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7화
태자는 매일 황성으로 들어오는 물자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불을 지르려면 기름과 같은 불을 지를 수 있는 물건이 필요하다. 요 며칠 동안 화종사貨宗司에서는 어떠한 의심스러운 물건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을 소홀히 해 화재가 날까 봐 태자는 계속 장부를 확인했다.
이날 화종사에서 나온 백천범은 평소처럼 태자와 길을 걷고 있다가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바로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는 영십일의 모습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지만 그는 틀림없이 영십일이었다.
바쁜 모습을 보니 급한 일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얼마 뒤… 도사아문 사람이 태자에게 뛰어와 보고를 올렸다.
“전하, 저 앞 골목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독을 깬 것과 관련된 자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태자는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황성의 주요 길목에 커다란 독을 마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독은 특수하게 만들어져 굉장히 튼튼한 것이었는데 누군가 밤에 산산조각을 낸 것이다. 하지만 아직 범인을 찾지 못했다. 도사아문 사람들은 몸이 민첩한 사람만 보면 의심했다. 태자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몇 놈이냐?”
“하나입니다. 보아하니 솜씨가 좋은 것 같습니다.”
백천범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사람은 방금 영십일이 뛰어 들어간 골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이들이 묵용감까지 알아낸 걸까?
“멍하니 뭘 하고 있냐! 어서 쫓아라.”
태자가 소리쳤다. 그때 백천범이 고함을 질렀다.
“기다리십시오!”
태자가 걸음을 멈추고 급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나, 선생?”
백천범은 보고를 올린 자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 왜 수상하다고 하는가?”
“동작이 민첩합니다.”
“동작이 민첩하면 나쁜 사람인가?”
그 사람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하고 태자만 보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태자가 물었다.
“선생에게 무슨 다른 생각이 있는가?”
백천범은 아무 말 없이 묘한 분위기만 풍기고 돌아섰다. 다들 그녀의 속셈을 알 길이 없어서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고 있었다. 골목 쪽을 흘깃 쳐다본 태자는 마음이 더 급해졌다.
“선생?”
백천범은 대답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태자는 재빨리 그녀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꼿꼿이 서 있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던 태자가 물었다.
“선생, 대체 무얼 하는 것인가?”
백천범이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상한 사람이 저쪽에 있습니다.”
태자는 더더욱 이상했다.
“선생이 어떻게 아나?”
백천범은 엄지와 중지를 마주 대고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점을 쳤습니다.”
별수 없었다. 상황이 급박하니 잔꾀라도 부려야 했다.
“…….”
태자는 말이 없었다. 다들 백천범이 이상한 소란을 피운다고 생각했다. 일을 그르치려는 것인가?
“어서 사람을 보내십시오. 늦으면 도망갈 겁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수상한 사람은 분명 저쪽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도사아문 사람이 말했다.
“잘못 본 것이오. 진짜 수상한 자는 앞에 있소.”
태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 선생의 말은 의심스러웠지만 그 표정만큼은 진지해서 이상하게 믿음이 갔다. 태자는 어떻게 할지 망설이다 말했다.
“양쪽 모두 사람을 보내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골목으로 들어가자 백천범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골목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놓인 백천범은 남몰래 한숨 쉬었다. 보고한 사람은 버럭 화를 냈다.
“그놈을 도망가게 내버려 둔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당신이 잘못 본 거네. 거기엔 어떤 수상한 사람도 없었어.”
백천범이 말했다.
“선생이 말한 곳에서는 수상한 사람을 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확신에 찬 백천범이 말했다.
“늦지 않는다면 분명 가능할 것이오.”
그 말은 헛소리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사람들 역시 수상한 눈초리로 전 선생을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절로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계획이라도 있는 양 평온한 얼굴을 했다. 추격하는 병사가 돌아오면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늦어서 도망가 버렸다.’ 정도가 가장 그럴듯한 핑계일까.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병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들 조바심을 내기 시작할 무렵. 저 멀리서 병사가 뛰어와 소리쳤다.
“보고 드립니다. 전하, 수상한 사람을 잡았습니다.”
모두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백천범을 보는 눈빛도 의심에서 놀라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 방향이나 가리킨 것 같았는데 정말 그곳에서 수상한 자가 나타난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든 태자가 물었다.
“어디 있느냐? 어떻게 잡았고?”
“전 선생이 가리킨 곳으로 가보니 길가에서 행적이 미심쩍은 사람 둘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독 앞에서 수상한 일을 꾸미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인들이 말을 거니 곧장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그들을 쫓았지만 보통 놈들이 아니어서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한 후에 한 놈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말을 하는 와중에 병사들이 범인 하나를 잡아 왔다. 한 놈을 놓친 건 아까웠지만 한 놈이라도 잡았으니 드디어 비밀 조직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백천범은 끌려온 사람을 살펴봤다. 기골이 장대한 그 사람은 부리부리한 눈과 진한 눈썹, 충성심이 강해 보이는 얼굴이라 보기에는 나쁜 사람 같지 않았다. 그는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백천범은 어딘가 이상했다. 태자는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네 이름은 뭐고 어디서 왔느냐?”
그 사람은 고개를 쳐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넌 누구냐?”
어떤 이가 바로 소리쳤다.
“무엄하다. 이분은 태자 전하시다.”
그가 웃었다.
“태자 전하셨군, 당신네 폐하에게 전하시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옛 친구가 온다고.”
태자도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무슨 옛 친구가 온다는 말이냐?”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백천범이 놀라 소리쳤다.
“큰일 났습니다! 저 사람……!”
태자의 동공이 흔들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그 사람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입가엔 피가 흐르고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갔다. 극약을 먹은 게 분명했다.
병사들이 그의 목구멍을 잡아 쥐고 내용물을 게워 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모두들 자신의 눈앞에서 수상한 자가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편안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지만 입가의 검은 핏자국 때문에 퍽 기괴해 보였다.
태자는 그의 몸에 구멍이라도 내려는 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힘겹게 겨우 하나 잡았는데 그 즉시 죽는 것을 보아야 했다. 태자는 그가 잡힌 후에도 왜 그리 담담한 얼굴을 했는지 이제야 이해했다. 그자는 잡히자마자 죽을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죽기 전 한 마디를 전했다. ‘옛 친구가 온다.’라…….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태자가 미간을 찌푸리고 먼 하늘을 바라봤다. 짙푸른 하늘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지만 그의 마음은 심란하고 어수선했다.
황제는 비밀 조직의 목적을 알 것 같다고 했다. 잡힌 사람은 옛 친구가 온다는 말을 황제에게 전하라고 했다. 황제는 분명 비밀 조직과 그들의 수령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왜 그들의 정체를 알려 주지 않고 그에게 찾아보게 하는 것일까?
태자가 눈길을 거두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궁으로 가자.”
사안이 시급하니 반드시 황제에게 물어봐야 했다.
* * *
하지만 그의 마음과 달리 황제는 침묵을 지켰다. 황제는 ‘옛 친구가 온다’라는 말을 들은 후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던 태자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부황, 옛 친구라면 상대가 누구인지 아신다는 겁니까?”
황제는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한 채 말이 없었다.
“상대는 황성을 불태우려 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창백한 얼굴의 황제가 입술을 움찔거리다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짐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황제는 분명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황제가 도대체 뭘 망설이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황성을 불태우려 하고 있었다. 황성에 화재가 일어나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가족을 잃고 집을 잃을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런 재앙보다 자신의 비밀이 더 중요한 듯했다. 태자는 늘 황제를 존경했지만 이번에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부황께서는 알고 계신 것이 맞지 않습니까?”
황제는 커다란 몸을 구부리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있어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이제껏 가장 의기소침한 기색이었다. 제일 높은 곳에 있는 황제가 약해진 모습을 보이자 그 역시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 황제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태자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낮고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짐은 말하지 않을 것이니 그만 물어봐라. 그럴 시간이 있으면 얼른 그를 찾아오너라. 그는 분명 패륜이에 와 있다.”
“그게 누구입니까?”
태자가 물었다.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다.”
황제가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방금 전 유약한 모습은 지우고 매서운 기운이 얼굴에 번져갔다.
“각아, 반드시 그를 찾아서 은밀하게 짐 앞에 데려오너라. 하지만 누구도 그를 봐서는 안 된다.”
태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 물어볼 것 없다. 그저 짐의 뜻에 따르면 된다.”
“하지만 소자는 그가 어떤 자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어두운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를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아볼 것이다.”
* * *
깊은 밤, 성 북쪽의 대저택. 어두운 정원에 갑자기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양피지를 바른 창을 통해 흐릿한 빛이 새어 나왔다.
집 안에는 한 남자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두툼한 담요를 다리에 덮고 있었다. 금색 가면을 쓴 그가 바로 도원곡 주인이었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앞에 서 있는 방 관리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방 관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대업과 주인을 위해서라면 이런 고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잠시 주저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천선지인이 소식을 흘린 것 때문에 그 작자가 미리 방비를 해서 저희 계획이…….”
“상관없다. 천선지인은 총명한 사람이야. 그가 소식을 흘려야 사람들에게 공포를 줄 수 있지. 그는 우리를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