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3화
태자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전하, 제가 가서 봐도 될까요?”
“흉조인데 무엇하러 본단 말인가.”
“전 동월 사람이라 그런 말은 믿지 않아요. 그저 견문을 넓히려는 것뿐이에요.”
태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두 손을 맞잡고 가슴 앞으로 내밀었다.
“전하, 며칠간 전하께 폐를 끼쳤습니다.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었으니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태자가 입을 살짝 벌렸다. 쌍두양을 보지 못하게 했다고 곧장 태도를 바꿀 줄이야. 궁에 들어온 이후로 태자는 백천범에게 늘 예를 갖춰 대했다. 이런 일로 감정을 상하고 싶진 않지만… 그도 제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는 것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눈치가 있는 자라면 그의 말에 따를 것. 하지만 전 선생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태자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는 황태자의 노여움을 사면 어찌 되는지 모르는 것인가? 백천범은 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성가시다는 듯 그를 재촉했다.
“전하?”
태자는 버럭 화를 내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전 선생과의 관계를 끊고 싶진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 내쉬며 안색을 피려고 애썼다. 그가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생이 그리 보고 싶어 하니… 본궁이 선생을 데리고 함께 가 주겠네.”
땀으로 흥건한 손으로 비도를 꽉 쥐고 있던 영십삼은 그제야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반면 백천범은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방금 그렇게 고집을 피운 건 태자를 떠보기 위해서였다. 그녀를 궁으로 데려온 태자는 늘 예를 갖췄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 맞춰 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출궁하는 것은 원치 않아 했다. 그녀를 잡기 위해 쌍두양을 보러 가는 것조차 허락할 정도였다.
그녀는 속으로 고민에 잠겼다. 설마 그녀가 사냥터의 자객과 한패라는 걸 알고 묵용감을 낚기 위한 미끼로 삼는 것인가? 그녀를 의심하면 왜 고문을 하지 않는 걸까. 설마 잘 구슬려 입을 열게 할 생각이란 말인가?
대체 태자의 속셈이 무엇인지 좀처럼 알 길이 없었다. 그녀와 태자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그가 자신을 잡을 이유가 사냥터 사건 말고 무엇이 더 있겠는가? 태자가 한발 물러서자 그녀도 웃으며 말했다.
“태자께서 함께 가 주신다니… 소인이 정말 송구합니다. 차라리…….”
“괜찮네.”
태자는 마차를 준비하라고 분부한 뒤, 다시 백천범에게 말했다.
“본궁도 쌍두양을 본 적 없으니 이번 기회에 한번 가서 볼 생각이네.”
백천범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전하께선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태자는 그런 백천범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방금은 안면몰수하고 그를 몰아세우더니… 제 뜻을 이루니 다시 웃어 보인다.
* * *
마차 한 대가 궁문에서 빠르게 달려 나왔다. 보초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옅은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두꺼운 성벽 틈을 파고들어 갔다. 그는 손을 들어 먼 곳을 향해 손짓했다.
저 멀리 옥척 위, 검은 기와 위로 흐릿한 그림자가 보였다. 검은 기와에 있던 그자도 한쪽 손을 들며 손짓했다.
마차는 앞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마차 안에는 태자와 백천범, 영십삼이 타고 있었다. 태자는 마차에 편안히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태자란 자가 이방인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엄청난 비웃음을 살 것이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 처음 백천범을 보았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똑 닮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불가사의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그는 백천범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줄곧 예를 갖춰 대해 주었다.
백천범은 발을 걷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궁에 들어온 지 고작 며칠이었지만 체감 상 몇 달이 흐른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황궁은 전부 비슷한 듯했다. 궁에 갇혀 있으면 마음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궁에 속해 있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십여 년간 궁에 머물렀다고 해도 바깥에만 나오면 마음이 유달리 편안했다.
영십삼은 그녀 옆에 앉아 습관적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그는 처음에 마마를 어떻게 해서든 궁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상과 마마가 재회하던 그날 밤. 황상은 마마가 궁에 있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지금 황상 곁에는 감시하는 이들이 있으니 상황이 더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황상은 떠나기 전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탁했다.
“십삼, 마마를 잘 부탁한다.”
황제가 간곡한 말투로 말하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영십삼은 크게 감동했다. 죽을 각오로 임하는 것 외에는 달리 자신의 마음을 보여 줄 길이 없었다. 설령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마마만큼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게 할 것이다.
* * *
마차가 교외로 향할 때, 묵용감은 화양부를 찾아갔다. 곤청락은 금수포목의 황 주인장이 왔다는 소식에 급히 옷자락을 걷고 밖으로 걸어갔다. 그날 함께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제법 마음이 잘 통했다.
하지만 곤청락은 묵용감이 조금 오만하다 생각했다. 권세에 빌붙기 싫어서 일까? 황자인 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하는 것도 영 이상했다.
곤청락의 저택에는 문객이 수도 없이 많았기에 그가 지금껏 겪은 사람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황 주인장이 뛰어난 능력을 갖춘 자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런 자를 제 편으로 끌어오면 필히 이득이 될 터. 그는 황 주인장에게 예를 갖춰야 된다는 생각에서 직접 문 앞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곤청락이 긴 모퉁이를 돌자 머슴이 묵용감을 안내해 들어오고 있었다. 묵용감은 멀리서 공수하며 밝게 인사했다.
“전하, 이리 찾아와 폐를 끼치는군요.”
곤청락이 대꾸했다.
“폐라니, 황 주인장이 오는 건 본 전하의 체면을 세워 주는 일이지. 어찌 그리 정 없는 말을 하는 것인가.”
묵용감은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전하, 성 외곽에 쌍두양이 나타났다는데… 알고 계십니까?”
곤청락은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흉조를 굳이 무엇 하러 언급하는가?”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그저 호기심이 생겨서요. 한번 구경을 가 보고자 하는데 듣자니 주변에 울타리를 둘러 놓고 출입을 막아 둔 상태라고 하더군요. 해서 전하께 청을 드리러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곤청락은 조금 의아했다.
“다들 피하려고 난리인데… 자네는 부정을 탈까 걱정도 되지 않는 것인가?”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지 않습니까. 전 양기가 짙어 부정 따윈 걱정되지 않습니다.”
곤청락은 잠시 망설였다. 묵용감에게 빚을 진 게 있으니 응당 기회를 빌려 갚아야 했다. 하지만, 이 일은…….
“전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듣자니 많은 이들이 신기한 마음에 찾아가고 있다 합니다. 다른 전하께서도 일행과 함께…….”
“다른 전하라니?”
곤청락이 물었다.
“누가 갔단 말인가?”
묵용감이 웃으며 대꾸했다.
“잘은 모릅니다. 오늘 가게에 온 손님에게 들은 소식입니다. 전 그저 다른 전하께서도 가셨다면 육황자 전하께서도 가실 줄 알고 이렇게 청을 드리려 찾아온 것입니다.”
그가 전하려는 의도는 이것이었다.
‘다른 황자는 가는데… 육황자 전하는 가지 못한단 말인가?’
곤청락이 수행원에게 말했다.
“가서 알아 보거라. 어느 전하가 쌍두양을 보러 갔는지.”
그에겐 오직 태자만 예의주시하는 비밀 보초가 있었기에 굳이 물으러 가지 않아도 곧장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약 삼 각 전에 태자 전하께서 성문을 나서셨습니다.”
곤청락은 곧장 명을 내렸다.
“마차를 준비하라. 외곽으로 갈 것이다!”
묵용감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태자와 관련 된 일이라면 육황자의 반응이 빨랐다. 이리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성격이니, 몽달 황제도 그를 지금껏 왕에 봉하지 않았을 터. 태자에게 골칫거리를 주려는 게 아니라면, 무슨 이유이겠는가? 육황자는 자신이 누군가의 무기로 쓰이는데도 전혀 알지 못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몽달 황제와 도원곡 주인은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누군가 한 수 위를 차지하기만 하면, 그는 백천범을 데리고 이 바둑판 위에서 벗어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영십일의 해독제를 구할 수 있는 방도만 찾으면 되었다.
* * *
태자의 마차가 성 밖을 빠져나왔다. 창밖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말은 신나게 초원을 달렸고, 이따금 보이는 물웅덩이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백천범은 마차 창문에 엎드려 먼 하늘에서 커다란 새가 선회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래로 내려오다 또다시 선회하며 날아오르는 새의 움직임에 그녀는 넋을 놓았다. 그녀는 저 새가 너무도 부러웠다. 만약 그녀도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라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묵용감 곁으로 날아갈 수 있을 텐데.
마차는 또다시 한참을 달렸다. 저 멀리 갑옷을 입은 사병들이 에워싼 가옥 한 채가 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발꿈치를 들고 힐끔힐끔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쌍두양이 있다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마차가 멈춰 서자 영심삽이 서둘러 내려 백천범에게 손을 건넸다. 하지만, 백천범은 이미 훌쩍 뛰어내린 뒤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웃는 백천범의 모습에 영십삼은 할 말을 잃었다. 이리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다 발을 다치기라도 하면 어찌하시려고…….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들렸다. 백천범은 서둘러 그들 곁으로 달려갔다. 울타리 사이로 보니 안은 피투성이였다.
일가족으로 보이는 다섯 사람이 기둥에 묶여 있었는데 전부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 어른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여자아이마저 기둥에 묶여 있었고, 어린아이는 고개를 기울인 채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옷은 이미 너덜너덜 찢겼고 피부도 다 터져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채찍질은 멈추지 않았다.
백천범은 어머니로서 차마 이런 참혹한 광경을 지켜만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서늘한 눈빛으로 태자에게 물었다.
“어째서 저자들을 때리는 것인지요?”
태자는 백천범의 서늘한 눈빛에 괜스레 뒤가 켕겼다.
“악귀를 쫓는 거라네. 저자들에게 붙은 부정을 때려잡는 것이지.”
“때려죽이려는 건 아니겠지요?”
“버틴다면 죽진 않을…….”
“전하께선 저 아이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백천범이 저리 몰아붙이며 추궁하자 말문이 막혔다. 주위에 있던 백성들이 작게 쑥덕거렸다.
“그만 좀 때리지. 저러다 다 죽겠네!”
“가여운 다로파多魯巴가족들……. 정말 봉변이 따로 없구만.”
“양은 이미 죽었는데 왜 사람들을 때리는 거예요?”
“노인과 아이만이라도 풀어주시게. 부처님이 보고 있다고!”
“하늘이 노해서 저 악인들을 처단할 거예요.”
백천범이 차가운 눈빛으로 태자에게 물었다.
“백성들이 하는 말 들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