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8화
뒷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의심스럽진 않았을 텐데. 덧붙인 말에 뻔한 거짓이 물씬 풍겼다. 백천범은 그를 한번 흘기고는 서둘러 그의 손에서 자신의 팔을 빼냈다.
“황 주인장, 자책할 거 없습니다. 괜찮아요.”
태자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의가 아니라지만, 그가 보기엔 고의성이 너무나 다분했다. 게다가 태자가 직접 싸 준 양고기였는데! 그는 태자에게 미안해하지 않고 전 선생만 걱정했다. 사내 둘이 어찌 이리 사이좋은 한 쌍의 원앙처럼 구는지.
그는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황 주인장이 그쪽 취향이란 말인가? 전 선생이 문약하기는 하나 생김새는 그저 그랬다. 저 굵직한 눈썹만 봐도 성치 못한 외모인데… 황 주인장의 취향은 참으로 독특한 듯했다.
일을 길게 끌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인 법. 태자는 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백천범에게 물었다.
“전 선생, 다 드셨는가?”
백천범은 묵용감을 힐끔 바라보았다. 묵용감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녀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배불러요.”
“그렇다면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곤청락은 창가에서 돌아와 미소를 지으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태자 형님, 그만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그래, 그만 가야겠지. 아직 보지 못한 상주서가 서재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네.”
“하면 더는 붙잡지 않겠습니다.”
곤청락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백천범에게 말했다.
“전 선생, 조심히 가시게.”
한바탕 난동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던 자리지만 결국 평온하게 끝났다. 백천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리다 묵용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묵용감도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황 주인장. 다음에 또 만납시다.”
묵용감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 또 뵙겠습니다.”
두 사람은 당연히 다시 만날 것이었고, 다시 헤어질 수도 없을 것이다. 태자가 백천범을 데리고 자리를 뜨자 곤청락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술잔을 채우더니 한 번에 술을 털어 넣었다. 묵용감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하, 어찌 그러십니까?”
곤청락이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창밖을 좀 보게.”
묵용감이 창가로 향했다. 아래에는 병사들이 주루 주변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병사들은 상림군과는 달리 얼굴을 가리고 날카로운 두 눈만 드러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정예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들은…….”
“기영 병사들일세.”
묵용감이 흠칫 놀랐다. 그도 몽달의 정예 군대인 기영에 대해 들은 적 있었다. 과거 교전 당시 기영 소속 병사들이 선봉에 섰는데, 단번에 그들의 진형을 돌파하는 바람에 적잖은 병력을 잃었었다.
하지만 기영은 병력이 부족하여 선봉에만 설 뿐 주력이 되진 못했다. 만약 대다수의 병력이 기영처럼 사납게 달려들었다면 당시 몽달이 그리 참혹하게 패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묵용감이 말했다.
“전 선생 때문에 태자께서 기영까지 움직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좀… 허허.”
그는 고개를 저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곤청락이 술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왔다.
“황 주인장이 보기에도 이상한가?”
그때, 태자와 백천범이 주루를 나와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태자가 백천범을 잡아 주려 했지만 영십삼이 더 빨랐다. 영십삼이 먼저 백천범의 팔뚝을 잡고 그녀를 마차에 올려 주었다.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이상하다면 이상하지요. 제가 보기엔 태자 전하께서 전 선생을 몹시 신경 쓰시는 것 같습니다.”
곤청락은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신경을 쓰다니?”
묵용감은 태자의 마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본 뒤, 다시 식탁 앞으로 돌아와 술을 들이켰다. 답답한 마음에 술잔을 깨부수고 싶었지만, 겨우 마음을 억누르며 빈 술잔을 힘껏 쥔 채 식탁에 올려 두었다.
황 주인장은 애당초 잘 웃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곤청락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잔을 그의 잔에 부딪혔다. 술을 다 들이켠 그가 별안간 무언갈 깨달았는지 깜짝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인장의 말은… 설마 아닐 테지? 태자가 그런 쪽을 좋아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네만.”
묵용감이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다 한들, 남들에게 알리진 않으셨겠지요. 고귀하신 태자이신데 그런 소문이 돌면 명성이 어찌 되겠습니까?”
곤청락은 우울했던 마음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가 묵용감의 어깨를 토닥였다.
“역시 황 주인장은 안목이 넓군. 난 정말 몰랐다네. 어쩐지 기영까지 움직이더니만.”
그가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두고 보라지. 이번엔 태자가 된통 당할 테니까.”
묵용감이 물었다.
“전하,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덕행을 잃은 태자가 어찌 대통을 잇겠는가. 부황께서 절대 가만있지 않으실 걸세.”
묵용감은 그가 함부로 날뛰어 백천범까지 연루될까 걱정이었다.
“제가 볼 때 전 선생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태자와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이고말고. 본 전하와 전 선생이 알고 지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의 됨됨이는 잘 알고 있네.”
곤청락이 말했다.
“태자 혼자만의 마음이 분명하네.”
묵용감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자께서 비를 들이셨고 아이도 있는 걸 보면 분명 아닐 것도 같은데… 혹 전 선생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 건 아닐까요? 혹 전 선생의 외모가… 계후 마마를 닮으셨습니까?”
곤청락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황 주인장, 어찌 그리 생각하는 것인가?”
“방금 계후 마마를 언급했을 때, 태자께서 기분이 가라앉는 듯 보였습니다. 혹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자가 나타난다면 분명 친밀감을 느낄 것이고 잘해 주려 할 테지요.”
그도 황당한 이야기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이를 계기로 궁정의 옛일을 꺼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곤청락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모비께서 하신 말씀으로는 계후가 죽기 전… 태자는 고작 두 살이었다던데. 그리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생김새를 기억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초상화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곤청락이 턱을 쓸어내렸다.
“그럴 가능성은 있겠군.”
“만약 전 선생의 생김새가 계후 마마를 닮은 것이라면, 태자께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그리 마음을 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리 책망할 수만은 없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아니라면.”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땐 세상에 큰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곤청락은 아무 말 없이 눈망울을 번득였다.
* * *
묵용감이 사람을 보내 화양부에 비단을 보내자 곤청락은 곧장 비단을 들고 입궁했다. 근비는 곤청락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기뻐하며 직접 마중을 나왔지만, 말은 그리 곱게 나가지 않았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찾아온 것이냐?”
곤청락이 웃으며 대꾸했다.
“마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들이 어머니를 뵈러 오는 건 당연지사 아닙니까?”
그가 비단을 건넸다.
“제 벗이 준 최상급 비단입니다. 무늬와 색도 훌륭하지요. 소자가 보기에 어머니께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 서둘러 가져왔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 새 옷을 지어 입으십시오.”
아들의 효심에 근비는 함박웃음을 지은 채 옷감을 어루만졌다.
“정말 예쁘구나. 어느 친구가 이리 좋은 비단을 보내 주었단 말이냐? 네게 바라는 게 있는 이들이 일부러 접근한 건 아니더냐?”
“아닙니다.”
곤청락이 그녀를 이끌고 난갱暖坑 근처에 앉았다.
“성안 금수포목이라는 가게는 마마께서도 아시지요?”
근비가 말했다.
“어찌 모를까. 패륜이에서 아주 오래된 가게가 아니더냐. 본궁이 궁에 오기 전에 그곳에서 비단 구경을 하곤 했지.”
“그 금수 포목점의 주인장이 준 겁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저와 마음이 맞아 준 것입니다. 진실한 벗을 사귄 셈이지요.”
근비가 그를 나무라듯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벗을 사귀는 건 좋다만, 그리 아무나 저택으로 들이진 말거라. 태자가 널 지켜보고 있지 않으냐. 부황께선 아무 말씀 안 하시어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실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제왕의 마음이란, 하…….”
그녀는 냉소를 짓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곤청락이 웃으며 말했다.
“마마, 노여움 푸십시오. 난비가 총애를 받고 있긴 하지만, 위치를 따지자면 마마의 아래입니다. 게다가 그저 색정으로 황제를 모시는 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리되면 조만간 이 후궁은 마마의 천하가 되지 않겠습니까?”
근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난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중궁이 이리 오랜 시간 비어 있는데도 황상께선 황후를 세우지 않으시니 그 속을 누가 알겠느냐?”
곤청락이 이때다 싶어 물었다.
“마마, 계후께서 돌아가신 지 몇 년이나 된 겁니까? 그땐 절 낳기 전이셨지요?”
“그전이었다. 태자가 겨우 두 살일 때 떠나셨다.”
근비가 탄식하듯 말했다.
“아이를 갖고 황후에 올랐는데, 태자를 낳은 지 이 년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지.”
“병 때문이었습니까?”
근비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방 안에 있는 이들이 모두 자리를 뜨자 그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 스스로 죽음을 맞았다.”
곤청락은 해묵은 옛일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이유에서요? 부황께서 부당한 대우를 하신 겁니까?”
근비가 고개를 저었다.
“그땐 나도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확히는 모른다. 계후는 다른 이와 잘 만나려 하지도 않았고 문안 인사도 막았지. 성격이 좀 기괴했다.”
곤청락이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계후의 초상화 같은 게 남아 있을까요?”
근비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그런 건 무엇하러 묻는 것이냐?”
“그저 궁금한 것뿐입니다. 태자도 아마 계후가 어찌 생겼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테지요.”
“분명 기억 못 할 거다. 그땐 너무 어렸으니까.”
“그래도 태자에게 어머니의 초상화는 있지 않겠습니까.”
근비가 의심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초상화는 어찌 자꾸 묻는 것이냐?”
곤청락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태자가 부황을 닮은 것 같진 않으니 아무래도 계후를 닮은 것 같아서요.”
근비가 탄식을 내뱉었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본궁조차 계후의 모습이 기억나질 않는다.”
곤청락은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또다시 질문을 건넸다.
“마마, 후궁에서 마마보다 더 먼저 입궁한 분이 계십니까?”
근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없을 것이다.”
그녀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하구나. 본궁이 입궁하기 전에 폐하께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별안간 지위가 낮은 비빈들을 출궁시켰다. 그때 난 막 입궁한지라 너무 많은 걸 물어볼 수도 없었지.
나중에야 안 사실인데, 그 비빈들 중 폐하의 승은을 입은 자는 없다고 하더구나. 황상께서 그들을 평생 궁에서 지내게 할 순 없다며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셨다더구나. 마음에 맞는 신랑감을 찾아 시집을 가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