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2화
친오라버니가 팔과 다리를 다쳤으니 난비의 마음이 아플 거란 건 황제도 이해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해막도가 원망스러웠다. 팔도 아직 낫지 않았는데 무슨 말을 탄다고……. 한 손으로 말을 타니 말에서 떨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 당연한 일에 난비가 고집을 부리니 짜증이 났다.
하지만 황제에게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황제는 짜증이 났지만 그녀가 잠잠해질 때까지 달래 주었다.
난비도 황제가 그저 자신을 달랠 말만 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라비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황제는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서 해막도를 어쩌지 못했지만 이런 일을 직접적으로 해결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녀의 눈을 속일 뿐이다.
난비는 직접 사람을 써 조사해 보았다. 그리고 그날 성 외각 목장에서 해막도가 태자의 손님에게 잘못을 저질렀다가 된통 당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전 선생과 해막도의 충돌이었지만, 해막도를 상대한 자는 태자였다. 난비는 이가 갈렸다. 태자를 직접적으로 상대할 순 없지만, 태자의 사람이라는 전 선생은 혼을 내 줄 수 있을 터. 전 선생을 붙잡는다면 태자의 뺨을 때리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전 선생이 아직 동궁에 있다는 걸 알고 바로 황제에게 고했다. 물론 태자가 한 짓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해막도와 전 선생의 원한 관계를 설명하며 그 후에 해막도가 팔을 잃고 다리가 부러졌다고 언급할 뿐이었다.
태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말에 황제 또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난비가 이틀이고 사흘이고 그를 찾아와 귀찮게 굴 것이 뻔했다. 결국 그는 동궁으로 사람을 보내 전 선생을 불렀다.
황제의 분부에 아랫사람들도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고 얼른 움직였다. 그는 동궁에 막 도착해 궁에서 나오던 태자를 보고 인사를 올렸다.
“전하, 폐하께서 전 선생을 모셔오라 하십니다.”
황제가 어찌 전 선생을 알고 불러들이는 것이지? 태자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폐하가 무슨 일로 전 선생을 찾으시는 거냐?”
“그게…….”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시종이 목소리를 낮췄다.
“난비 마마께서 전 선생이 좌대사의 일과 관련이 있다 말씀하셔서…….”
태자는 그제야 난비가 해막도에게 일어난 화를 전 선생에게 전가하려는 것을 알았다. 백천범이 해막도의 일에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면 태자인 그도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전 선생은 줄곧 동궁에 머물고 있었으니 그녀의 무고는 태자가 증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백천범을 보여서는 안 된다. 깊이 생각하던 태자의 입가에 냉소가 어렸다.
“공교롭게도 전 선생은 오늘 출궁하였다.”
태자의 말에 시종도 더는 그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 시종의 보고를 들은 황제는 한숨 돌렸다. 황제 역시 전 선생이라는 자를 잘못 건드려 태자와 불화를 겪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이 상황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이다. 하지만 난비는 의심스러웠다.
“줄곧 동궁에 있던 사람이 폐하가 찾으니 출궁했다고 하는 겁니까? 태자 전하가 일부러 숨기는 건 아닌지요. 신첩은 이상하네요. 그 전 선생이라는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태자 전하가 이렇게 긴장하는 걸까요?”
그녀가 점점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자 황제가 헛기침을 했다.
“태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 공연한 생각 마시오. 그 전 선생이라는 사람은 줄곧 궁에 머물렀다고 하니 짐의 생각에는 좌대사의 일과 관련이 없는 것 같소.”
난비는 태자가 전 선생을 숨기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감추는 것을 보니 분명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반드시 그 꿍꿍이를 들춰내고 말리라!
* * *
난비는 그날부터 동궁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동궁 사람들은 태자에 대한 충심이 강해 사람을 사기가 쉽지 않았다. 자칫하면 이쪽의 동정이 드러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동궁 밖에 사람을 배치해야 했다.
혹 태자가 가짜를 데려다 황제를 속일까 걱정한 그는 멀리서 전 선생을 확인한 적도 있었다. 태자에게 놀아날 일이 없도록 그 생김새를 미리 확인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비는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불탑에 가자고 황제를 졸라 함께 불공을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궁 앞을 지나던 중 그녀는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가 이리 향기롭지요?”
“아마도 동궁에 매화꽃이 피었나 보오.”
황제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발걸음을 멈춘 난비는 동궁을 보며 황제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신첩, 매화를 보고 싶습니다. 폐하.”
황제는 아이처럼 간절한 난비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그게 뭐가 어렵겠소? 보고 싶으면 들어가면 되지.”
난비가 교태를 부리며 황제의 손을 잡았다. 황제도 그 손을 꼭 잡고 성큼성큼 동궁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가 들어오자 동궁 총관이 얼른 달려 나가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태자는?”
황제가 물었다.
“폐하, 태자 전하는 당직실에 가셨습니다. 소인이 바로 사람을 보내 전하를 모셔오겠습니다.”
황제가 손을 저었다.
“아니, 짐은 태자를 보러 온 게 아니다. 난비가 매화 구경을 하고 싶다 하기에 데리고 왔다.”
총관은 얼른 일어나 길을 안내하며 웃었다.
“올해 매화가 아주 탐스럽게 피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도 어제 폐하와 난비 마마를 모셔와 매화를 보여 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난비는 웃는 듯 마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태자 전하가 참 사려 깊으시구나.”
일행이 뒷전으로 향하던 중 난비가 복도에 놓인 북을 보더니 물었다.
“저건 뭐냐?”
“양피 북입니다.”
총관이 대답했다.
“본궁도 양피 북인 건 안다. 저게 왜 여기 있느냐? 북을 치는 사람이 있단 말이냐?”
“태자 전하의 손님 전 선생이 여기서 북을 칩니다.”
난비는 새까만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태자 전하의 귀한 손님이 오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자의 성이 전 씨로구나. 폐하께서 그를 한번 보고 싶어 하시는데 전 선생이 궁에 계신지 모르겠네.”
황제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난비가 매화를 구경하겠다는 것은 핑계고 사실은 그에게 전 선생이란 사람을 보여 주려 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미 끝난 일에 난비가 꼬투리를 잡는 게 짜증났지만 황제는 조금도 그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정말 공교롭게도 전 선생은 오늘 출궁하였습니다.”
총관이 대답했다. 난비가 냉소했다.
“그래? 전 선생이 출궁한 게 확실한가?”
전 선생은 분명 동궁 대문도 나선 적이 없었다.
“확실합니다.”
“폐하 앞에서 거짓을 고하는 것은 군주를 기만하는 큰 죄이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하지만 전 선생은 정말 출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상하구나. 어떻게 매번 폐하가 전 선생을 부를 때마다 출궁했다는 것이냐?”
“그게, 참으로 공교롭긴 하지만 소인도 잘 모릅니다.”
총관이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난비가 잰걸음으로 궁에 들어갔다.
“전 선생이 일부러 폐하를 피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본궁이 확인해 봐야겠다.”
말릴 틈도 없이 난비가 움직이자 황제도 그 뒤를 따라갔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애첩이었기에 성질을 부리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기어이 전 선생이라는 사람에게 화를 뒤집어씌우려 한다면 그 말을 들어주는 수밖에.
한편 전각 안, 땀을 뻘뻘 흘리며 안으로 들어온 태자가 전 선생에게 말했다.
“어서 본궁을 따라오게. 폐하가 오셨네.”
백천범은 뭔가 이상했다.
“왜 가야 해요? 제가 폐하를 뵈면 안 되는 겁니까?”
태자는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선생에게 자세히 설명할 테니 우선 피하게. 이러다 늦겠어.”
백천범은 오랫동안 태자를 봐 왔지만 이토록 긴장한 얼굴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곧장 태자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오른쪽 측문을 나서 좁은 복도를 지나 서재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태자가 장식장에 있는 장치를 움직이니 벽에 걸려 있던 커다란 초상화가 움직이며 그 뒤로 컴컴한 입구가 드러났다. 태자가 먼저 들어가고 백천범과 영십삼이 그 뒤를 따랐다. 얼마간 걸어가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천장 위에서 초가 조용히 타올라 밀실을 대낮처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방 안에는 책상과 둥근 의자, 커다란 나무 상자, 장식장 등 자단나무로 조각한 가구들이 즐비했다. 은은한 향기가 방 안에 맴돌아 우아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선생은 여기서 좀 기다리게. 폐하가 돌아가시면 본궁이 선생을 데리러 오겠네.”
백천범이 그를 불러 세웠다.
“전하, 소인이 어째서 폐하를 뵈면 안 되는지 아직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해막도가 팔다리를 다친 일은 선생도 알겠지. 전에 목장에서 선생이 해막도와 언쟁을 했던 일 때문에 난비가 해막도의 부상이 전 선생과 관련되어 있다고 황상께 말씀을 올렸다네. 황상이 이렇게 오신 것은 그 죄를 물으러 오신 게 아닌가 싶어.”
“소인은 요 며칠간 줄곧 동궁에 머물렀으니 전하가 증명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백천범이 말했다.
“선생은 잘 모르지만 난비는 몹시 총애를 받고 있어 황상은 그녀 말이라면 모두 믿으시네. 난비가 선생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것마저도 들어주실 분이네.”
“그렇다면 혼군 아닙니까?”
화가 난 백천범은 미처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을 뱉었다. 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조심하게, 선생. 화는 입에서 나오는 것일세.”
백천범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자가 가고 난 후 그녀는 밀실을 돌아보다 영십삼에게 말했다.
“궁에 사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밀실을 좋아하는 걸까? 남원에도 있고 우리 동월 황궁에도 밀실이 있잖아요.”
영십삼은 그 이유를 말하기가 곤란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백천범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했다.
“물론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겠지요? 삼엄한 황궁은 이 세상의 가장 난공불락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반면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하죠. 군왕들도 죽음을 두려워해요.”
뒷짐을 진 그녀는 벽에 걸린 산수화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녀는 별안간 손을 뻗어 그림 위 손가락만 한 크기의 자국을 눌러 봤다. 선명하진 않았지만 어떤 자국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림을 누르니 머리 위에서 초상화 한 폭이 떨어졌다. 천천히 펼쳐진 초상화에는 남다른 기품을 가진 미인이 그려져 있었다. 깜짝 놀란 백천범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했다. 평소에 아무런 동요가 없던 영십삼도 그림 속 사람을 보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마십니까?”
백천범도 처음에는 자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와 닮은 사람이었을 뿐 그녀가 아니었다. 얼굴은 놀랍도록 닮았지만 그녀에게는 그림 속 미인처럼 깊은 곳부터 느껴지는 아름다운 기품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 속 미인이 이상하리만치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서서히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본 여제는 초상화 속 미인처럼 젊진 않았지만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아니에요. 이건 남원의 여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