난 그녀는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폐하, 신첩이 소피만 보고 곧 돌아오겠습니다.”

“안 되오.”

그는 머리를 그녀의 품속에 파묻고 단호하게 말했다. 난비는 화가 나서 그를 힘껏 밀쳤다. 침대에 머리를 부딪힌 황제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비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죄를 물을까 겁이 난 난비는 막 해명하려 입을 뗐다.

그때, 오특민이 인기척을 냈다.

“폐하.”

황제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난비를 바라보았다. 난비가 대신 대답했다.

“총관, 무슨 일로 폐하를 찾으시나요?”

“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패륜이성 안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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