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48)화 (947/1,192)

제948화

잠시 침묵하던 방 관리가 물었다.

“주인께선 그의 신분을 미리 알고 천선지인으로 삼으신 겁니까?”

도원곡 주인이 웃었다.

“제왕이란 원래 천선지인이지. 그저 그자가 스스로 골짜기로 들어올 줄 몰랐을 뿐이야.”

방 관리는 걱정스러웠다.

“그가 저희 계획대로 따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제왕인 그가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겠는가? 그저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에 정보를 흘린 것이지. 하지만 그는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해독제를 얻으려면 반드시 임수를 할 것이야.”

도원곡 주인은 바퀴 의자를 돌려 방 안을 빙글 돌았다.

“그가 이번에 둔 수는 옳았다. 이 노부老夫가 그놈을 밤이고 낮이고 편히 지내지 못하게 할 것이야.”

“지금 성 안엔 엄청난 방어 병력이 투입되어 있고 치밀한 조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벌써 형제 하나를 잃었습니다. 아무래도 앞으로 행동을 더욱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방 관리가 말했다. 도원곡 주인은 바퀴 의자를 멈춰 세웠다.

“그놈은 멍청해도 제법 능력 있는 아들을 두었구나. 성 안을 단단히 지키고 있으니 우린 성 밖을 노려보자.”

“그 군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도원곡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게 처리하라고 분부해라.”

“안심하십시오. 반드시 해낼 겁니다.”

도원곡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광후에게 앞으로 이곳으로 발걸음을 하지 말라고 전하거라. 할 말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시켜 전하라 하고. 또한 묵용감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제대로 감시하라 일러라.”

야행복에 검은 복면으로 모습을 감춘 자가 지붕 위에서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는 어둠 사이를 빠르게 다니더니 이내 작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호리호리한 남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어 나와 성 동쪽에 있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를 보자 문지기 머슴이 인사했다.

“십일 형님, 오셨습니까.”

영십일이 짧게 대답하고 문가에 서 있던 영십구와 눈짓했다. 영십일이 방에 들어가자 영십구가 문을 닫고 경계하듯 주변을 살폈다. 영십구를 기다리던 묵용감이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

“어찌 됐느냐?”

“노야의 추측이 바로 맞았습니다. 도원곡 주인과 방 관리 모두 패룬이에 도착했습니다. 성 북쪽의 대저택입니다. 그 주위의 경계가 퍽 삼엄합니다.”

“오는 길에 다른 사람에게 들키진 않았지?”

“사광후가 경계심이 많긴 해도 저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영십일이 그곳에서 엿들은 내용을 묵용감에게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묵용감은 흠칫 놀랐다.

“그렇다면… 줄곧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노야.”

묵용감은 뒷짐을 지고 방을 서성였다.

“그가 내 신분을 어찌 알았을까? 설마 날 알아본 건가?”

“소인이 그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노야가 소식을 흘린 것이 그의 뜻이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겁주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소인이 추측건대 몽달 황제 아니겠습니까?”

영십일이 말했다.

“그가 싸우는 사람은 언제나 몽달 황제였지. 하지만 누가 황제에게 대항할 수 있는지 모르겠구나.”

묵용감은 방 안을 거닐며 생각했지만 어떤 실마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이 일은 그냥 두기로 했다.

“군마는 어찌 된 일인지 사람을 보내 알아보도록 해라. 도원곡 주인이 무슨 생각이든 반드시 그들보다 앞서야 한다.”

“알겠습니다. 부인께서 성 밖에 정예병 삼백 명을 남겨 두었으니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겠습니다.”

영십일이 대답했다. 백천범 이야기가 나오자 묵용감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부인이 사전에 대비를 해 둔 덕에 성 안팎에 일손이 많구나.”

또 며칠 못 봤더니 그녀가 몹시 보고 싶었다. 하지만 몽달 황궁엔 보초들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동궁은 지난번 일로 그녀가 머무는 편전에 보초들을 잔뜩 배치해 놨다.

그는 그녀가 보고 싶었지만 이토록 결정적인 시기에 경솔하게 행동해선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창가에 다가선 묵용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내일 소식을 더 퍼뜨려라. 열여드레, 환한 불빛이라고.”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소인이 처리하겠습니다. 곤청락에겐 문객이 많으니 소식을 퍼뜨릴 방법은 차고 넘칩니다.”

영십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용감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곤청락은 다른 건 못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건 잘하지.”

* * *

소식을 들은 곤청락은 공을 세우기 위해 곧장 궁으로 들어갔다.

“부황, 소인이 알아냈습니다. 그들이 황성을 불태우려는 날은 열여드레입니다.”

황제가 깜짝 놀랐다.

“열여드레라… 오늘은 열사흘이니 겨우 닷새가 남았구나. 어서 태자를 불러라.”

태자는 금방 도착했다. 황성을 불태우려는 날짜를 듣자 태자의 안색이 달라졌다. 앞으로 닷새, 닷새 후면 패륜이 전체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여섯째 아우, 믿을 수 있는 소식인가?”

“당연합니다.”

곤청락이 경멸로 가득한 눈으로 그를 힐끔 쳐다봤다.

“벌써 며칠이 흘렀는데 태자 형님께선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까? 힘들게 잡아 온 자도 독을 먹었다고 들었습니다, 부황.”

그는 황제를 향해 손을 모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소자가 태자 형님과 함께 이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소자에게 유능한 수하들이 있고 소식도 빠릅니다. 아무래도 도사군과 상림군이 마구잡이로 성을 헤집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여섯째 아우, 그게 무슨 말인가, 도사부와 상림군이 마구잡이로 헤집고 있다니?”

곤청락의 입가에 냉소가 서렸다.

“형님이 이번 기회에 상림군을 정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 부대를 면식시키고 새로운 사람들을 잔뜩 들이셨다면서요. 이런 시기에 상림군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하는 건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새로 부임 된 자들은 경험이 없으니 마구잡이로 헤집지 않겠습니까?”

“부황.”

태자가 항변했다.

“좌대사가 그 자리에 앉은 후 상림군에 대한 원성이 자자합니다. 그가 선발한 사람들은 조정의 녹봉을 받으면서도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백성들을 억압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내보내지 않고 남겨 둔다 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제가 보기에 태자 형님도 자기 사람만 발탁하려 하는 것이 좌대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만…….”

태자는 이런 때에 곤청락이 생트집을 잡을 줄은 몰랐다. 그가 다시 반박하려 하자 황제가 손을 저었다.

“모두 그만해라. 짐도 낙이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사람을 쓸 때야. 낙이 집안에 문객이 많으니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락이와 같이 이 일을 처리해라.”

태자는 무력하게 그를 불렀다.

“부황…….”

곤청락은 뿌듯한 얼굴을 하며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소자, 명을 받들겠습니다. 절대 부황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반드시 열여드레 전까지 비밀 조직을 일망타진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황제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너는 소식만 알아보고 잡는 것은 태자에게 맡겨라. 그런 일은 태자가 많이 해 봐서 경험이 많다.”

웃고 있던 곤청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황제의 말에 분노가 치솟았지만 더 따져 묻진 못했다. 그래, 태자와 함께 사건을 처리하도록 허락만 해 준다면 그에게도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반면 태자는 황제가 저렇게 말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험이 많아 이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비밀 조직에 대한 정보를 숨기려는 것이다.

* * *

새벽녘. 하늘이 천천히 밝아지는 시간. 광활한 초원 위를 말 떼가 뛰어다니고 있었고 기병들은 그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이따금 말이 대열을 벗어나면 채찍을 휘두르며 무리로 되돌려 보냈다.

이 말들은 군마를 보충하기 위해 와도성으로 보내는 말이었다. 몽달 북쪽 국경에 수시로 군마를 보충해 줘야 했다. 군량이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말을 잡아먹었기에 조정에서 바로바로 보충을 해 줬다. 만약 말이 없을 때 전쟁이라도 나면 실로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군마들이 군량미가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악순환을 끊을 길이 없어 조정에서도 손 놓고 있었다. 그 중 해막도는 백성들을 쥐어짜 매번 말을 징집했다. 황제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해막도가 제멋대로 구는 걸 용인했다.

적막한 새벽, 천군만마가 지나가는 것 같은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이따금 채찍질하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사방에 자욱한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아 모든 것이 흐릿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어슴푸레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오른손을 들고 소리쳤다.

“멈춰라!”

사람은 멈췄지만 말은 멈추지 않았다. 말들이 계속 전진하자 곧장 큰 고함과 함께 채찍이 날아왔다.

“워워…….”

병사들이 채찍질을 하자 말 떼도 점차 조용해졌다. 바로 그때, 안개를 가르는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잠잠해졌던 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말들은 몹시 불안한 듯 발로 땅을 파댔다. 우두머리가 물었다.

“누구냐?”

대답 대신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퍼졌다. 말 떼들은 통솔되지 않았다. 병사들은 채찍을 휘두르며 말떼를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말을 잃으면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말들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호각 소리를 쫓아 날뛰었다.

“말은 내버려 두고 출격하라!”

우두머리가 소리쳤다. 병사들은 즉시 채찍을 흔들며 검은 그림자를 쫓았다. 검은 그림자와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몇 곱절이나 많은 수를 자랑해 보였다. 훔친 군마를 탄 이들은 손에는 번쩍이는 검을 들고 싸늘하게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을 호송하던 병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저들과 부딪힌다면 조금의 승산도 없을 것이다. 그들에겐 대치만이 살 길이었다.

한 줄기 금색 빛이 구름을 갈랐다. 햇빛이 들어오자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사방이 밝아졌다. 누군가 호각을 불자마자 말을 훔친 복면 사나이들은 채찍을 휘두르며 달려갔다. 말을 호송하던 병사들은 멀어져 가는 말들을 보면서도 뒤쫓지 못했다.

“대장, 어쩌지요?”

우두머리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비밀 조직이 빼앗아간 것이다.”

비밀 조직은 와도성으로 가는 산자락 사이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만전을 기해 그곳에서 매복을 시작했지만 해가 저물 때까지도 말의 털끝 하나 볼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