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4화
태자는 자신을 인정사정없이 몰아세우는 말에 화가 났다. 타국에서 온 이방인이 감히 태자를 꾸짖다니! 천위를 무시하는 것이란 말인가? 일순간 태자의 가슴 속에 불길이 솟구쳤다. 오냐오냐했더니 이리 오만방자하게 구는구나. 그 일만 아니라면 그 또한 이리 예를 갖춰 대해 주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사실 그저 비슷하게 생긴 것일 뿐……. 이자를 통해 무언가를 얻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신분도 불분명한 자를 위해 자신이 얼마나 더 참아야 한단 말인가?
그는 어두워진 얼굴로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백천범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 말이 잘 통하고 상냥하던 이가 별안간 날을 세우니 감히 얕잡아볼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태자는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주먹을 꼭 쥐었다. 영십삼은 너른 소매 안에 손을 감추고 조용히 앞으로 걸어가 백천범을 제 뒤에 숨겼다. 태자가 감히 무슨 수를 쓴다면 그 즉시 태자의 피를 보게 할 참이었다.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이 상황을 보지 못한 채 더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도적 떼보다 더 흉악한 상림군 같으니라고.”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울타리 밖을 지키던 사병이 그자의 뺨을 날리며 소리쳤다.
“감히 군사 나리들을 욕하다니!”
어찌나 힘이 센지 욕을 한 자는 바닥에 엎어져 입가에 피를 흘렸다. 그는 성난 얼굴로 사병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 때리는 것이오?”
소란이 커지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모두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다들 말을 보태진 못하고 경멸에 찬 눈빛으로만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했다. 백천범은 태자의 얼굴에 구멍을 뚫을 기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전하께선 그 이치를 모르십니까?”
병사는 욕을 퍼부으며 바닥에 넘어진 자를 걷어차려 했다.
“너 같은 놈은 맞아야지! 어디서 감히 입을 놀려? 상림대옥 쇠창살 맛 좀 보게 해 줘?”
태자는 이를 꽉 깨물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더니 병사가 다리를 걷어차기 전에 자신의 다리를 먼저 들어 올렸다. 그는 모든 분노를 담아 병사를 멀찍이 넘어뜨렸다.
병사들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동료가 얻어맞자 냉큼 달려왔다. 그런데 또 조금은 망설여졌다. 화려한 복장에 머리에 관까지 쓴 자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신분이 높은 사람일 테니 경솔히 행동할 수 없었다. 태자는 입구를 지키는 병사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호통 쳤다.
“되었다!”
일가족을 때리던 사병은 그의 외침에 채찍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막상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에 자신의 상부인 해막도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상림군의 좌대사인 해막도는 당연히 태자를 알아보았다. 그가 서둘러 예를 갖췄다.
“태자 전하께서 직접 찾아 주신 줄도 모르고 마중도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벌하여 주십시오.”
태자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저자들을 정말 죽일 셈인가?”
해막도는 난비의 오라버니였다. 지금은 중궁이 비어 있고 난비가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을 국구라 여기고 있었다. 실상 태자조차 그의 안중에 없는 것이다. 그가 겉치레로 웃으며 말했다.
“전하, 소관은 그저 황상의 명을 받들고…….”
“황상께선 쌍두양을 죽이라 하셨거늘 이 사람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마 저들도 요괴란 말인가?”
“전하,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쌍두양은 이들 집에서 태어났으니 이들도 요기에 물든 것입니다. 황상의 복과 백성의 안녕을 위해 신은 임무를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 집안의 죄가 크니 백 번 죽어도 마땅하지요.”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군. 그저 어미 양이 쌍두양을 낳았을 뿐인데, 농민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늘에는 함부로 살생하지 않는 덕이 있고, 황상께서도 백성을 자식처럼 아끼신다! 자네가 일을 이리 크게 벌이니 침소봉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황상께서 아시면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걸세!”
늘 오만방자하게 굴던 해막도는 태자의 꾸짖음에 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감히 윗사람에게 덤비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그저 화를 억누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자가 기둥에 묶여 숨을 헐떡이는 다섯 식구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저들을 풀어 주거라.”
사병들은 태자의 말에 서둘러 그들을 풀어 주었다. 바닥에 눕혀진 일가족 다섯 명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장 몸을 웅크렸다. 또다시 맞을까 봐 겁이 난 것이다. 백천범도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사병들이 막아섰다.
“무얼 하는 것인가. 이 군사 나리들이 일하는 거 안 보이나?”
태자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궁의 사람이니 안으로 들여보내거라.”
그에 사병들은 곧장 태도를 바꿔 보였다. 그들은 미소까지 지으며 안으로 드시라는 손짓을 했다.
백천범은 안으로 들어가며 내부를 살폈다. 벽 옆에 아주 작은 양 머리 하나가 있었고 나무 아래에는 크고 작은 두 마리 양의 시체가 있었다. 머리는 전부 무엇인가에 찍혀 있었다. 작은 양의 목은 나무의 잔가지 같았고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한 번 훑고는 서둘러 태자 곁으로 갔다. 바닥에 있는 일가족을 바라보니 상처가 심각했다. 그때, 별안간 입구에서 사병들이 일제히 예를 갖췄다.
“육황자 전하.”
백천범은 고개를 들고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곤청락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그 뒤엔 묵용감이 함께였다! 그녀는 입을 살짝 벌리다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묵용감의 보살핌 속에서 편안하게 지내던 그녀가 이런 참상을 언제 목격했겠는가. 분노와 슬픔이 휘몰아치는 탓에 곧바로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묵용감을 봐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던 그녀는 그저 고개만 푹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묵용감도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백천범은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마음씨를 가진 여인이었다. 자신이 고통을 받을지언정 다른 이가 고통 받는 모습은 절대 보지 못했다. 최근 몇 년간 그는 그녀에게 태평하고 안락한 세상만 보여 주었다. 추악하고 음험한 모든 죄악은 그가 그녀의 세상 밖으로 철저히 배제했다. 그런 그녀가 이런 참극을 마주했으니 분명 적잖이 괴로울 것이다.
반면 곤청락은 백천범을 보자 매우 기뻤다. 안 그래도 궁에서 전 선생을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이리 마주쳤으니 일이 잘 풀린 것이다. 괜히 궁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보다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전 선생, 그간 무탈하였는가?”
백천범이 공수하며 예를 갖췄다.
“육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곤청락은 서둘러 묵용감을 불렀다.
“황 주인장. 이자가 내가 말한 전 선생이네.”
묵용감이 머리를 살짝 조아렸다.
“전 선생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뵈니 과연 풍채가 멋스럽고 용모가 비범하십니다.”
그가 탄식하며 말했다.
“참으로 고풍스럽고 온화한 분이시군요.”
백천범은 그가 안 쓰던 말까지 쓰며 그녀를 칭찬하는 걸 듣고 빙긋 웃었다. 분명 자신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것일 테지. 그녀 또한 그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과찬이십니다, 황 주인장.”
태자는 그들의 인사치레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낯빛은 곤청락이 바라던 대로 그리 좋지 않았다. 곤청락은 태자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고 싶었다.
사실 두 사람의 원한은 이리 크지 않았었다. 그러게… 왜 막무가내로 자신의 사람까지 빼앗아 가서는……. 백천범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묵용감에게 태자를 소개했다.
“황 주인장, 이분은 태자 전하이십니다.”
묵용감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는 황자보다 훨씬 신분이 존귀했기에 보통 백성들은 그를 만나면 전부 무릎을 꿇었다. 한데 이자는 그저 공수만 해 보이는 게 퍽 불경해 보였다. 태자는 매우 불쾌했지만, 별 대꾸 없이 그저 싸늘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해막도는 평소 육황자 곤청락과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해막도는 서둘러 가까이 다가가 예를 갖췄다.
“신, 육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곤청락이 웃으며 말했다.
“부황께서 이 일을 해 대인에게 맡기셨나 보군.”
그가 마당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 잘 처리한 것인가?”
“쌍두양과 어미 양은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그가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 죽을죄까진 아니라고 분부하시어 풀어 주었습니다.”
곤청락은 늘 태자와 각을 세웠기에 곧장 눈썹을 치켜세웠다.
“자네가 자네 일을 처리하는데 다른 이가 왈가왈부할 수 있단 말인가?”
해막도는 의기양양했다. 물론 그는 육황자와 태자 사이의 불화를 알고 일부러 분쟁을 일으키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태자도 그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으니 그도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태자가 코웃음을 쳤다.
“본궁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시체가 나뒹굴었을 것이네.”
곤청락이 말했다.
“쌍두양은 흉조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저마다 갖고 태어난 운명이지요. 태자 전하께서 간섭이 너무 심한 것은 아니십니까?”
백천범은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이는 가족들을 지켜봤다. 하지만 다들 여기엔 관심이 없고 목소리만 높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죽지 않았으니 어서 의원을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해막도는 불만에 찬 얼굴로 그녀를 훑었다. 태자와 한통속으로 보이는 그녀가 영 불쾌했다. 그가 우쭐대며 말했다.
“대체 누구이길래 두 전하께서 말씀을 나누시는데 감히 끼어든단 말인가?”
좌대사라는 자의 명성은 백천범도 익히 들어왔다. 과연,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리다더니. 그녀는 방금 울타리 밖에서 상림군의 악행과 지난번 다루에서 백성들을 억압하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가 혐오스러웠던 백천범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저 눈만 희번덕거렸다.
그 눈빛에 그는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며 속이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태자의 사람에게 차마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는 병사가 쥐고 있던 채찍을 빼앗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녀를 향해 높이 들어 올렸다. 저 선생이라는 자가 저리 지키려 하니 그가 매운맛을 보여 주는 수밖에.
백천범은 재빨리 영십삼에게 눈짓했다. 그리고는 곧장 몸을 앞으로 틀어 소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해막도는 전 선생이 누구든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자에겐 채찍질을 할 생각이었다.
백천범 위로 채찍이 휘둘러지자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채찍은 백천범을 때리지 못하고 그대로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영십삼이 해막도의 팔을 꽉 움켜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