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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37)화 (936/1,192)

제937화

백천범은 묵용감과 같은 생각이었다. 어렵게 만났는데 이렇게 금방 헤어지기 싫었다. 같이 있을 핑계 중 식사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태자는 마차에서 내릴 때 자신의 수행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수행원은 그들이 동래순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어디론가 떠났다.

곤청락의 별실로 들어간 이들은 편하게 자리에 앉았다. 백천범의 왼쪽은 묵용감, 오른쪽은 태자가 자리했다. 원래는 곤청락이 태자의 자리에 앉고 싶었으나 태자가 먼저 자리에 앉는 바람에 다른 수가 없었다. 그와 황 주인장이 전 선생의 양옆에 앉았더라면 더 쉽게 데려올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이곳은 그의 구역인 데다 출궁을 거의 하지 않는 태자가 낯선 환경에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번에도 다 같이 양 구이를 먹었다. 백천범은 잘 구워진 어린 양을 보는 게 힘들었지만 고기가 얇은 살점으로 잘린 뒤에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영십삼을 제외하고, 다른 사내들은 술을 마셨다.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담소까진 아니어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분위기는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저마다 다른 근심을 품고 있었지만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얼굴들이었다.

묵용감은 오늘을 기회 삼아 백천범을 데려와 적당한 곳에 숨겨 두려 했다. 그리하면 그녀를 보고 싶을 땐 언제든지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를 감시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조심하면 문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상림군과 큰 마찰이 있었으니 그의 계획대로 하기엔 위험했다. 그는 결국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상림군의 악명은 워낙 자자했고, 해막도는 그보다 더 음험하고 교활한 자였다. 오늘 일로 그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패륜이 안에 상림군의 발길이 닿지 않을 만한 곳이 있을까? 아마 황궁 말고는 없을 테니 당분간은 궁에서 지내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곤청락이 백천범을 태자 곁에서 빼앗아 올 생각이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아마 오늘 이 식사는 홍문연鴻門宴(초청객을 해칠 계획으로 차린 연회)에 가까운 자리일 것이다. 묵용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 다른 사내들이 자신의 부인을 빼앗아 가고 빼앗아 오며 난리를 친단 말인가? 비록 그들이 백천범을 사내로 알고 있다고 해도 기분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영십삼을 바라본 뒤, 곤청락의 얼굴로 시선을 옮겨 가볍게 훑었다. 영십삼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조용히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곤청락은 그와 영십삼 사이에 앉아 있었다. 묵용감이 손을 쓰지 않아도 영십삼이 쉽게 곤청락을 제압할 수 있는 자리였다. 묵용감은 직접 두 전하에게 술을 따라 주며 웃었다.

“얼마 전 가게에 비단이 새로 들어왔습니다. 화려한 무늬가 있는 최상급 비단이지요. 색은 좀 어둡지만, 두 전하의 모비께 옷을 지어 드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겁니다. 제가 조만간 사람을 보내 두 전하께 보내 드리지요.”

곤청락은 술을 들이켜며 하하 웃었다.

“황 주인장, 그리 예를 차릴 것 없네. 다른 이들은 모두 황비에게 주라며 사치품을 보내는데 황 주인장만이 유일하게 내 모비를 신경 써 주는군. 보아하니, 황 주인장은 효가 극진한 사람일 것 같네. 황 주인장의 마음만큼은 내 모비를 대신해 감사히 받겠네.”

묵용감도 따라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태자를 바라보다 별안간 무엇인가 떠오른 듯 말했다.

“육황자 전하 댁에는 찾아가기가 편한데, 태자 전하의 궁은 혹…….”

“필요 없네.”

태자가 쌀쌀맞게 말했다.

“내 모후께선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으니 그런 건 필요 없네.”

그는 ‘모후’라는 말에 특별히 힘을 주어 말했다. 묵용감이 말한 ‘모비’가 잘못된 단어라는 걸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묵용감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은 정말 몰랐…….”

“모르는 건 죄가 아니네.”

곤청락이 태자를 훑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황 주인장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모를 겁니다. 계후께선 입궁하신 지 삼 년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으니까요. 지난번에 입궁하니 모비께서 그러시더군요. 계후께서 복이 박해 너무 일찍 가셨다고요.”

태자는 술잔을 힘껏 쥐었다. 곤청락이 오래전 세상을 떠난 계후를 언급하는 건 몹시 불편했다. 그래도 태자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근비瑾妃 마마께서는 복이 많으시어 오랜 시간 황상의 총애를 받으셨지. 하지만 철로 만들어진 중궁에서 비빈들의 궁만큼은 물 흐르듯 가벼운 곳 아닌가. 난비께서 입궁하시자 근비 마마께서 곧바로 총애를 잃지 않으셨는가.

난비 얘기를 꺼내면 근비 마마께선 물건을 깨부실 정도로 성을 내시는데… 여섯째 아우는 어찌 해 대인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는가. 근비 마마께서 속으로 어찌 생각하실지 퍽 궁금하군.”

곤청락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태자 말이 맞았다. 그의 모비인 근비 마마는 줄곧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그 덕에 황제는 곤청락을 다른 황자들보다 중시하며 왕에 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당연히 근비 마마가 황후 자리에 오를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난비가 입궁하고 나니 황제는 혼이라도 뺏긴 사람처럼 난비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화가 난 근비는 침전을 다 때려 부수었고 난비 얘기만 나오면 이를 갈았다.

사실 그 역시 모비처럼 적개심을 갖는 게 마땅했지만, 해막도 부자는 황제의 신임을 받는 자들이었다. 태자를 고립시키려면 그들과 한패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난비는 입궁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회임 소식이 없었다. 황제는 점점 노쇠해지니 앞으로 천하를 장악할 사람은 그 아니면 태자였다. 궁 안에는 영원한 벗도, 영원한 적도 없고 오직 이익 관계만 있을 뿐이다. 곤청락이 술잔을 식탁에 힘껏 내려놓으며 말했다.

“태자 전하,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묵용감은 여유롭게 술을 마시며 그들의 언쟁을 구경했다. 영십삼 또한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백천범은 태자와 곤청락을 번갈아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아이들 말싸움하듯 다투십니까. 설령 말다툼을 해도 어머니에 대한 말씀은 하지 마시지요.”

말하고 나니 어째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묵용청양을 혼내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이다. 타국에서 온 이방인이 두 황족을 꾸짖다니. 황후 자리에 익숙해져 그만 분수를 잃은 것이다…….

백천범은 불안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태자와 육황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투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묵용감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더니 직접 양고기를 밀가루 전병에 싸서 그녀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

“선생, 어서 드십시오. 식으면 맛이 비릿해집니다.”

백천범이 예를 차려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황 주인장.”

그녀가 양고기를 먹으려 고개를 숙이는데 커다란 손이 다리 위에 올려졌다. 두꺼운 솜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온기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날카롭게 바라보며 손을 떼라는 의미로 다리를 털었다. 그런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귀가 빨개지는 것까지 본 뒤에야 그는 슬쩍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그는 속으로 무척 즐거워했다.

조용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곤청락은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손을 닦더니 백천범에게 물었다.

“전 선생, 궁에서 지내는 건 어떠한가?”

“괜찮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소인을 아주 잘 보살펴 주시거든요.”

“황궁 같은 곳은 규율이 너무 많지 않나. 선생처럼 자유롭게 지내는 사람이 어찌 궁 생활이 익숙해지겠는가?”

모든 이의 시선이 곤청락에게 향했다. 그가 드디어 본론을 말할 참인 듯했다.

그녀는 묵용감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곤 곧장 대꾸했다.

“익숙해질 거예요.”

“……”

그 말에 곤청락은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만약 전 선생이 조금이라도 출궁할 마음이 있다면 바로 데리고 나왔겠지만 저렇게 나오니 어쩔 수 없었다.

백천범은 에둘러 말하는 걸 싫어했다. 이왕 궁에 머물기로 마음먹었다면 곤청락이 더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도록 딱 잘라 말하는 게 나았다. 태자는 뜻밖이라는 얼굴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는 줄곧 전 선생이 궁을 나가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단칼에 거절하다니. 도무지 속셈을 알 길이 없었다.

곤청락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고민에 잠겼다. 전 선생의 의견은 무시하고 강제로 데려올까? 아니면 다음 기회를 노려볼까.

그때, 그의 수행원이 안으로 들어와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곤청락은 안색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태자를 힐끔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건물 아래에 몽달 병사들이 대열을 갖춰 서 있었다. 기영에 속한 병사들이었다.

기영은 몽달의 정예 군대로 큰일이 아니면 쉽게 파견하지 않았다. 곤청락은 흠칫 놀랐다. 암암리에 그 또한 준비를 마쳤지만, 기영의 병사들이라면 승산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슴 속에 자꾸만 미심쩍은 생각이 피어올랐다. 대체 전 선생이 뭐라고… 저자를 위해 태자가 기영까지 움직인단 말인가?

묵용감이 앉은 자리에서는 곤청락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묵용감은 태자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태자는 담담하게 밀가루 전병에 양고기를 싸고 있었다.

묵용감은 분명 태자와 관련된 일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때, 태자는 잘 싼 양고기를 백천범의 그릇에 놓아 주더니 그것도 모자라 직접 주전자를 들고 차까지 따라 주었다.

묵용감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굵직한 눈썹에 커다란 점까지 그린 백천범의 분장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설마 태자의 미적 기준에 문제가 있단 말인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란 말인가?

묵용감은 오늘 성 교외에서 태자가 백천범에게 까닭 없이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존귀한 태자 나리가 타국에서 온 자에게 저리 속수무책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음속에서 일던 의심이 더는 억누를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그는 조용히 태자를 지켜보았다.

곁눈으로 그의 표정을 본 백천범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곤 침착하게 양고기 전병을 들고 입에 가져갔다. 묵용감의 눈썹이 일그러지더니 별안간 손을 뻗어 내리쳤다. 백천범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고, 양고기 전병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묵용감은 서둘러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팔뚝을 문질렀다.

“송구합니다. 손이 부딪혔군요. 아프십니까? 정말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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