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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41)화 (940/1,192)

제941화

묵용감은 북소리를 세 차례나 듣고 나서야 자신이 들은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백천범이 보낸 소식은 이러했다.

‘자신을 본 근비의 표정이 마치 그녀를 예전부터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이상했다.’

묵용감은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백천범이 계후와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던 그의 생각이 맞았다. 백천범이 계후를 닮은 건 아니더라도 근비가 아는 누군가와 닮은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순간 묵용감의 머릿속에 심상치 않은 생각이 스쳤다. 세상에서 백천범과 제일 닮은 사람은 여제다. 만약 근비가 백천범을 통해 떠올린 사람이 여제라면, 이는 여제가 몽달에 나타났었다는 뜻이다. 백천범을 대하는 태자의 태도까지 생각해 보면 여제는 단순히 몽달에 다녀간 게 아니라 궁에도 간 적 있다는 말이다.

그는 백천범의 나이와 백장간이 이야기한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여제는 동월에서 백천범을 낳았고, 몽달에서 남원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동월을 거쳐야 하니…….

황당한 생각이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제대로 확인을 해 봐야 했다.

백천범이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엔 한이 있었다. 누군들 가족의 정이 그립지 않을까? 여제는 그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만약 생부가 살아 있다면……. 그라도 그녀에게 조금의 위안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그가 줄곧 백천범을 대신해 생부를 찾는 이유였다. 그는 그녀의 인생에 어떠한 아쉬움도 남지 않길 바랐다.

원래는 영십일이 먹을 해독제만 얻으면 바로 떠나려 했지만, 이제 보니 어려울 것 같았다.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사이. 누군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히고 이야기했다.

“노야, 열여드레까지 이제 겨우 열흘 남았습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묵용감이 힐끗 쳐다보았다.

“아직 열흘이나 남았는데 급할 게 뭐 있나?”

“알아내셨습니까?”

묵용감은 알 수 없는 웃음만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곧 영십일이 다가왔다.

“노야,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진 않았나?”

“아닙니다. 부인께 선견지명이 있어 저희가 하려는 일에 사람이 모자라지는 않습니다.”

영십일이 말했다. 묵용감이 살짝 미소 지었다.

“부인이 원래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사전에 철저하게 대비하는 사람이지. 그녀가 예상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

여기까지 말한 그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신중하고 빈틈없는 백천범이 그가 생각한 것을 떠올리지 못할 리가 없다. 그녀가 이상한 생각을 시작한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이런 때에 그녀 곁에 있어 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활발한 성격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데 그가 오히려 앞서 나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는 한숨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

* * *

이튿날은 날씨가 흐렸다. 해막도는 평소대로 상림군을 이끌고 패륜이 거리를 순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거리의 사람들이 칼 장수를 둘러싸고 목청 높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칼 괜찮네, 칼날이 아주 날카로워.”

“그러게… 아주 좋아. 비싼가? 비싸지 않으면 내가 사겠소.”

“칼집도 아주 정교한 것이 보통 물건이 아니야! 어느 대갓집 물건이겠지?”

해막도는 걸음을 멈추고 흘깃 돌아보았다. 칼 주인이 쇠몽둥이에 칼을 휘두르자 불꽃이 일며 작은 철 조각들이 잘려 나왔다. 그 광경을 본 주변 사람들이 환호했다.

“쇳덩이를 흙덩이처럼 잘라 내다니… 과연 보검이야!”

“대단한데, 형씨! 이 칼 얼마요?”

부리부리한 눈과 두툼한 입술, 건장한 체구의 칼 장수 사내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오백 냥마은이오.”

값을 듣자 옆에서 구경하던 백성들이 다시 시끌시끌했다.

“너무 비싸잖아! 오백 냥마은이면 낙타 세 마리를 살 수 있는데.”

“그러니까… 조금만 더 싸게 해 주면 내가 사겠소.”

“제값을 하는 물건이라 깎아 줄 수 없소! 그 값을 받아야 하오.”

칼 장수 사내가 단호하게 나왔다.

“아니… 뭘 그렇게 빡빡하게 구나. 한 푼도 안 깎고 어찌 장사를 한단 말이오?”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칼 장수 사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칼을 사려던 사람들도 부루퉁해졌다. 마음에 드는 칼이었지만 값을 조금도 내려 주지 않으니 말이다. 해막도는 한참 바라보다 수하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상림군이 곧 거들먹대며 큰소리로 외쳤다.

“비켜라, 비켜! 우리 좌대사 대인의 길을 막지 말고 모두 비켜라!”

상림군은 역귀 같은 자들이었다. 사람들은 감히 그들의 심기라도 건드릴까 싶어 헐레벌떡 자리를 피했다. 자리가 정리되자 해막도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칼 장수를 훑어보았다.

“어디서 난 칼이냐?”

칼 장수는 그가 무섭지도 않은 듯 차갑게 말했다.

“내 거요.”

“네 것이다?”

해막도는 입을 열고 음흉하게 웃었다.

“내가 보기에는 훔친 것 같구나.”

“허튼소리!”

멀리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좌대사에게 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목숨이 여러 개인 것일까? 과연 해막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조정 관리를 모욕하다니! 간도 크구나. 여봐라, 저자의 칼을 이 대인에게 가져와라.”

칼 장수는 얼른 칼을 들어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뭐하는 짓이냐?”

“뭐하는 짓?”

해막도는 코웃음을 쳤다.

“그 칼을 훔친 것 같으니 상림아문으로 가 이야기를 해야지!”

칼 장수는 크게 화를 냈다.

“이건 모함이오!”

해막도는 그와 말도 섞기 귀찮은지 수하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수하가 칼 장수를 붙잡았다. 하지만 칼 장수는 날랜 동작으로 움직여 해막도를 끌어당겼다. 해막도의 반응 속도도 뒤지지 않아 그를 한 손으로 밀쳐 버렸다.

칼 장수 사내는 손목을 비틀어 해막도를 눌렀다. 그리고 순간 해막도의 눈앞에서 검광이 번쩍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누구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순식간에 시뻘건 선혈이 사방으로 솟구치더니 한쪽 팔이 덩그러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해막도 본인은 물론 누구도 반응할 수 없었다. 순간 통증이 엄습하자 해막도는 자신의 팔이 잘려 나간 걸 알아차렸다. 그는 돼지라도 잡는 듯 비명을 질러댔다.

그제야 상림군이 일제히 칼 장수를 에워쌌다. 하지만 사내는 빠르게 인파 속으로 도망쳐 갔다. 상림군이 뒤를 쫓는 바람에 사람들의 소란이 더해져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상림군은 뿔뿔이 흩어져 그의 뒤를 밟으려 했지만 사내는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해막도는 고통에 정신을 잃은 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상림군은 칼 장수 사내는 포기한 채 얼른 잘려 나간 팔을 집어 들고 해막도를 의관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의원도 이미 잘린 팔을 붙일 수는 없었다. 지혈로 목숨을 붙잡아 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본 백성들은 저마다 통쾌해하며 소식을 옮겼다. 누군가 상림군 좌대사의 팔을 자른 일은 어느새 패륜이 골목골목마다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 * *

해막도가 거리에서 팔을 잘린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놀라기는 했지만 그 후의 반응은 제각기였다. 어떤 사람은 통쾌해했고, 어떤 사람은 고소하게 여겼다. 누군가는 동요하지 않았고 누군가는 불안해했다. 물론 노발대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난비는 황제에게 달려가 읍소했다.

“폐하, 좌대사는 매일 비바람을 헤치며 패륜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내세울 만한 공적은 없다 해도 그간 누구보다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천자의 발밑에서 조정 관리를 해한단 말입니까? 신첩의 오라비를 위해 이 일을 해결해 주십시오!”

하지만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황제도 그를 고발하는 상주서가 수두룩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난비의 체면을 봐서 못 본 척 넘어갈 뿐이었다. 이번 기회에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날뛰는 해막도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는 난비를 품에 안고 나지막하게 위로했다.

“짐이 사람을 풀어 알아보니 이번 일은 좌대사에게도 잘못이 있었소.”

난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가리고 오열했다.

“신첩의 오리비가 팔을 잃었거늘… 폐하는 제 오라비를 탓하시는 겁니까?”

그녀가 우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황제는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달랬다.

“그럴 리가! 짐은 그리 말하지 않았소. 울지 마시오. 이 일은 짐이 반드시 진상을 밝히고 범인을 잡아 주리라. 그대의 한을 풀게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난비는 그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신첩을 속이지 마십시오. 폐하, 꼭 그렇게 해 주셔야 합니다.”

황제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짐이 언제 그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이 있었소. 눈이 부으면 보기 싫소. 울지 마시오.”

난비는 그의 품에서 몸을 꼬다가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 똑똑한 그녀는 적당한 때 멈출 줄 알았다. 황제가 정말 범인을 잡아 줄진 몰라도 해막도를 섭섭하게 하진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해막도에게 상을 내리고 관직도 반 계급이나 높여 주었다.

범인을 잡는 방이 거리 곳곳에 나붙고 상림군이 대대적인 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범인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태자를 통해 이 소식을 들은 백천범은 무언가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이 일을 굳이 묵용감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묵용감이 했든 아니든 해막도 같은 악인은 쓴맛을 볼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 괴롭힘을 당한 백성들이 수도 없으니 정의가 실현된 셈이다.

하지만 이 일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해막도는 말을 타다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지붕이 새는데 밤새 비가 내리는 것처럼 재앙이 겹쳐서 일어난 것이다.

백성들은 너무나 통쾌한 나머지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열기 직전이었다. 우두머리의 비보에 졸개들도 얌전해졌고 백성들의 생활은 훨씬 더 편안해졌다. 하지만 난비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를 찾아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폐하, 좌대사의 일을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팔도 잘린 마당에 다리까지 부러졌습니다. 이건 분명 누군가 고의로 조정 관리를 해하려는 것입니다. 반드시 제대로 조사를…….”

황제는 퉁퉁 부은 애첩의 눈을 보고 마음이 아파져 그녀를 달랬다.

“울지 마시오. 짐이 소식을 들어보니 좌대사 혼자 말에서 떨어진 것이라 하더군. 한쪽 팔을 잃은 바람에 균형을 잃은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해한 것은 아니오. 그저 사고였소. 짐도 불안하니 아예 좌대사 자리도 잠시 쉬고 있는 게 낫겠소. 그가 한가로이 지낼 수 있게 짐이 후작으로 봉하도록 하겠소.”

난비는 빨개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팔도 잃고 다리도 부러졌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리 공교로운 일이 있단 말입니까? 이는 필시 누군가 그를 해하려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배후에 있는 사람을 잡아내지 않는다면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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