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6화
그를 보는 황제의 탁한 눈빛이 점차 또렷해졌다.
“네가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요즘 불길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 소자도 남몰래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뿌리를 찾지 못해 줄곧 부황께 보고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황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좌대사의 일도 누군가 일부러 한 짓이냐?”
“좌대사가 팔을 잃은 후 그 칼 장수는 패륜이에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사냥터 자객과 마찬가지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 조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해서 그들이 한패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또 좌대사가 말을 타다 다리를 다쳤을 땐 누군가 말굽에서 바늘을 빼 갔습니다. 하지만 아직 흔적은 남아 있지요. 분명 좌대사의 일 또한 누군가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것입니다.”
태자는 해막도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방심하지 않고 묵묵히 조사를 했다. 그동안 조사에 아무런 수확이 없어 보고를 할 수 없었지만, 지난 이틀 동안 밀정들은 폭발적으로 많은 소식을 가져왔다. 많은 양의 소식에 태자도 적잖이 놀랄 정도였다.
태자는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의 걱정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태자는 몇십 년은 늙어 보이던 황제가 갑자기 원기를 회복한 걸 발견했다. 황제의 얼굴은 평온했고 눈빛은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아도 모두가 두려워하는 지엄한 황제로 돌아가 있었다. 황제가 돌아서 태자를 보았다.
“네 말은 이 일은 누군가 조작하고 있었고, 그게 어떤 비밀 조직이라는 뜻이냐?”
“소자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태자가 대답했다. 황제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동안 고생했다. 하지만 오늘부터 더 고생스러울 것이다.”
“소자도 알고 있습니다. 소자는 반드시 부황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배후의 사람을 찾아내 몽달의 평화를 지켜 내겠습니다.”
곤청락은 담담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황제는 태자에게 중책을 맡겼다. 그가 오늘 궁에 들어온 것은 성호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 말고도 다른 일이 있었다. 그도 자신이 무능력하지 않다는 것을 황제에게 보여 줄 것이다. 곤청락이 손을 모으고 황제에게 다가갔다.
“부황, 태자 형님께서 말씀하신 일은 소자도 들었습니다. 비밀 조직이 패륜이에 들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태자 형님 눈앞에서 황성에 들어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태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적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저리 치근거리다니. 정말이지 모자란 도련님이 따로 없었다.
“부황, 소자가 궁에 들어온 것은 보고 드릴 일이 더 있어서입니다.”
곤청락은 태자를 흘깃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소자가 들은 소식에 따르면 그 비밀 조직이 요즘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암호는 ‘환한 불빛’입니다.”
황제가 흠칫 놀랐다.
“환한 불빛이라 함은… 짐의 황성에 불을 지르겠단 뜻이냐? 어디서 들은 소식이냐?”
“소자의 저택에는 문객이 삼천입니다. 여러모로 박식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니 알 방법이 있습니다.”
“여섯째, 정말 믿을만한 소식인가?”
곤청락은 듣지 못한 척하며 황제를 향해 손을 모아 입을 열었다.
“부황, 소자의 정보는 절대적으로 확실합니다. 제집에 문객이 많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쑥덕대는 건 소자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자의 문객들은 밥이나 축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관아에서 알아내지 못하는 소식들을 제 문객들은 알아냅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부황께 보고하러 입궁하였습니다.”
황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소식이 사실이든 아니든 반드시 대비를 해야 한다. 황성을 불태우겠다는 것은 우리 몽달을 멸망시키려는 것이다!”
그때 태자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부황. 오늘부터 소자가 황성에 들어오는 기름과 쉽게 불타는 것들, 미심쩍은 사람들을 면밀히 조사하겠습니다. 황성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래, 이 일은 네가 책임지고 진상을 밝히도록 하거라.”
곤청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배후에 조직이 있다는 건 육황자인 제가 내놓은 정보인데 왜 태자에게 조사를 맡기는 거지?
“부황, 태자 형님은 맡은 일이 많아 시간을 내기 어려울까 걱정입니다. 이 일을 소자에게 맡겨 주시면 소자가…….”
태자가 단호한 말투로 그의 말을 끊었다.
“이번 일은 아이들 장난이 아니네. 아우는 사건을 조사해 본 경험이 없으니 본궁에게 맡기게. 아우가 도와줄 건 자네 저택에 있는 문객들이 수사에 협조할 수 있도록 하는 걸세.”
태자는 한술 더 떠서 그의 문객까지 원했다. 곤청락이 화가 나 한마디 하려는데 황제가 손을 저었다.
“태자의 말이 맞다. 이번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니 태자가 조사하는 것이 맞다. 락이 너도 태자를 도와주면 되는 일 아니더냐? 무슨 소식이 들리거든 재깍 태자에게 알리도록 해라.”
황제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곤청락은 고개 숙여 대답했다. 입궁할 땐 싱글벙글했는데 돌아갈 때는 풀이 다 죽어 있었다. 그는 언제나 황제가 자신을 가장 아낀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어째서 자신을 왕에 봉하지 않는단 말인가? 곤청락은 이 참에 태자보다 제가 더 뛰어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는 커다란 포부를 안고 저택으로 향했다.
곤청락이 사라지자 태자가 황제에게 물었다.
“부황, 소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 비밀 조직은 왜 우리 황실을 겨냥하고 있는 걸까요?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천장을 보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짐은 어쩌면 알지도 모르겠구나.”
황제의 처소에서 나오던 태자는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황제는 별 표정이 없었지만 그의 말은 꽤나 무거웠다.
입으론 안다고 했지만 그 외에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태자의 마음속에 의심이 일었다. 황제는 정말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걸까? 만약 알고 있다면 비밀 조직의 정체도 알 것이다. 그걸 알고 있다면 어째서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
태자는 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느덧 편전에 도착하니 보초가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태자는 손을 흔들며 물었다.
“선생, 있는가?”
마침 백천범이 나와 그를 발견하고 손을 모았다.
“전하, 무슨 일로 소인을 찾으십니까?”
“선생을 보러 왔네.”
태자는 그녀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마음속으로 벌써 백천범을 자신의 육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자는 다른 형제들과 달랐다. 외가 친척이 있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어미를 일찍이 잃은 그는 어려서부터 외로이 자랐다. 황제가 태자에 책봉해 주지 않았다면 소위 황적자인 그는 이미 흔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외가 친척이란 가지지 못했던 가족이고 사랑이었다.
백천범은 태자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확인했다.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전하?”
태자도 숨김없이 대답했다.
“골치 아픈 일이 있네. 비밀 조직이 패륜이에 들어와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게 밝혀졌네. 그 바람에 민심이 흉흉해졌어. 불에 탄 신수와 쌍두양, 좌대사의 일 모두 그 비밀 조직과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네. 거기다 황성을 불태울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어 본궁도 바빠질 듯하네. 선생에게 신경을 쓰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네만, 소홀한 점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게.”
백천범이 짧게 탄식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당연히 정사가 중요하지요. 그런데 비밀 조직이 패륜이에 들어온 것을 전하께서 어찌 아십니까?”
“육황자의 문객이 가져온 소식이네. 비밀 조직에게는 ‘환한 불빛’이라는 임무가 있다 하네. 말 그대로 이 황성을 불태우겠다는 것이지.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에 불을 지를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네.”
백천범도 흠칫 놀랐다. 묵용감의 임무가 바로 ‘열여드레, 제사 적당, 환한 불빛’이었다. ‘환한 불빛’이란 글자는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녀도 묵용감이 받은 수수께끼를 추리해 보았다. 하지만 묵용감은 그녀에게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그를 믿으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놀란 얼굴이었다.
“전하, 이 일은 도성 백성들과 관련된 큰일입니다. 소인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패륜이 백성들을 위해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전하가 사건을 조사하실 때 소인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태자는 손을 내저었다.
“선생이 이렇게 대의를 잘 알고 있으니 참으로 탄복스럽네. 하지만 패륜이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선생은 궁에 머무르는 것이 안전할 것이야.”
“소인이 전하를 따르게 해 주십시오. 소인은 궁 안에 있자니 정말 무료합니다. 만약 전하의 성대한 호의가 아니었다면 소인은 벌써 이곳을 떠났을 겁니다. 전하를 따라다니면서 패륜이도 살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께 도움을 드릴 수도 있고요.”
태자는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백천범을 지그시 보았다. 전 선생의 말이 맞았다. 궁 안 생활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고, 난비가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그래서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선생도 본궁과 함께 밖으로 나가 사건을 처리하도록 하지.”
백천범은 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몽달 조정은 드디어 도원곡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원곡 주인의 진면목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묵용감에게 도원곡 일을 들은 후 그녀는 도원곡 주인이 몹시 궁금했다. 도원곡 주인이 몽달 황실과 관련이 있다면 그게 누구일까?
* * *
공황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 조직과 관련된 일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조정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 일을 아는 사람들만 잔뜩 긴장을 한 채였다. 그 환한 불길이 솟구치는 것이 언제 어디서일지… 또 그 비밀 조직이 숨어 있는 곳은 어디인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별안간 패륜이 거리 곳곳의 순찰병들이 갑절로 늘었다. 상림군뿐만 아니라 도사아문 사람들까지 총출동해서 수상한 일이나 미심쩍은 사람이 없는지 면밀하게 살펴봤다.
도사아문에서 지켜보니 상림군도 전처럼 날뛰지 못하고 한결 성실한 모습을 보였다. 백성들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상림군이 트집을 잡지 않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백천범은 고어로 묵용감에게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환한 불빛’에 대한 소식을 그가 일부러 흘렸단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의도를 이해하고 나니 안심이 됐다. 그녀가 태자 곁에 있는 것은 묵용감을 위해 내부에서 대응하기 위해서이다. 일이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지만 그녀는 부군의 안전을 지켜야 했다.
태자의 출궁 횟수가 평소보다 많아졌다. 백천범도 그를 따라다니며 패륜이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