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3화
난비는 동궁 안을 헤집었지만 전 선생이란 자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전 선생을 슬쩍 감춘 듯했다. 그녀 마음속에서 의심이 점점 커졌다. 전 선생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길래 태자가 군주까지 기만하며 숨겨 주려는 것인가?
난비는 널찍한 궁전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황제가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여기는 동궁이오. 귀비가 이렇게 쳐들어오는 건 아무래도 안 될 일이오. 사람이 없는 건 물론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있습니다. 폐하, 신첩은 맹세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전 선생이라는 사람은 누가 숨겨 두었을 뿐 지금 동궁에 있습니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 귀비가 어찌 안단 말이오?”
“…….”
사람을 시켜 몰래 동궁을 감시했다고 말할 수 없기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폐하는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그녀가 말했다.
“왜 폐하가 전 선생을 불러들일 때마다 그가 없었을까요? 누군가 중간에서 막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태자를 말하는 거요?”
“신첩은 누군지는 모릅니다. 신첩이 알고 있는 건 폐하가 그자를 찾기만 하면 사라진다는 겁니다.”
황제도 태자가 전 선생에게 죄를 뒤집어씌울까 걱정되어 그자를 숨긴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면 죄를 묻기도 어려울 테니 말이다. 난비가 그런데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온 것을 보면 단단히 준비를 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한 수 위인 태자가 그를 숨긴 것이었다.
“근거 없이 멋대로 추측하지 마시오. 그저 우연일지도 모르지.”
결국 허탕을 친 난비는 마음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꾹 눌러야 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크게 뜨고 억울한 듯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밖에서 태자가 들어와 황제를 보고 인사를 올렸다.
“부황께서 행차하신지 몰라 소자가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가 그를 일으켰다.
“이곳을 지나다 난비가 매화 향기를 맡고는 꽃구경을 하고 싶다 해서 들어오게 되었구나. 네가 없을 줄은 몰랐다.”
“부황과 난비 마마께서 매화를 보러 오셨군요.”
태자가 어두운 얼굴로 총관을 돌아보았다.
“매화는 후원에 있는데 어째서 폐하와 난비 마마가 여기 계신 것이냐?”
총관은 몹시 황공해하며 대답했다.
“전하, 난비 마마께서…….”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니 누군가 이어받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난비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태자 전하의 손님이 여기 없나요?”
태자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마께서 본궁의 손님의 안부를 왜 물으십니까? 설마 일부러 전 선생을 찾아온 겁니까?”
난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태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전 선생과 마마 사이에 왕래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마마께서 이리 찾아오시는 건 예의에 벗어나지 않습니까?”
태자가 찬물을 끼얹었지만 난비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를 슬쩍 바라봤다.
“전 선생과 좌대사 사이에 앙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좌대사가 며칠 전에 해를 당했어요. 그 일로 본궁이 폐하와 함께 몇 마디 물어보러 온 것인데… 태자께서 전 선생을 감추는 것이야말로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닌지요?”
“난비 마마는 좌대사의 일이 전 선생 소행이라고 의심하는 겁니까?”
태자가 조소를 보였다.
“마마께서 전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을 텐데요. 전 선생은 태생이 문약해서 속세에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좌대사의 팔다리를 다치게 했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난비가 이런 말에 포기할 리 없었다.
“전 선생은 문약한 사람일지 몰라도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 그 곁을 지키고 있으니 전 선생이 말만 하면 좌대사를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요.”
태자 입에 걸린 미소에 조롱의 기색이 역력했다.
“좌대사와 앙금이 있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인데 난비 마마는 어째서 전 선생만 물고 늘어지시는 겁니까? 설마 모든 사람들을 잡아다가 심문이라도 하려 합니까?”
“본궁은 몇 마디 물어보겠다는 것뿐인데 태자 전하는 어찌 이리 전 선생을 감싸는 거죠? 왜 폐하와 본궁 앞에 그 사람을 데려오지 않는 건가요?”
“전 선생은 궁 안에 없는데 어찌 데려옵니까. 무리한 요구이십니다, 마마.”
“본궁은 전 선생이 지금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사람을 시켜 찾아봐도 되겠어요?”
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마는 본궁의 동궁을 어떤 곳이라고 여기십니까?”
두 사람의 싸움이 더욱 커지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모두 그만하오.”
그의 말에 난비와 태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이 지경이 되었으니 두 사람 모두 이제 그만 하시오. 좌대사의 일은 짐이 도사아문에서 엄밀히 조사하도록 하겠소.”
황제가 대놓고 태자를 감싸자 난비는 더 이상 소란을 피울 수 없었다. 그녀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씩씩거리며 나가 버렸다. 황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짓고는 태자에게 말했다.
“네가 이해해라. 어쨌거나 좌대사가 난비의 오라비 아니냐. 남매간에 정이 깊어 좀 과격해진 것이니.”
그는 잠시 말을 멈추다 웃었다.
“말을 하고 보니 짐의 탓이로구나……. 너무 총애해서 버릇이 없어졌어.”
“소자도 압니다. 마음에 담아 두지 않습니다.”
태자가 허리를 숙여 대답했다. 황제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문가로 걸어갔다. 그가 얼굴의 웃음기를 서서히 거두며 태자에게 말했다.
“좌대사,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으니 누가 복수했다고 한들 이상할 게 없지. 다만.”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황제는 잎사귀가 다 떨어진 나무를 바라보았다.
“이번 일은 실로 수상쩍다. 감히 호랑이의 수염을 뽑다니 간이 큰 녀석이다. 짐 생각엔 복수 따위의 일이 아닌 것 같으니 네가 조용히 알아보거라.”
“알겠습니다. 소자가 보기에도 이상합니다. 난비 마마와 좌대사의 사이를 모르는 이가 없는데, 그런 짓을 하다니요. 아무래도 단순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소자가 진상을 밝히겠습니다.”
황제가 길게 탄식했다.
“곧 해가 바뀔 텐데 뒤숭숭하구나. 십사황자에게 자객이 들고 신수가 불타질 않나, 쌍두양에 좌대사가 팔다리를 다치고…….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니, 짐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불안하구나.”
“걱정 마십시오 부황. 어쩌다 보니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을 뿐입니다. 소자가 범인을 잡고 사건을 해결해서 부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네 능력이 뛰어난 건 짐도 안다. 수고해라.”
태자는 얼른 허리를 굽혔다.
“부황의 근심을 덜어 드리는 것은 수고가 아니라 소자가 당연히 할 일입니다.”
황제를 배웅한 태자는 서둘러 밀실로 갔다. 백천범은 탁자에 앉아 한가로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영십삼은 나무 기둥처럼 그녀 뒤에 서 있었다. 태자는 환하게 웃으며 공수했다.
“선생, 불편하진 않았나?”
백천범은 손에 든 찻잔을 돌리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소인을 위해서 그리하셨으니 소인이 전하께 감사를 드려야지요.”
“난비는 본궁의 트집을 잡으려고 선생을 찾는 것이네. 본궁 때문에 선생까지 피곤하게 했군.”
백천범이 웃었다.
“그렇다면 왜 소인이 폐하를 뵙고 상황을 설명 드리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까?”
“안 되네. 부황께서 난비의 말만 들으실 것이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백천범이 입을 열었다.
“난비 없이 단독으로 폐하만 뵌다면 어떻습니까?”
태자는 뭔가를 짐작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생은 정말 폐하를 뵙고 싶은 건가?”
백천범의 마음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까부터 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황제를 만나면 그녀의 마음속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하지만 태자의 무거운 얼굴을 본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소인,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 * *
태자의 밀실에서 여제의 초상화를 발견한 백천범은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생부를 입에 올린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리워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가끔 생부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하기도 했다.
키는 클까, 뚱뚱한 사람일까? 얼굴은 잘생겼을까? 당연히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여제의 눈에 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의 생부가 일국의 황제일 거라는 생각은 한 적 없었다.
그동안 생긴 일을 떠올려 보면 정말이지 기묘했다. 마치 하늘이 그녀를 이끌기라도 하듯 그녀를 몽달 황궁으로 데려온 것이다. 몽달 황제가 그녀의 생부일까?
그 답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몽달 황제를 만난다면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처럼 그리움은 컸지만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은 추웠다. 몸을 움츠린 그녀는 복도에 서서 차가운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 뒤에 있던 영십삼이 말을 걸었다.
“선생, 밤이 깊었으니 어서 쉬십시오.”
그때 양피 북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북으로 다가가 북채를 잡고 마구 두드렸다. 묵용감에게 어떤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껏 북을 두드려 심란한 마음을 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북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자 잠자리에 들었던 태자가 깨어났다. 성격 좋은 태자비도 볼멘소리를 했다.
“전하는 어떤 친구를 사귀신 건가요? 깊은 밤마다 북을 치면 어찌 잠을 자란 거예요?”
태자가 난처한 듯 웃었다. 전 선생은 다 좋았지만 저 북을 쳐 대는 버릇만큼은 참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저 북은 치워야 할 듯했다.
얕은 잠에 들었던 묵용감은 북소리를 듣자마자 귀가 쫑긋해졌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보아도 북소리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시끄러운 소리였다. 하지만 북을 치는 백천범의 답답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부인의 근심이 자신의 근심인 사람이었기에 백천범의 걱정은 곧 그의 걱정이었다. 맥락 없이 어지러운 북소리를 들은 그는 방 안을 서성이다 시위 둘을 불렀다. 그리곤 자신의 입궁 계획을 알린 뒤 몇 가지 분부를 내렸다.
궁에 가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지만 한 번 다녀온 경험이 있으니 영십일과 영십구는 막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영십일이 황제가 방 안에 있는 것처럼 꾸몄다. 묵용감이 옷을 갈아입고 야음을 틈타 조용히 밖으로 나가니 십오와 십육이 밖에서 그를 맞았다.
같은 길이었다. 그런데 동궁을 지키는 병력이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묵용감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태자는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백천범의 도망 때문일까? 혹 누군가의 습격을 염려한 것일까.
그는 대들보에 금 갈고리를 걸고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좀처럼 순찰하는 병사들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십오가 하는 수없이 작은 돌멩이를 들어 멀리 던졌다. 그 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소리를 따라 움직이자 묵용감은 그제야 조용히 아래로 내려와 복도를 따라 백천범의 방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