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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35)화 (934/1,192)

제935화

감히 일개 수행원 따위가 자신을 저지하다니! 어찌 이리 무식한 자가 있단 말인가. 해막도는 힘껏 손을 빼 보았지만 쇠집게처럼 단단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심지어 힘이 점점 더 실렸고 뼈마디가 비틀려 조각날 것만 같았다.

해막도의 고통스러운 표정에 사병들은 전부 그 주위를 에워쌌다. 묵용감은 담담한 얼굴로 사병들 틈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사병들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육황자와의 친분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했다. 태자의 안색은 고요한 심해처럼 어두웠다.

“감히 내 앞에서 본궁의 사람에게 손을 대려 하다니… 좌대사는 본 태자가 우스운가?”

묵용감은 ‘본궁의 사람’이라는 말에 가슴이 저릿했다. 하지만, 지금은 샘을 낼 때가 아니었다. 어느 게 더 중요한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전 그는 백천범에게로 몸이 튀어나갈 뻔했다. 하지만 그가 제 실력을 드러냈다간 더 위험한 일에 빠질 수도 있었다. 다행히 영십삼이 백천범을 잘 지켜 줄 것을 알았기에 그는 자중할 수 있었다.

해막도는 재빨리 육황자의 안색을 살폈다. 육황자가 그의 편을 들어 주기만 하면 그도 계속 버틸 수 있었다.

곤청락은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태자에게 원한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백천범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잠시 고민한 그는 상황을 중재하기로 했다.

“되었습니다. 다들 한 식구끼리 어찌 그리 날을 세운답니까?”

해막도는 흠칫 놀랐다. 육황자가 화해를 권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태자 전하의 사람에게 신이 어찌 감히 손을 대겠습니까.”

그가 영십삼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놓거라.”

영십삼은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슬쩍 손에 힘을 실었다. 해막도는 통증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여전히 강경한 말투를 유지했다.

“본 대인이 추궁하지 않겠다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 선생께 사과하십시오.”

백천범은 두 사람의 대치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마당 문 앞으로 걸어가 백성들에게 물었다.

“의술을 아는 분 있습니까? 어서 들어와서 상태 좀 봐 주세요.”

이곳 백성들은 초원에 사는 유목민으로 작은 병이나 상처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집집마다 약을 구비해 둔 덕에 누군가 재빨리 약을 들고 들어왔다.

백천범이 소녀 앞에 쪼그려 앉아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녀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꿈틀거렸다. 백천범은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전, 요괴가, 아닙…….”

백천범이 위로하듯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알아요. 다들 알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다행히 대부분 피부에 난 상처였고 근육이나 뼈가 다치진 않았다. 검은 약 가루를 상처에 뿌리자 통증이 느껴지는지 소녀가 경련을 일으켰다. 목이 잠겨 울부짖는 소리가 마치 죽어 가는 짐승 같았다.

소녀도 고통스럽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에게 약을 뿌려 준 사람은 튼실한 체구를 가진 부인이었다. 부인은 소녀를 차분히 다독였다.

“조금만 참아. 약을 바르면 상처가 곧 나을 테니까. 상처만 아물면 금방 다시 말을 타고 우리 집 철주자鐵柱子랑 같이 양을 몰 수 있을 거야.”

백천범은 피투성이가 된 소녀를 바라보며 근심 따위는 모르고 사는 자신의 딸이 생각났다. 만약 누군가 묵용청양에게 이런 짓을 한다면 그녀는 제 몸을 던져 적과 맞설 것이다.

저쪽은 여전히 서로 대치 중이었다. 영십삼은 얼굴을 굳힌 채 해막도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해막도는 얼굴이 검붉어질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한겨울인데도 이마에 콩알만 한 땀방울을 흘리며 이따금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질렀다.

태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묵용감도 침묵을 지켰다. 그저 옆에 있던 곤청락만이 상황을 수습할 뿐이었다. 그가 영십삼에게 말했다.

“이보게 형제, 그 정도 했으면 그만 놓게. 더 수습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하지만 영십삼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자네 선생도 패륜이에서 좀 더 지내야 할 텐데. 상림군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네.”

영십삼은 백양나무처럼 몸을 꼿꼿이 세운 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곤청락은 어쩔 수 없이 백천범을 찾았다.

“전 선생, 여기 좀 와 보시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 아닌가. 게다가 실제로 자네를 때린 건 아니지 않나.”

백천범은 소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전 막지 않겠습니다. 방금 저 채찍으로 이 아이는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두 전하 앞에서 감히 그리 흉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다니… 저 좌대사란 분에게 국법이란 게 있단 말입니까? 벼슬아치가 백성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을 죽도록 때리다니요!

저분의 눈에 백성의 목숨은 보잘것없는 것인가 봅니다. 아마 개미를 보는 것과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요. 그런 사람이 어찌 관리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곤청락은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백천범의 말이 모두 맞기 때문이다. 해막도는 황친을 존중하지 않았고 백성 또한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하지만 탄탄한 뒷배를 가진 그는 쉽게 미움을 사지 않았다. 백천범은 거의 혼절하기 직전 상태인 해막도를 바라보았다.

“진작에 잘못을 인정했다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진 않았을 텐데요. 제 수행원은 워낙 고집불통이라 누구든 절 공경하지 않으면 끝까지 잘못을 추궁하는 성격이라서요. 계속 이렇게 버티시다간 손을 아예 못 쓰게 될 겁니다.”

해막도의 기고만장한 기세는 벌써 꺾인 지 오래였다. 그저 제 스스로 체면을 깎기 어려울 뿐이었다. 백천범의 말에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방금은 실례 많았소. 부디 넓은 도량으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

백천범은 여기서 상황을 수습하기로 하고, 영십삼에게 손을 놓으라고 분부했다. 곤청락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되었네. 구경은 할 만큼 했으니 더는 해 대인의 공무를 방해하지 말고 우린 그만 가세.”

말을 마친 그는 먼저 밖으로 향했다. 다들 그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영십삼은 가장 마지막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때 해막도의 수하들이 그를 가로막아 섰다.

“나갈 수 없다.”

그 말에 백천범은 해막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렇게 큰 수모를 당했는데 해막도가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그는 제 죄를 몰랐기에 설령 황제 앞에 가더라도 겁날 게 없었다.

“이자가 본 대인에게 무례하게 굴었으니, 본 대인은 이자를 끌고 상림 아문에 가야겠네. 조정 율법에 따르면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에게 불경을 저지른 자는 재판을 받아야 해.”

백천범은 입구의 사병들을 밀치고 다시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묵용감도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태자는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하더니 이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앞에서 걷고 있던 육황자 곤청락은 그 모습에 힘껏 발을 굴렀다.

그는 속으로 해막도를 원망했다. 이미 다 수습한 일인데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이란 말인가. 성질 같아서는 더는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백천범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해막도에게 따졌다.

“저자가 당신에게 무례하게 군 것은, 당신이 먼저 내게 무례하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는 전후 사정이라는 게 있지요. 만약 당신이 내게 무례하게 굴지 않았더라면 저자가 어찌 당신에게 무례를 저질렀겠습니까?”

태자는 말장난 같은 그녀의 말이 조금 우스웠다. 전 선생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했다. 해막도는 전혀 전 선생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해막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대꾸했다.

“괜한 소란 피우지 말게. 이자가 조정의 관리를 다치게 했으니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네.”

자신에게 골탕을 먹였으니 상림대옥에 들여보내 열 배는 갚아 주어야 했다. 백천범이 물었다.

“어딜 다치게 했단 말입니까?”

“본 대인의 손을 다치게 하지 않았나.”

해막도가 영십삼에게 붙잡힌 손을 꺼내 보였다. 손에는 붉은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백천범은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피가 나는 것도 아닌데 이것도 다치게 한 거라 할 수 있습니까? 설마 대인의 몸은 종이로 만들어졌단 말입니까?”

그녀가 피투성이가 된 일가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 좀 보십시오. 저들이 입은 상처야말로 다쳤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해막도는 귀까지 새빨개져서 입을 꿈틀거렸다. 순간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백천범 뒤에 서 있던 묵용감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저 대인이란 작자는 백천범과 말싸움을 할 만한 적수가 되지 못했다.

태자는 아예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도 백천범의 말재간 앞에서 꼬리를 내린 적이 있었기에 해막도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했다. 어쨌든 해막도가 그의 뒤를 따른다니 기분이 제법 통쾌했다. 곤청락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말을 들어도 싸지. 그러게 왜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서는.’

해막도가 말했다.

“저자가 본 대인을 협박하는 건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다 보았네.”

“저자는 당신을 협박한 게 아니라 당신의 범행을 막은 것입니다.”

“범행이라니! 내가 무슨 범행을 저지르려 했단 말인가?”

“채찍으로 절 때리려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다 보았습니다.”

해막도는 속이 울렁거려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명 그만하자고 했는데 저자가 계속 내 손을 비틀지 않았는가. 대체 그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당신이 제게 사과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지요.”

백천범이 턱을 들어 올리더니 그를 슬쩍 훑으며 말했다.

“그러게 누가 그리 고집을 부리라고 하던가요.”

해막도는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계속 이렇게 하다간 그의 체면이 닳고 닳아 부하들에게 우스운 꼴만 보일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완강하게 말했다.

“자네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난 반드시 저자를 잡아갈 것이네.”

백천범은 화도 내지 않고 느릿느릿 대꾸했다.

“어찌 그리 억지를 쓰십니까?”

“그래, 내 이리 억지를 쓰면 자네가 어쩔 건데?”

“하면 당신의 상부를 찾아가 시비를 가려야지요.”

해막도가 냉소를 지었다. 그의 상부조차 그에게 미움을 사지 않으려 조심하거늘.

“좋네. 그리하게. 하지만, 그래도 이자는 내가 데려갈 것이네.”

백천범이 물었다.

“당신의 상사가 누구죠?”

“도사 대인이네.”

“도사 대인을 관리하는 자는 누구죠?”

해막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사 대인은 기영旗營 관할에 속하네만.”

백천범이 빙긋 웃으며 태자를 가리켰다.

“제가 알기로 기영은 태자 전하의 직속이니 따지고 보면 태자 전하께서 당신 상부의 상부인 셈이네요. 시비를 따지기 더할 나위 없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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