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4화
백천범은 침상에서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돌아누웠을 때 누군가의 품 안에 폭 들어가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는데 다행히 묵용감이 그녀의 입을 재빨리 막았다.
익숙한 체취가 자신을 감싸자 심란하던 백천범의 마음이 평온해졌다. 의지할 수 있는 기둥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녀는 건장한 허리를 감싸 안고 그의 품에 안겨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 일이에요?”
좀처럼 보기 힘든 그녀의 애교에 묵용감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찾아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한숨을 쉬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범아, 보고 싶어 죽을 뻔했소.”
그의 입맞춤에 백천범의 얼굴에도 빨간 꽃이 피어 있었다. 그걸 본 묵용감은 그녀의 얼굴에 몇 번이나 더 입을 맞췄다.
“저도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그의 얼굴이 차가워 손으로 감싸 쥐었다. 묵용감은 그녀 손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정말 따뜻하군.”
그는 겉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당신 북소리를 들었소. 기분이 안 좋소?”
그의 입맞춤에 간지러워진 백천범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묵용감은 장난을 멈추고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짐의 보물을 이토록 힘들게 하는 일이 무엇이오?”
백천범은 그를 향해 웃어 보였지만 손은 내리지 않았다. 묵용감은 그녀의 손을 잡고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물었다.
“말해 보오. 무슨 일이오?”
오랜 시간 동안 부부로 지내면서 그들에게는 어떠한 비밀도 없었다. 백천범은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태자 밀실에 있던 여제 초상화 이야기를 들은 묵용감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백천범의 생부는 몽달 황제가 분명하다. 그가 아니더라도 몽달 황실과 관계있는 자가 분명했다.
만약 그렇다면 몽달 황제는 그의 장인이니 당연히 몽달 황제 편에 서서 도원곡 주인에게 맞서야 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계산을 해 봤다. 그가 한참 말이 없자 백천범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해요?”
묵용감은 그녀의 동공 안에 자신이 비치는 것이 퍽 재미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에 입을 맞췄다.
“범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남자의 따뜻한 입술이 눈꺼풀에 닿자 백천범은 눈을 감고 대답했다.
“몰라서 당신에게 물어보는 거잖아요.”
“그를 만나고 싶소?”
묵용감이 물었다. 백천범은 가슴이 두근거려 머뭇거렸다.
“만약 착각한 거라면 어쩌죠?”
“틀리지는 않을 거요. 하지만 당신 어머니가 보통 사람이 아니니 그녀와 몽달 황제 사이에 어떤 원한이나 감정이 남아 있는지 우리는 아직 모르오. 게다가 여제는 몽달을 떠난 후 당신을 낳았으니 몽달 황제는 당신의 존재를 모를 것이오.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으니 적당한 기회에 신분을 밝혀야 하오.”
묵용감이 말했다.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태자는 어느 정도 내막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밀실에 초상화를 보관해 두지 않을 테니 말이에요. 일단 그 사람부터 시작해 볼까요?”
“이제 이복 남동생들도 생긴 것 아니오? 당신은 복도 많군.”
묵용감은 질투가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처남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천범의 마음을 그들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남제화 하나로도 벅찬데 몇이나 더 생기는 것은 싫었다. 백천범은 그런 그의 모습이 재미있어 양쪽 뺨에 한 번씩 입을 맞췄다.
“황제가 왜 이렇게 속이 좁아요.”
묵용감은 그녀를 꼭 안았다.
“짐은 그들이 당신 곁을 맴도는 게 싫소.”
“만약 몽달 황제가 정말 제 생부라면 그들은 제 남동생이에요.”
묵용감은 무시하는 듯이 코웃음 쳤다.
“출가외인이니 오라비든 남동생이든 신경 쓰지 마시오.”
백천범이 그의 코를 쥐었다.
“당신… 혹시 성아랑 동갑 아니에요?”
묵용감이 벌떡 몸을 일으켜 그녀를 덮쳤다.
“감히 남편을 놀리다니. 짐이 성아와 동갑인지 아닌지 당장 보여 주지.”
* * *
한밤중에 돌아가던 묵용감은 다리가 풀린 것인지 살짝 미끄러졌다. 흠칫 놀란 그가 발에 힘을 주자 기왓장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작은 소리였지만 적막한 밤에는 크게 울려 퍼졌다. 영십오가 고양이 소리를 흉내 내서 넘어갈 소리가 아니었다. 큰일 났다고 느낀 그는 몸을 낮춰 용마루에 찰싹 엎드렸다.
아랫쪽에 있던 보초들은 커다란 등불로 지붕을 비췄다. 묵용감은 조금이라도 몸을 일으키면 들킬 것 같아 둥글게 솟아오른 지붕에 숨었다.
“누구냐?”
아래에서 보초들이 소리쳤다.
“궁을 침입하는 자는 죽는다!”
맞은편 대전 지붕에 엎드려 있던 영십오와 영십육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둘은 눈빛을 주고받더니 기왓장 위를 달려가 커다란 새처럼 두 팔을 벌리고 궁궐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보초들은 큰 적이 나타난 것처럼 소리쳤다.
“자객이다! 자객을 잡아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영십오를 쫓아갔다. 새소리를 들은 묵용감은 안전한 것을 확인하고서 야음을 틈타 이리저리 몸을 옮기며 궁을 떠났다. 영십오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영구가 직접 가르친 사람이니 보초들을 따돌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한편 소식을 들은 태자의 안색이 나빠졌다. 편전 근처에 자객이 나타났다면 그 목표는 전 선생일 것. 난비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전 선생이 놀라진 않았을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시종을 불러 옷을 갈아입었다. 태자비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전하, 어딜 가세요?”
“편전 쪽에 자객이 나타나서 전 선생을 좀 살펴보러 가야겠소.”
태자비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직 자객을 못 잡았으니 내일 가세요. 전 선생 곁에는 뛰어난 수행원이 있잖아요. 별일 없을 거예요.”
늘 온순하고 현숙한 태자비가 저리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태자는 조금 의외였다.
“흠, 태자비는 전 선생에게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소?”
태자비도 자신의 말이 적절치 않았다는 걸 깨닫고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눈에 황급히 밖으로 나가는 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태자비는 이불 속에 누워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전 선생을 본 적이 있었다. 분명 남자인데도 자꾸만 이상한 경계심이 생겼다.
태자가 편전에 도착하자 영십삼이 문을 막았다.
“선생은 자고 있습니다. 내일 찾아와 주십시오. 전하.”
태자도 영십삼이 오직 전 선생에게만 충성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여기는 동궁이었다.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허용할 수 없었던 태자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바깥에서 이리 큰 소란이 났는데 전 선생은 깨지 않았다는 건가?”
“선생은 깊이 잠들어 깨지 않았습니다.”
“자객이 어쩌면 선생을 노리는 건지도 모르는데 걱정되지 않느냐?”
“소인이 들어가 확인하니 선생에게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태자는 그를 밀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영십삼이 쏜살같이 가 그를 막았다.
“꼭 들어가셔야겠습니까? 전하.”
태자는 노여운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여기는 동궁이다. 본궁이 못 갈 곳이 어디 있나?”
바깥에서 소란이 나자 백천범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쳐나올 것 같았다. 묵용감이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는데 태자까지 찾아올 줄이야. 태자와 영십삼의 팽팽한 대화를 들은 백천범은 서둘러 눈썹을 짙게 그리고 점까지 찍은 뒤에 밖으로 나갔다.
“전하, 이리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태자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어둑어둑한 곳에서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린 백천범은 까맣고 커다란 눈을 빛내며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태자는 그림 속에 있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한 듯 조금 당황했다. 태자는 민망해하며 살짝 허둥거렸다.
“선생…….”
백천범은 그가 왜 당황하는지 알고선 일부러 굵은 목소리를 냈다.
“소인을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전하.”
그 말에 태자는 정신을 차리고 웃었다.
“선생의 얼굴이… 아는 사람과 닮아서 착각할 뻔했네.”
“전하의 친구입니까?”
백천범의 말에 태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르신이네.”
“이상한 일입니다. 소인은 동월 사람인데 어떻게 전하의 어르신과 닮았을까요?”
백천범은 일부러 그를 떠보았다.
“선생도 남원에 가 봤다고 했지? 혹 남원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진 않은가?”
백천범은 소매에 손을 넣고 천천히 문가로 걸어갔다. 찬바람이 들어와 몸이 떨렸지만 마음속에는 불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녀는 태자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소인의 어머니가 남원 사람입니다.”
과연 태자의 얼굴이 달라졌다. 잠시 멍하더니 입을 열었다.
“선생의 어머니가 남원 사람이었군.”
“그렇습니다. 제 어머니가 남원 사람입니다.”
백천범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태자는 땅만 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든 태자의 눈에서 희망이 보였다.
“선생도 반은 남원 사람이니… 남원 여제도 알겠군?”
드디어 본론에 들어가자 백천범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토록 긴장한 건 몹시 오랜만이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선생은 남원 여제를 본 적이 있나?”
“있습니다.”
“선생은 그저 평민일 뿐인데 어찌 여제를 봤나?”
백천범은 감히 신분을 드러낼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온 마당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여제는 제 어머니의 친척입니다.”
태자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백천범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가 떠올랐지만 정말이지 여제와 관련된 사람일 줄은 몰랐다. 그저 친척일 뿐이라도 그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가 손을 비볐다.
“선생, 들어가서 이야기를 좀 나누지.”
영십삼이 눈살을 찌푸리자 백천범도 망설여졌다. 아무리 남장을 하고 있더라도 남녀유별이거늘. 그녀가 야밤에 태자와 한 방에 있었다는 걸 알면 묵용감이 질투할 것이 뻔했다. 그녀는 부군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급하게 생각할 건 없었다.
“소인이 좀 피곤합니다. 내일 다시 이야기 나누시지요. 전하.”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태자는 그 초상화를 본 후, 남원의 여제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굳게 믿어 왔다. 그는 어머니와 관련된 소식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감정이 격해지곤 했다. 전 선생이 여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면 그도 당연히 그의 사람이었다. 그는 흥분한 마음을 누르고 평소보다 훨씬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일찍 쉬게. 내일 본궁과 터놓고 이야기하지.”
태자가 돌아서 나가려는데 백천범이 그를 불러 세웠다.
“전하, 자객이 나타났다고 하셨는데 자객은 잡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