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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39)화 (938/1,192)

제939화

곤청락은 그녀의 말이 너무 뜻밖이었다.

“궁비를 내보내셨단 말씀입니까? 역대 왕조에는 한 번도 없던 일 아닙니까? 그 후에는요?”

“그 후에는 잇달아 몇 명이 더 들어왔지. 그리곤 폐하께 아들을 낳아 드렸다. 그다음엔…….”

근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침묵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날 선 눈빛으로 말했다.

“그다음엔 난비가 입궁했고.”

곤청락은 말없이 넋을 놓다가 별안간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근비에게 물었다.

“어찌 원후에 대한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어본 듯합니다?”

근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도 참… 본궁이 원후를 만나 보았겠느냐?”

“들은 얘기도 없으십니까?”

근비가 고개를 저었다.

“원후에 대한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그럼 다른 비빈들에 대한 얘기는요? 태자는 다섯째니까 위로 네 명의 형이 더 있지 않았습니까? 첫째는 원후의 적자이자 예전에 태자로 책립되었던 자가 아닙니까?”

순간, 근비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녀는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미쳤구나. 어찌 그 일을 묻는 것이냐?”

곤청락이 말했다.

“마마, 안색이 어찌 그리 어두워지셨습니까? 소자가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근비는 얼굴을 살짝 펴고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예전 일을 입에 담는 걸 싫어하신다. 그저 케케묵은 옛일을 언급하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 앞으로 너도 다신 묻지 마라. 다른 이 앞에서도 절대 언급하지 말고.”

곤청락은 갑작스러운 꾸짖음에 투덜거리며 말했다.

“전 그저 궁금해서 물은 것뿐입니다. 어찌 형님들이 전부 다 돌아가셨는지 말입니다.”

근비가 그의 팔뚝을 힘껏 꼬집었다.

“그리 묻지 말라고 했거늘! 어찌 또 입에 담는 것이냐. 그러다 소리 소문도 없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단 말이다.”

곤청락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부황께서 설마 시답잖은 말 몇 마디 물었다고 절 죽이시기야 하겠습니까?”

근비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나서는 얼굴을 굳힌 채 대꾸했다.

“그때 가서 본궁이 널 말리지 않았다고 탓하지 말거라. 농담이 아니다. 예전에도…….”

그녀는 더는 말을 잇지 않더니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이런 건 절대 묻지 말거라. 이미 다 세상을 떴으니 물어도 소용없으니까.”

곤청락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마마, 예전에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곤청락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소자가 어디 가서 실언을 하지 않길 바라신다면 제대로 알려 주십시오.”

근비는 눈꺼풀을 드리운 채 자신의 호갑투를 만지작거리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난비가 궁에 들기 전, 폐하께서 다른 비를 총애하셨었다. 한데 말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폐하께서 목숨을 거두셨단다.”

“무슨 말을 했는데요?”

“네 황자가 한꺼번에 천연두에 걸린 게 아니냐고… 어찌 한 번에 죽을 수 있냐고 말이다. 폐하께서 진노하시어 그 자리에서 비를 끌고 나가 목을 베게 하셨다.”

곤청락이 물었다.

“하면 그 네 형님들이 다 같이 천연두에 걸린 것입니까?”

근비가 그를 때리려다 허공에서 손을 멈춰 세웠다.

“정말 너 때문에 열불이 나서 죽겠구나. 아들, 제발 묻지 말거라!”

곤청락은 화가 난 그녀를 보고 다급히 웃어 보였다.

“노여움 푸십시오. 그리 성을 내시면 주름이 생깁니다. 더는 마마 눈에 띄지 않게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근비에게 예를 갖춘 뒤, 몸을 돌려세웠다. 그때, 근비가 그를 불러 세웠다.

“락아, 이 어미의 충고를 잊지 말거라. 절대 일을 저질러선 안 된다. 알아들었느냐?”

“알겠습니다.”

곤청락이 근비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소자도 그리 어리석진 않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았으니 마음 놓으십시오.”

근비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조금 야윈 듯하구나. 이 어미가 말했지? 태자의 적자는 네 살이나 되었다고. 한데 너는? 자신의 부인은 찾을 생각도 없고 곁에서 보살펴 주는 여인조차 없으니 이 어미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구나.”

곤청락은 이런 말을 가장 싫어했기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다음에 또 뵈러 오겠습니다.”

말을 마쳤을 때 그는 이미 문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근비는 문을 바라보며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곤청락은 근비의 처소를 나와 길가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는 지금껏 옛일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신과는 너무 먼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비의 말을 들으니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궁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황상이 궁비를 내보낸 것도 이 비밀을 덮기 위해서인 듯했다. 그런데 이 비밀은 근비조차 알지 못했기에 그도 물어볼 상대가 없었다. 잠시 고민한 그는 어쨌든 궁에 왔으니 황제에게 태자에 대한 일을 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침궁에 도착했을 때, 난비도 곁에 있었다.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난비는 그를 보자 웃으며 말했다.

“육황자 전하께서 오셨군요.”

곤청락은 난비와 마주할 기회가 극히 적었다. 황제의 총비와 가까이 지내면 괜스레 황상의 미움을 살 수 있었다. 또한 난비는 모비의 원수이기도 했다. 겉으론 해막도와 친한 사이였지만, 속으로는 그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그는 난비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누군가를 닮은 듯하지만,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난비를 빤히 바라보자 황제가 불쾌한 듯 헛기침을 했다.

“락아, 무슨 일로 짐을 찾아온 것이냐?”

곤청락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예. 소자 부황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황제의 눈빛에 난비는 눈치껏 안쪽 궁전으로 향했다.

“말해 보거라, 무슨 일이냐?”

곤청락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실은 지난번 태자 형님이 소자의 벗과 알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제 벗을 궁에 며칠 머물게 하신다길래 소자도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한데 어제 소자가 궁 밖에서 두 사람을 보았는데, 조금… 이상했습니다.”

황제가 물었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냐?”

“소자가 보기에 태자 형님께서 소자의 벗을 좋아하는 듯합니다. 한데 보통 벗을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그런 쪽…….”

그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는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불만이 담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태자는 처자식이 있거늘, 헛소리 집어치우거라!”

“소자도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자의 벗이 궁을 나가고 싶어 하는데도 태자 형님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게다가 기영까지 파견해 소자의 벗을 지키셨습니다. 제 벗 때문에 기영까지 움직이시다니요.”

황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태자가 기영을 움직였다고?”

“예. 소자가 직접 보았습니다.”

황제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락아, 네 벗이란 자가 곱상한 얼굴이더냐?”

곤청락이 말했다.

“그리 고운 얼굴은 아니지만, 문약한 것은 사실이지요. 소자는 혹시라도 태자 형님께서 잘못된 길로 가실까 봐… 고민 끝에 부황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너희의 사적인 일은 분수만 잘 지킨다면 부황이 관여치 않을 것이다. 어쨌든 태자는 혼인도 하고 자식도 낳지 않았느냐. 한데 너는? 언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네 모비의 마음을 놓게 할 작정이냐?”

곤청락은 고자질의 결과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제의 창끝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모비의 마음을 진정으로 편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부황이십니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곤청락이 공수하며 말했다.

“부황, 소자는 약속이 있던 게 떠올라 그만 물러가 보겠나이다.”

황제는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어찌 그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 또한 곤청락이 근비를 위해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원만하게 흘러갈 순 없는 법이다. 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물러가거라.”

곤청락은 몇 걸음 물러난 뒤 몸을 돌려세우고 궁전을 빠져나왔다. 곤청락이 자리를 뜨자마자 난비가 다시 황제 곁으로 다가와 예쁜 미소를 보였다.

“폐하, 어찌 그러십니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황제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다들 이 모양이니 짐도 도무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려.”

“육황자 전하가 폐하의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까?”

난비가 물었다.

“폐하께선 평소 육황자 전하를 가장 아끼지 않으십니까?”

“저 애와 태자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조용할 날이 없었소.”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식은 부모가 전생에 진 빚이라 하지 않소.”

“폐하,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육황자 전하와 태자 전하는 이미 장성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어요.”

난비가 황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신첩이 폐하께 아이를 낳아 드리면 참으로 좋을 텐데요.”

황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난비는 괜스레 마음이 조마조마해져서 슬쩍 시선을 올렸다. 황제는 허공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품에서 꿈틀거렸다.

“폐하.”

황제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대의 마음은 짐도 아오. 그대는 짐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오. 짐이 어찌 그대와 아이를 갖고 싶지 않겠소. 다만 시간이 맞지 않소. 짐은 누군가 그 아이를 괴롭힐까 두렵소.”

“폐하의 황자인데 누가 감히 괴롭히겠습니까?”

난비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투덜댔다.

“폐하께서 저와 아이를 지켜 주시면 되잖아요?”

황제가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짐은 이미 늙었으니 그 애를 오랜 시간 지켜 주지 못할 것이오. 차라리 낳지 않는 게 더 낫소.”

난비는 몸을 흠칫 떨며 문득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만약 황제가 정말 목숨을 다한다면, 그녀는……. 황제도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걱정할 것 없소. 짐이 눈을 감는다 한들, 그대가 절대 고생할 일 없도록 잘 처리하고 가겠소.”

“폐하.”

난비가 거의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이리 젊으신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신첩은 무섭습니다. 신첩이 괜히 이 말을 꺼내서 폐하께 근심을 끼쳐드렸습니다.”

황제가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가볍게 닦아 주었다.

“당신 탓이 아니오. 그저 당신이 너무 늦게 나타났을 뿐이오. 짐이 그대를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아이를 낳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대를 황후로 책립하고 우리 아이를 태자로 삼았을 것이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린 너무 늦게 만났소.”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늦은 때에…….”

난비는 황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권력의 중심에 다가갈수록 탐욕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예전엔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서둘러 아들을 낳으라고 성화였다. 아이가 황위 쟁탈을 할 수 있게 자신들이 지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그런 얘기를 듣다 보니 그녀에게도 야심이란 게 생겼다. 황제가 죽은 뒤에도 업신여김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황제의 말에 그녀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래, 황제의 말대로 그녀가 황제와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잔인한 운명은 기어코 두 사람을 이런 처지에 놓이게 했다. 역시 이 세상 모든 일이 원만하진 않은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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