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45)화 (944/1,192)

제945화

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잡았으면 보고를 했을 텐데… 아직 못 잡았나 보네.”

“왜죠?”

백천범이 말했다.

“설마 자객이 궁을 탈출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태자가 코웃음을 쳤다.

“탈출할 필요도 없네.”

백천범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덧붙였다.

“난비가 꾸민 일이네. 한밤중에 사람을 쓴 걸 보면 지난번에 허탕을 치고 분이 풀리지 않았나 보지. 하지만 선생은 걱정할 것 없네. 본궁이 주변에 사람을 더 배치했으니 동궁은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철옹성과 같지.”

백천범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선생에게 나쁜 마음을 품은 자가 있다면 본궁은 그냥 넘어갈 수 없네. 이번 빚은 기억해 두었다가 언젠가 난비에게 제대로 따질 걸세.”

태자가 그녀를 이리 보호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남매 사이가 맞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족 간의 사랑을 중요시했기에 태자를 보는 눈길이 부드러워졌다. 태자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그녀도 방으로 들어갔다.

* * *

영십오는 난비가 백천범을 곤란하게 한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묵용감이 궁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황궁 깊숙이 도망쳤다. 하지만 그의 생각보다 몽달의 보초들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보초들을 따돌리다 우연히 민란궁으로 들어갔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쳐들어오자 야간 당직을 서던 궁녀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난비도 그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휘장을 걷고 머리를 내밀었다가 영십오를 보고 놀라서 바들바들 떨었다.

“누, 누구냐, 어찌 감히, 감히 여기를…….”

영십오는 자신의 황후 마마와 좀 닮은 그 궁비를 보고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그는 순식간에 궁 벽 옆의 좁은 길로 들어가 사라졌다.

자객 사건 때문에 몽달 황궁은 잠 못 드는 밤을 보냈다. 자객이 민란궁 근처에서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자 태자는 더더욱 자객을 보낸 사람이 난비라고 확신했다. 그는 전 선생이 머무는 대전에 병사들을 잔뜩 배치했다.

백천범은 보초들을 보며 남몰래 안타까워했다. 어젯밤 묵용감은 그녀를 데리고 궁 밖을 나가고 싶어 했지만 그녀는 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곳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묵용감이 다시 이곳에 찾아오는 건 어려울 것이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낸 태자는 아침이 되어 백천범을 찾아갔다. 하지만 황제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분명 어젯밤 일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황제를 찾아갔다.

들어가니 황제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황제는 태자를 보자마자 어두운 표정을 했다. 태자가 인사를 올리자 황제가 차갑게 말했다.

“어젯밤 일은 태자도 알고 있겠지?”

“예, 소자도 알고 있습니다. 부황을 놀라게 해 드린 것은 소자의 잘못입니다.”

황제는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자객이 동궁에서 왔다고 하던데.”

태자의 마음이 철렁했다. 황제는 자객을 보낸 것이 태자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난비가 적반하장으로 황제에게 이른 것이 분명했다. 이건 태자의 자리를 폐위할 만큼 무거운 죄였다. 태자는 불안했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당황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태자는 허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 자객은 전 선생을 노린 것입니다. 보초들이 발견해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태자는 돌아갔다고 말했다. 돌아간 곳은 당연히 민란궁을 말한 것이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냐? 설마 너는 난비가 자객을 보냈다고 의심하는 것이냐?”

“소자도 확증이 없어 감히 함부로 말씀드릴 순 없지만 난비 마마께서 계속 전 선생을 노리시니 소자도 여러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난비는 아니다. 난비는 어제 크게 놀라 아직까지도 몸져누워 있다.”

태자는 누군들 몸져누운 연기를 못하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황제가 물었다.

“정말 너와 상관이 없느냐?”

태자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부황, 소자가 담대하다고는 하나 공공연하게 궁에 자객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동궁 보초가 자객을 발견하고 민란궁까지 추격했습니다만, 민란궁에서 놓쳤기에 난비 마마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난비 마마께서 줄곧 전 선생과 각을 세우고 계셨으니까요. 어찌 되었든 이 일은 소자가 반드시 제대로 조사해서 제 결백을 밝히겠습니다.”

황제는 친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

“짐도 네가 아닌 것을 안다. 그저 네게 경각심을 주려던 것뿐이었다. 그래도 경계가 삼엄한 황궁에 자객이 들어오다니 보통 일이 아니다. 이 일은 확실히 조사하거라.”

황제는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췄다.

“짐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전 선생이 궁에 들어오고 난 후 모든 일이 순탄치 않은 것 같구나. 혹 그자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태자가 얼른 손을 모았다.

“소자, 전 선생이 자객과 무관하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보장할 수 있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짐도 그 전 선생이라는 사람을 한번 보고 싶구나. 뭐 그리 대단한 자길래 태자의 목숨까지 걸게 하는 건가?”

태자도 금방 자신이 충동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조급한 나머지 말이 먼저 나온 것뿐이었다, 주군으로서 그는 함부로 생명을 걸어선 안 됐다. 부황의 질책을 듣자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방 안을 서성이다 천장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평온하지만 장엄한 신선, 맹렬한 기세의 천병, 활활 타오르는 불길, 혀를 내민 머리 둘 달린 뱀…….

정신이 팔린 듯 그림을 보던 황제의 눈이 점점 공허해졌다. 저 천정을 넘어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태자가 그를 불렀다.

“부황.”

황제는 그를 부르는 소리에 태자를 보았다. 여전히 멍한 눈빛이었지만 그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쌍두양이 나타난 이후 줄곧 불안했는데 이제 보니 흉조는 역시 흉조로구나. 요즘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오늘 일어날 때는 오른쪽 눈꺼풀이 떨리더구나. 무슨 일이 더 벌어지려는 건지 모르겠다.”

태자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황제는 결코 그런 미신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고 비관적인 소리만 해댔다. 태자는 언제나처럼 그를 위로했다.

“지금 몽달은 몹시 평안하고 백성들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무슨 화가 있겠습니까?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부황.”

황제는 한참 후에야 손을 저었다.

“짐이 혼자 좀 있어야겠으니 그만 물러가라.”

태자는 손을 모아 인사하고 물러났다. 평소와 다른 황제의 모습에 그 또한 생각이 많아졌다. 아무래도 나이가 드셔서 저리 걱정이 많아진 것일 테지. 그는 애써 제 걱정을 눌렀다.

* * *

영십일은 영십오가 가져온 소식을 묵용감에게 알렸다. 궁에서 제일 총애를 받는 난비 마마와 백천범이 닮았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아무래도 몽달 황제와 남원 여제 사이에 깊은 인연이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몽달 황제 곁에 자신의 부인과 닮은 여자가 있다는 게 기이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몽달 황제와 백천범의 관계가 드러나기 전, 묵용감의 저울은 살짝 도원곡 주인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영십일의 해독제뿐만 아니라 동월 황제 입장에서도 그는 몽달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수십 년 전 전쟁을 치른 두 나라. 몽달은 표면적으로 나라 살림을 회복하려 애쓰는 것 같았지만 야심을 포기하지 않고 북쪽 국경에서 소란을 일으켰다. 그는 도원곡 주인과 협력하여 몽달을 압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몽달 황제가 그의 진짜 장인이라면? 백천범을 봐서라도 그의 계획을 조정해야 했다. 그는 야심 찬 군주가 아니기에 다른 나라의 내정까지 손대고 싶지 않았다. 도원곡 주인과 몽달 황제가 서로 싸우게 하고, 저는 관망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백천범이 이백 명을 데리고 성에 들어온 덕에 일을 진행하기가 쉬웠다. 소식을 퍼뜨려 몽달 황제의 귀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그가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다.

* * *

곤청락의 말을 들은 황제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룻밤 사이에 성호의 물이 붉게 변했다고? 누가 독을 푼 건 아니냐?”

곤청락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부황. 그저 색깔만 붉게 변했을 뿐 독은 없습니다.”

황제가 편전 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이 변하려고 하는구나!”

그때 오특민이 황급히 들어왔다.

“폐하, 팔왕께 큰일이 났습니다.”

“무슨 일이 났다는 말이냐?”

황제가 물었다.

“팔왕의 눈 하나를 새가 쪼았습니다.”

안색이 변한 황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새에게 눈을 쪼였다고?”

“그렇습니다. 팔왕께서 아침 식사 후 산책을 하시는데 어디선가 커다란 새가 나타나 팔왕의 눈을 쪼았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하인들이 금방 눈알을 빼앗아 왔지만 의관도 어쩔 도리가 없다 합니다. 그저 한쪽 눈만 남은 채…….”

이 소식은 황제에게 부고나 다름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황제가 육황자를 가장 아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황제가 제일 사랑하는 아들은 팔왕이었다. 그는 팔왕이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지내길 바라며 일찍이 그를 왕에 봉하고 저택을 내려줬다.

황위에 오르고 보니 황제가 되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고 너무 많은 한이 가슴에 남았다. 그는 누구보다 팔왕이 제 길을 따르지 않기를… 그저 귀한 왕이 되어 편안한 삶을 살길 바랐다.

황제의 비통한 얼굴에 모두들 숨도 감히 크게 쉬지 못했다. 묵직한 슬픔이 대전을 감쌌다. 이런 상황에 들어온 태자도 보기 드물게 엄숙한 얼굴이었다. 그는 황제 앞으로 가 인사를 올렸다.

“소자, 부황께 문안 올립니다.”

그사이 훨씬 늙은 것 같은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너도 팔왕의 일을 알고 있겠지?”

“소자도 방금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짐은 흉조를 보고 무슨 일이 벌어질 걸 알고 있었다. 이 몽달이 큰 화를 입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는구나.”

태자가 손을 모으고 대답했다.

“부황. 우리 몽달에 큰 화가 생긴 것은 분명하지만 흉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뒤에서 수작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소자가 이미 조사를 마쳤습니다.

열넷째는 누구의 원한을 산 적이 없는데 사냥터에서 자객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소자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어떤 조직이 움직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수가 저절로 탄 것도 역시 누군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입니다. 쌍두양의 일에 대해서는 소자가 그 유목민의 딸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아이 말이 새끼를 밴 암양이 있었다고 했지만 쌍두양을 낳은 양은 그 양은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도 누가 그 집 양을 바꿔치기한 것인지 모른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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