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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40)화 (939/1,192)

제940화

곤청락은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이 일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적당한 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저택에 문객이 삼천이나 되는데도 진정으로 근심을 털어놓을 벗은 없었다.

그는 말을 타고 무작정 거리를 누볐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금수포목점 앞에 도착했다. 때마침 묵용감이 가게에 나와 있었다. 창문으로 그의 모습을 발견한 묵용감은 서둘러 밖으로 나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육황자 전하께서 찾아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곤청락은 멍한 표정이었다. 포목점에 올 생각은 없었고 그저 앞을 지나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묵용감을 보는 순간, 그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안 그래도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는데 마침 적당한 상대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묵용감이 퍽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찾아온 문객들보다 훨씬 더 나았다. 그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황 주인장, 가게에 있었군.”

묵용감은 곤청락을 가게 내부의 따뜻한 손님방으로 데려온 뒤, 직접 술을 데우며 수하에게 안주를 차리게 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실 생각이었다. 곤청락이 말했다.

“황 주인장, 주인장이 보내 준 옷감을 모비께서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네. 참 고맙네.”

“그저 작은 성의인 것을요. 그리 언급하실 만한 것이 못됩니다.”

묵용감은 그에게 술을 따라 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전하, 계후의 초상화 일은 알아 보셨습니까?”

곤청락이 코를 문지르며 웃었다.

“물어보았지만 초상화 같은 건 없었네. 우리 모비마저도 계후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시는데 태자가 기억하겠는가? 내 보기에 그저 전 선생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네.”

“궁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으니 근비 마마께서 기억하지 못하셔도 분명 누군가는 기억할 겁니다.”

“그럴 리가.”

곤청락이 말했다.

“계후를 봤던 이들은 죽거나 궁을 나갔다네. 그 뒤에 온 자들은 아예 계후의 모습을 보지 못했지.”

묵용감이 손안에서 술잔을 가볍게 돌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오직 근비 마마께서만 계후를 보셨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나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지. 모비께서 입궁하시기 전에, 부황께서 비빈들을 전부 출궁…….”

그가 별안간 말을 멈추고 웃음을 터뜨렸다.

“케케묵은 옛일이니 지금 얘기해 봤자 별 소용도 없지만.”

묵용감이 그의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치고는 술을 비웠다. 눈꺼풀이 아래로 드리워질 때,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 * *

태자는 백천범이 동궁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허락해 주었다. 모든 시위와 시종, 궁녀들 모두 백천범이 태자의 귀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깍듯이 예를 갖춰 대해 주었다. 멀리서도 그녀가 보이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만약 백천범이 일반 백성이었다면 과한 대접에 황송해했을 테지만, 그녀는 이미 십여 년간 황후로 지내왔기 때문에 이런 궁중 예절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고개만 살짝 숙이며 그들을 지나쳤다.

작은 문에 다다르자 보초 한 명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백천범이 문을 나서려고 하자 그가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선생, 나가시면 안 됩니다. 밖으로 나가면 불탑이 있습니다.”

백천범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문 안쪽에는 번쩍이는 사찰이 세워져 있었다. 소박한 궁전과 비교하면 훨씬 정교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는 불탑의 옆면만 보였다. 그녀가 시위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형님, 한 번만 가서 보고 오고 싶은데 안 될까요? 멀리 가지 않고 문기둥에 새겨진 조각만 보고 올게요.”

보초는 조금 난처했다. 태자는 전 선생이 동궁 안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허락했지만 동궁 밖을 나가는 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귀한 손님이 이리 예를 갖춰 형님이라고 부르며 부탁하는데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서 기둥을 볼 수 있으니 빨리 다녀오십시오. 너무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저 나무라면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이니 금방 보고 돌아오면 분명 별 탈 없을 것이다.

백천범은 옷자락을 들고 문을 넘어섰다. 몇 발짝 내딛자 불탑의 정면이 보였다. 백천범은 고개를 들고 기둥에 새겨진 조각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네 개의 기둥엔 풀이나 꽃, 새와 짐승의 양각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또 한쪽 기둥에는 사람이 조각되어 있기도 했다.

백천범이 이렇게 거대한 조각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천천히 조각을 보는데 몇몇 궁인들이 궁비를 둘러싸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 궁비는 백천범을 보고 귀신이라도 본 양 공포에 질린 얼굴을 했다. 백천범은 혹여 문제가 생길까 봐 서둘러 공수하며 인사를 건네곤 자리를 떴다.

다시 동궁에 돌아온 백천범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궁비는 여전히 넋을 잃은 채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천범은 담장 뒤로 재빨리 몸을 숨기고 조용히 보초에게 물었다.

“저분은 누구시죠?”

보초는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 또한 불탑에 근비가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근비 마마께서 낯선 사내와 마주쳤으니 위에서 추궁한다면 그는 뼈도 못 추릴 것이다.

“근비이십니다.”

백천범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육황자 곤청락의 모비가 근비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한데 어찌 저리 기이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단 말인가?

다시 고개를 내밀어 보니, 근비는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그녀의 겁에 질린 얼굴은 백천범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아무리 낯선 외간 남자를 만났다고 해도 그렇게 놀라진 않을 터. 오히려 외간 남자를 보면 호통을 치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 아닌가?

백천범은 조용히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영십삼도 방금 그 장면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조용히 물었다.

“선생, 방금 그자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백천범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저 멀리 있는 궁전의 검은 기와를 바라보았다.

“어디가 이상한 것 같아요?”

“꼭 선생을 아는 듯했습니다.”

백천범이 그를 바라보았다.

“십삼도 그리 생각했단 말이죠?”

그녀는 손을 소매에 꽂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도 십삼의 생각과 똑같았다. 근비는 분명 그녀를 아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마 근비가 아는 누군가와 그녀가 닮기라도 한 걸까?

태자는 자꾸 그녀의 출궁을 막았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참고 이해해 주면서까지 말이다. 그 이유 역시 백천범이 누군가와 닮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는 별안간 조금 우스웠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까닭 없이 그녀를 끌어들였단 말인가?

처소로 돌아온 그녀는 곧장 복도로 걸어가 북채로 북을 세게 내리쳤다. 대낮에 전해지는 북소리는 밤만큼 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십오와 십육이 소식 전달을 책임지고 있으니 어떻게든 묵용감에게 알려 줄 것이다.

그녀는 묵용감이 확실히 전달받을 수 있도록 반 시진마다 북을 반복해서 쳤다. 만약 그가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면 북을 쳐서 그녀에게 암시를 줄 것이다.

* * *

태자는 밀실에 서서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며 한동안 넋을 놓았다. 한 여인의 초상화였다. 화려한 복장에 손에는 둥근 부채를 들고 있었다. 그저 그림일 뿐이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짙은 눈썹과 눈가에 옅은 웃음을 띠고 있는 모습은 사람의 혼까지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자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전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렇게나 닮았다니… 자신과 그녀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닐까?

그는 계후가 낳은 자식이지만, 이미 모후의 모습은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초상화 속 여인이 계후인지 아닌지도 확실히 몰랐다. 어쩌면 어머니가 맞을 수도 혹 틀릴 수도 있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초상화 속 여인을 황제가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난비 또한 이 여인을 대체하기 위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 난비 또한 초상화 속 여인과 아주 조금 닮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전 선생은 사내이긴 해도 생김새나 느낌이 초상화 속 여인과 매우 닮았다. 그가 백천범을 억지로 궁에 묶어 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초상화 속 여인이 그의 생모인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황제는 근비를 정실로 삼아 곤청락을 태자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리하지 않았다. 아마 그의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오랜 시간 그는 줄곧 이 일에 얽매여 왔다. 그의 어머니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암암리에 조사를 해 보기도 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탓에 이미 알아낼 길이 없었다. 결국 그는 이 문제를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 선생이 나타난 것이다. 하늘이 그에게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를 던져 준 것 같았다. 그는 이번에 반드시 이 일의 진상을 밝히리라 다짐했다.

밀실에서 나온 태자는 전 선생의 처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오자 그가 웃어 보였다. 북을 잘 치는 줄 알아 북을 하사했건만… 음률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난잡한 소리였다. 어찌 저리 뻔뻔하게 북을 친단 말인가? 아랫사람들이 흉을 볼까 걱정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에 복도 아래에서 북을 치고 있는 전 선생의 모습이 보였다. 북을 치는 힘이 제법이었다. 저런 가녀린 체구에서 어찌 저런 힘이 나오는 걸까. 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선생, 오늘은 또 어찌 북을 치는가?”

백천범은 잠시 더 북을 친 뒤에야 동작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심심하리만큼 한가해서 잠시 쳤습니다.”

“이곳 동궁이 선생에게는 무료한 곳인가 보군.”

“전하께서도 소인이 무료하다는 걸 아셨으니 이제 출궁하게 해 주시지요.”

태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선생은 아직 바깥의 재미난 일을 본궁에게 들려주지 않았다네. 한데 어찌 가겠다는 것인가.”

백천범이 물었다.

“전하, 언제 듣고 싶으십니까? 소인이 언제든 들려드리겠습니다.”

태자가 뒷짐을 진 채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늘 하는 게 좋겠군.”

백천범은 영십삼에게 눈짓을 보내며 태자 뒤를 따라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궁인들이 그녀의 손을 씻겨 주었다. 이내 차를 올린 뒤,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밖으로 물러났다.

태자는 남원의 일을 궁금해했다. 백천범은 자신이 아는 남원의 풍습과 특색을 세세히 알려 주었다. 그녀는 손짓과 발짓을 섞어 가며 풍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야기하는 내내 그녀의 두 눈은 광채로 반짝였다.

태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멍하니 넋을 놓았다. 머릿속에는 자꾸만 초상화 속 여인이 떠올랐다. 백천범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한 글자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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