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36)화 (935/1,192)

제936화

태자는 얼굴을 한쪽으로 돌리고 웃었다. 백천범이 상사를 찾아가 시비를 가린다고 했을 때, 그 또한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그동안은 잘 몰랐는데, 전 선생이 제법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웃음을 억누르며 백천범에게 맞춰 주었다.

“본궁 앞에서 이리 소란을 피우니 본궁이 상황을 정리해야겠구나.”

백천범이 말했다.

“태자 전하, 좌대사 대인이 기어이 제 수행원을 잡아가겠다고 합니다. 부디 시비를 가려 주시어요.”

태자가 해막도에게 물었다.

“좌대사는 어찌하여 전 선생의 수행원을 잡아가려는 것인가?”

“저자가 소관에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태자가 백천범에게 말했다.

“자네의 수행원이 좌대사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는군.”

백천범이 말했다.

“좌대사 대인이 먼저 제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제게 채찍을 휘두르려 했습니다. 해서 제 수행원이 충심으로 주인을 지킨 것인데… 그게 잘못이란 말씀입니까?”

태자가 해막도에게 물었다.

“곁에 있는 수행원이 충심으로 주인을 지키는 게 잘못인가?”

“…….”

“좌대사.”

“…….”

“좌대사 대인.”

태자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본궁이 묻는 말에 어찌 대답하지 않는 것인가. 지금 본 태자를 무시하는 것인가?”

해막도는 등에서 땀이 흘렀다. 조정 관리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과 황실에 무례하게 구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황실에 무례하게 굴었다간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그는 입술을 몇 차례 들썩거렸다. 태자에게 밉보이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태자가 얼토당토않은 말을 늘어놓는 것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오늘 이 일은 고작 천민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다. 천민 따위는 그에게 개미보다 못한 존재인데… 그들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다니!

그는 패륜이에서 귀신도 꺼린다는 존재였다. 감히 그에게 이치를 따지려 드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가 하면 그게 곧 이치였다. 한데 태자의 손님이라는 자는 기어이 그와 맞서려 했다. 그로선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감히 제게 잘잘못을 따지다니!

곤청락도 상황 파악 못하는 해막도 때문에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난비가 황후가 된 것도 아닌데 벌써 국구라도 된 양 허세를 부린단 말인가! 제 아무리 태자가 우습다지만 황가의 체면까지 깎아내려선 안 될 일이었다. 그가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

“해 대인, 대체 언제까지 그리 소란을 피울 생각인가?”

해막도는 육황자에게까지 밉보일 수 없었다.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태자 전하의 말씀이 모두 다 맞습니다."

태자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렇다면 저자를 잡아갈 필요는 없겠지. 좌대사, 그렇지 않은가?”

“예, 풀어 주겠습니다.”

해막도는 이 말을 내뱉을 때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곤청락이 서둘러 상황을 수습했다.

“이제 다 되었으니 어서 가세. 내 동래순에서 모두에게 술을 대접하겠네.”

백천범은 다친 이들을 집으로 데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해막도에게 말했다.

“좌대사 대인, 저희가 떠난 뒤에 저들에게 화풀이를 하시진 않겠죠?”

해막도는 얼굴을 굳힌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태자가 아닌 곤청락을 보며 웃었다.

“육황자 전하. 저들이 일가족을 때려죽이면 한나절 동안 했던 일이 헛수고가 되지 않습니까?”

곤청락은 백천범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살짝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태자의 안색을 힐끔 살핀 뒤, 해막도에게 물었다.

“좌대사 대인, 이 일은 여기서 끝내시게. 그리할 테지?”

해막도는 경고가 담긴 곤청락의 눈빛에 이를 꽉 깨물고 대꾸했다.

“예. 소관 그리하겠습니다.”

백천범의 눈빛이 그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사내대장부라면 자신이 한 말은 지키는 법이지요.”

만약 저 말을 지키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란 뜻이었다.

“…….”

해막도는 백천범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오장육부가 뒤틀리듯 속이 문드러졌다.

반면 묵용감은 백천범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는 전 선생을 존경한다는 핑계로 태자의 마차에 올라탔다.

태자는 전 선생 옆에 가까이 붙어 앉은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 옆에 목석처럼 앉아 있는 영십삼을 힐끔거렸다. 왠지 모르게 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제게 보이던 적대감을 어찌 황 주인장에게는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이유 없이 불쾌했다.

더 불쾌한 건 곤청락이었다. 분명 백천범과 묵용감 모두 그가 먼저 알게 된 자들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태자의 마차에 올라탄 이유는 무엇인가? 태자의 마차가 빠르게 내달리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마부에게 소리쳤다.

“쫓게.”

자신의 사람들을 데리고 내빼려고? 어림도 없지!

묵용감은 너른 소매 밑으로 백천범의 손을 꽉 쥐었다. 백천범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기분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런데 묵용감이 어찌나 세게 쥐는지 손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화가 난 것이다. 그녀는 그가 무슨 이유로 화가 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소녀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만약 영십삼이 재빨리 나서지 않았다면, 채찍은 그녀의 몸을 내리쳤을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빼려 했지만 그는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그리곤 눈꺼풀을 내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부부로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담도 참 크구려. 내가 무슨 기분이었을지는 생각도 안 해 봤소?’

‘십삼에게 이미 눈짓을 주었다고요. 당신도 봤잖아요.’

‘만에 하나 채찍에 맞았다면 내가 그 자리에서 해 씨란 자를 갈가리 찢어 놓았을 것이오. 내 신분이 폭로될까 두렵지도 않소?’

‘심삽을 믿지 못하는 거예요?’

‘모든 일에는 만약이라는 게 있소.’

‘십삼을 믿지 못하면 영구도 믿지 못하시는 거고, 영구를 믿지 못하면 당신 본인도 믿지 못하는 거예요.’

‘허튼소리, 해막도에게 했던 것처럼 내게도 트집 잡지 마오.’

‘제가 십삼을 믿는 건 영구를 믿는 거고, 영구를 믿는 건 당신을 믿는단 얘기예요.’

‘감언이설로 꾀려 하다니.’

‘서방님, 서방님, 서방님.’

‘히죽거리지 말고 깊이 반성하시오.’

‘다음엔 안 그럴게요.’

‘약속 지키시오.’

‘사내대장부는 일언이 중천금이지요.’

‘당신이 무슨 사내대장부요. 바꿔서 다시 하시오.’

‘아이, 서방님, 서방님.’

그는 그제야 손을 놓아 주었다. 백천범은 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황 주인장, 듣자니 장사를 아주 크게 하신다면서요?”

“그저 자그마한 사업일 뿐입니다.”

묵용감이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처럼 남북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것과는 견줄 수 없지요. 저도 장사를 접고 전 선생과 함께하고 싶군요. 저와 함께 여러 나라를 여행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좋지요. 돈을 충분히 버시거든 절 찾아오십시오. 여기저기 돌아다니려면 여비가 필요한 법이거든요.”

“돈 문제는 선생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얼마든 말씀만 하십시오.”

묵용감이 말했다.

“여행을 다니다가 피로해지면 풍경 좋은 곳에 저택을 하나 사서 잠시 지내는 것도 좋겠군요.”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저도 그리하고 싶습니다.”

“선생께선 여러 곳을 다니시지 않았습니까? 제일 살고 싶은 곳을 고르라면 어딜 고르시겠습니까?”

“전 동월 사람이라 동월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중에서도 강남으로요. 거긴 기후도 좋고 사계절도 뚜렷하고 풍경도 멋져요. 먹을 것도 많고요. 나중에 늙으면 강남에서 살고 싶어요.”

“아직 한창 젊으신데 그런 생각은 이르지 않습니까? 저야말로.”

묵용감이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세월을 속일 수 없지요.”

백천범이 농담을 건넸다.

“집에 노인이 있으면 보배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의 손이 보복하듯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태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저 둘이 지금 무얼 하는 것이란 말인가. 어찌 다정하게 장난을 치는 것처럼 들린단 말인가?

동궁에서 지내는 동안 전 선생은 한 번도 저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한데 어찌 황 주인장 앞에서는 저리 편하게 군단 말인가. 황 주인장은 오늘 처음 알게 된 자가 아닌가? 게다가 황 주인장이란 자도 말이 많아 보이는 성격은 아닌 듯했는데 전 선생 앞에서는 저리 말을 끊임없이 늘어놓다니. 누가 보면 더 일찍 만나지 못해 애석해하는 사람 같았다.

그때 묵용감이 영십삼에게 눈짓을 했다. 영십삼은 조금 민망해하더니 별안간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하, 저쪽에 낮은 산이 있는 것 같습니다.”

평소 냉랭하기만 한 전 선생의 수행원이 오늘은 무슨 일로 제게 먼저 말을 거는 걸까? 그는 영십삼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건 산이 아니라 기복이 심한 사막이라네. 그저 산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묵용감은 그 틈에 백천범의 볼에 입을 맞췄다. 백천범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묵용감은 깜짝 놀라는 그녀의 모습에 더욱더 기세등등해졌다. 자신의 부인과 입 맞추는 것이니 사통이라 할 순 없지만, 남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니 긴장도 되고 짜릿함이 배가 되어 그와 별반 차이 없었다.

태자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두 사람은 별 일 없었다는 듯 앉아 있었다. 마차는 석양을 쫓아 단번에 패륜이 성으로 들어갔다. 태자는 전 선생을 데리고 궁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 주인장도 함께 있었기에 그에게도 예를 갖춰 물어야 했다.

“황 주인장은 어디에서 내려야 하나?”

묵용감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우선 동래순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아니었는지요? 육황자 전하께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되었네. 본궁은 일이 있어 환궁해야 하네.”

“그럼 전하께선 먼저 들어가십시오.”

백천범이 곧장 배를 만지며 말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는데… 전 먹으러 갈래요!”

그때 속력을 내던 마차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태자가 불쾌한 목소리로 목청을 높였다.

“어찌 멈추는 것이냐?”

바깥에서 누군가 대꾸했다.

“전하, 육황자 전하께서 마차 앞을 가로막으셨습니다. 전하와 두 손님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십니다.”

태자는 발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는 마침 동래순 입구에 서 있었고, 곤청락이 마차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태자는 깊은 고민에 빠진 듯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선생에게 친하게 군 이유가 이것 때문인 듯했다. 곤청락과 손을 잡고 백천범을 다시 데려가려는 거겠지!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전 선생께서도 배가 고프다고 하고… 여섯째의 초청이니 어디 한 번 들어가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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