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931)화 (930/1,192)

제931화

묵용감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걷다가도 갑자기 한쪽에 서서 바보처럼 웃는 걸 반복했다. 영십구는 이상한 그의 모습에 어쩔 줄을 몰랐다. 반면 영십일은 묵용감의 눈동자에 담긴 따스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분명 황후 마마에 대한 생각 중이실 터. 어젯밤 필시 아름다운 추억을 쌓으셨을 테니 황상께서는 여운에 젖어 계시는 거겠지. 하지만 지금 거리엔 수많은 이들이 오고 다녔고 암암리에 그들을 감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역시 아쉬움을 안고 묵용감을 여운 속에서 깨워 주는 수밖에 없었다.

“노야, 그만 돌아가시지요.”

묵용감은 정신을 차리고 허전한 미소를 지었다. 도원곡 주인에 대해 생각하다가 어젯밤 그녀와의 아름다운 시간을 떠올리고 만 것이다. 그가 애써 태연한 척 헛기침을 했다.

“그래, 그만 돌아가자꾸나.”

그는 또다시 백천범이 해 주었던 말을 되짚었다. 만약 그녀의 말이 맞다면,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몽달 황제였다. 황자가 문객을 모집하는 일에도 그는 개의치 않고 육황자와 태자의 대립을 즐기는 것 같았다. 육황자를 왕에 봉하지 않은 것은 태자를 견제하기 위해서일 테고, 이는 곧 그가 태자를 꺼린다는 의미일 터.

몽달에는 지금의 태자 전에 또 다른 태자가 한 명 더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네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이전의 원후元後 또한 태자를 뒤따라 죽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전 태자의 뒤를 이을 몇몇 황자와 그들의 모친도 전부 죽었다. 그 후, 몽달 황제는 계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 계후도 죽음을 피해갈 순 없었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야 지금의 태자가 책립됐다.

권력 다툼 속에서 사람이 목숨을 잃는 건 그리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이상한 부분은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간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수도 없이 목격한 그조차도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왕으로서 이렇게 많은 이가 한꺼번에 죽는 이유는 어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도원곡의 주인은 분명 이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고, 죽은 이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자는 그때 죽은 줄로만 알았던 한 사람일 수도 있다.

원후를 죽이고, 태자와 황자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제뿐. 도원곡 주인은 몽달의 황제를 증오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여 몽달 황제와 맞서려는 것일 테다. 동월과 몽달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 또한 그 계획 중 하나였다.

사광후가 ‘틀렸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황위를 다투려는 게 아니라 복수를 하기 위함이니까. 도원곡 주인은 복수를 위해 이 모든 걸 꾸민 것이다.

태자의 나이를 따져 보면 적어도 삼십 년 전 일일 것이다.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감춰져 있던 비화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그때쯤 북쪽 국경 지역 군영에 있었다. 당시 와도성에서 몽달 황제와 멀리서 마주 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겨우 십 대였고, 몽달 황제도 매우 젊었다.

그때 몽달 황제는 성루 위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성루에 사람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그가 황제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던 건 다른 이들과는 다른 군주의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말에 올라탄 채 몽달 황제를 올려다보았고 몽달 황제는 성루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모래 바람이 그들의 사이에 휘몰아쳤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응시했다. 지금까지도 그는 몽달 황제의 눈빛을 똑똑히 기억한다. 예리하게 빛나던 그자의 검은 두 눈망울은 누구보다 당당했다.

그는 사냥터에서 보았던 몽달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리가 하얗게 세긴 했지만, 여전히 체격이 곧았고 위엄이 느껴졌다.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천천히 하나로 합쳐졌다. 시간이 가도 그때의 위엄은 여전해 보였다. 그런 그는 왜 자신의 아들을 잔인하게 죽여야 했을까.

그는 영십일이 월아에게서 들은 소식을 떠올렸다. 도원곡이 대략 이삼십 년쯤 되었다고 하니 기간이 딱 맞았다. 아마 그 당시 죽임을 당했던 사람 중 하나가 운 좋게 도원곡으로 숨어들었을 터.

그자는 내면이 매우 강하고 기문둔갑에 능하며 지략도 뛰어났다. 또 정예병을 육성하는 것도 매우 중시했다. 그는 수십 년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고 도원곡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상갑 등급의 아이들을 길러내고 그들에게 임무를 수행하게 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삼십 년 동안 도원곡에서 배출한 사람들은 얼마나 되면 그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들은 강으로 흐르는 물처럼 소리 없이 몽달 각지로 흩어졌을 것이다. 평범한 백성으로, 그들과 같이 신분을 위장한 상인으로, 또 일부는 조정과 군영에 섞여 있을 터.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 서 주인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몽달의 천지가 뒤바뀌고 새로운 날이 도래하는 날을.

몽달 황제는 도원곡이란 존재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겠지. 하루하루, 일 년 또 일 년의 세월이 흐르며 도원곡의 주인은 그렇게 몽달 황제의 눈 밑까지 복수의 불씨를 묻은 것이다.

묵용감은 이번 일로 청천벽력 같은 대재앙이 오리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로서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개입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는 그저 동월의 백성들을 구해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도원곡에 붙잡힌 자들이 그곳에서 떠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원곡의 비옥한 토지에는 무엇을 심든 별 탈 없이 잘 자라 주었고, 기후 조건도 적당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없었고, 빈부격차의 불공평함도 없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자급자족의 노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마치 원래의 터전에서 더는 살 수 없어 새로운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처럼 그곳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려 했다.

도원곡에서 탄생한 새로운 가정과 새 생명은 그들에게 희망이었다. 도원곡에 한 번 발붙인 이들은 나가기 싫어한다던 방 관리의 말이 옳았다.

그곳은 국경의 구분이 없었다. 동월인이든 몽달인이든 모두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을 수 있었으며 불공평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그곳은 말 그대로 무릉도원이었다. 도원곡 주인은 사람을 다루는 재주가 있어서 어떻게 하면 민심을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능력 덕분에 몇십 년간 도원곡의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

도원곡의 주인이 이런 큰 계획을 짠 게 사실이라면, 그가 처음 도원곡에 들어갔을 때 나이가 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린 나이었다면 이렇게 큰 계획을 세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말인즉슨, 그는 죽은 네 명의 황자 중 한 명이 아니란 이야기다. 분명 황자와 매우 가까운 자이겠지.

물론 또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누군가 네 명의 황자 중 한 명을 구했고 그를 도원곡으로 데려간 것이다. 그자가 온 힘을 다해 황자를 가르치면서 이 모든 걸 꾸몄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황자가 장성한 뒤에 도원곡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는 뒷짐을 진 채 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느덧 말 시장에 다다랐다. 이 시장에선 주로 가축을 거래했다. 말이나 소, 양, 낙타 따위의 다양한 가축들을 말이다.

그때, 길가에 있던 조랑말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몽달의 말은 대부분 덩치가 크고 튼실했다. 초원과 사막을 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조랑말은 산길을 잘 걷고 인내력이 좋다. 몽달은 지세가 광활하고 초원과 사막이 많지만 산림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주로 사막이나 초원에서 생활하는 몽달 백성들이 조랑말을 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묵용감은 조랑말을 유심히 살폈다. 체형이 나쁘지 않았고 털빛도 붉은 대추빛을 뿜어냈다. 크기가 작긴 해도 네 다리는 튼실했고 까만 눈망울이 촉촉한 게 매우 온순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조랑말을 백천범에게 선물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지금 묵용감은 상인 신분이었기에 주머니에 돈이 두둑했다. 그는 더 묻지 않고 조랑말을 구입했다. 영십일이 돈을 건네고 고삐를 잡는데, 별안간 누군가 소리쳤다.

“잠깐!”

영십일은 소리가 들리는 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수행원 복장을 한 웬 사내였다. 그가 말 주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일단 팔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어찌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오?”

말 주인은 얼굴을 붉히며 멋쩍게 대꾸했다.

“주문을 하신 건 아니잖습니까. 손님이 오셨는데 팔아야지요.”

“그럼 안 되지.”

사내가 몸을 옆으로 비켜서더니 뒤를 한번 바라보았다.

“우리 전하께서 필요로 하시는 말인데… 감히 다른 이에게 팔다니?”

전하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말 주인은 사내에 뒤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곳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수행원이 더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육황자 전하이시다.”

이내 조랑말을 가리키며 곤청락에게 말했다.

“전하, 저 말입니다. 괜찮은지 한번 보시지요.”

곤청락이 말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말 주인은 굽실거리며 웅얼거렸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거라 진작 말씀해 주셨다면, 소인이 감히 다른 이에게 파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전하, 지금은…….”

그가 손에 든 은표를 바라보며 뜨거운 감자라도 쥔 듯 쩔쩔맸다. 하지만 말 주인이 난감해하든 말든 수행원은 으스대며 영십일이 쥐고 있던 고삐를 잡았다. 하지만 영십일은 고삐를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한 수행원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감히 우리 전하께 맞서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이냐?”

영십일이 냉소를 지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거늘. 돈을 냈는데 강탈을 하려는 것이오? 이는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오!”

묵용감은 이 논쟁에 끼어들지 않고 있다가 한쪽에 서 있는 곤청락을 보며 웃었다.

“전하께서 먼저 고르셨다고 하니 이 말은 응당 전하께 드려야 한다.”

곤청락은 묵용감을 빤히 바라보았다. 옷차림이 멀끔하고 기품이 범상치 않은 사내였다. 그는 그와 깊이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리께선 도리를 잘 아는 분 같은데… 성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묵용감이 공수하며 대꾸했다.

“저는 황 씨입니다. 성에서 금수포목을 운영하는 주인장이지요.”

곤청락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금수포목의 황 주인장이었군. 만나게 되어 참 반갑네. 금수포목은 패륜이에서 아주 잘 나가는 가게가 아닌가? 이미 가게를 다섯 곳이나 연 것으로 아는데. 황 주인장의 장사 실력이 참으로 탄복스럽군!”

“과찬이십니다, 전하. 전 그저 하찮은 장사꾼인 것을요. 그리 칭찬하실 존재가 못 됩니다. 한데 이 형제께서는.”

묵용감이 그의 수행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눈썰미가 좋으십니다. 단번에 이 말이 좋은 걸 알아보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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