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0화
백천범은 눈을 비볐다.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정녕 하늘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란 말인가? 그도 아니면 너무 그리운 나머지 환상이라도 보이는 것인가! 백천범은 한참 동안 지붕 위를 바라보았다. 마치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듯 예리한 눈빛이었다. 한참 뒤, 백천범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이제 그만 자야겠습니다.”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시종은 예를 갖추고 그녀가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옥척에 서 있던 묵용감은 천천히 멀어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금 갈고리를 거꾸로 걸었다. 마치 벽호壁虎(도마뱀붙잇과의 하나)가 천장에 붙은 것처럼 그는 그녀의 발소리를 따라 천장을 탔다.
방 안으로 돌아온 백천범은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묵용감이 소리도 없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바로 창문을 닫은 그는 몸을 돌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보이다 이내 한 발짝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다리에 침대 가장자리가 닿았다. 바로 몸을 날린 묵용감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풀썩 넘어졌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디로 도망가는 것이오? 범아, 그대가 정말 보고 싶었소.”
그는 다급히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백천범은 그에게 자신이 품었던 그리움에 대해 알려 주고 싶었지만, 입에 담은 말이 모두 그의 입술 끝에 가로막혀 버렸다. 그 대신 그녀의 입에선 노래 소리처럼 작게 흥얼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입맞춤을 마구 퍼붓던 묵용감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를 놓아 주었다. 그는 그녀를 품고서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눈도 깜짝이지 않고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야위었군.”
백천범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전 오히려 살이 찐 거 같은걸요. 몽달의 우유차를 매 끼니 때마다 마셨더니 배가 나왔어요. 몽달 여인들은 대부분 튼실하잖아요. 전 그렇게 되고 싶진 않은데 말이에요.”
묵용감은 그녀의 옷 안으로 손을 넣어 보드라운 살갗을 매만졌다. 그녀의 말대로 살이 쪘는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는데, 막상 보드라운 살갖의 감촉이 느껴지니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범아, 그대도 내가 보고 싶었소?”
“보고 싶었죠. 매일 밤, 잠들지 못할 정도로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방금 하늘에게 당신이 보고 싶다고 기도했는데… 정말 눈앞에 나타났지 뭐예요.”
백천범이 애교를 부리며 그의 품 안에서 꿈틀거렸다.
“설마 제가 마음속으로 한 말까지 다 들으신 거예요?”
“들었소.”
묵용감이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낮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나는 다 알 수 있소. 우린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잘 맞는 부부니까…….”
* * *
사찰의 종이 진시가 됐음을 알렸지만 묵용감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창밖에서 목을 쭉 빼고 기웃거리던 사광후는 결국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영십구가 곧장 손을 뻗어 그를 막으며 쌀쌀맞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사광후가 웃으며 물었다.
“노야께서는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는지요?”
영십구가 그의 얼굴을 훑으며 물었다.
“노야의 수면까지 관여하는 것이오?”
사광후가 목을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닙니다. 평소 노야께서 이 시간만 되면 기침하시는데 오늘은 어쩐 일이신지 궁금해서요. 어디가 불편하신 건 아니겠지요?”
영십구가 안색을 굳히며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아침 댓바람부터 우리 노야를 저주하는 것이오?”
“제가 어찌 감히.”
사광후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영십구가 칼에 손을 올리자 사광후는 바로 화재를 돌렸다.
“어젯밤 십일 형제는 출타하였습니까?”
영십구가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묻고 싶은 거라도 있소?”
사광후가 멋쩍게 웃었다.
“돌아오는 걸 못 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침에 돌아왔소.”
“어딜 갔었는데요?”
“여인을 찾아갔소.”
당황한 사광후는 말을 얼버무렸다.
“흐흐, 십일 형제가 그런 데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고 문 앞을 지켰다. 영십구가 그를 흘기며 물었다.
“아직도 할 일이 남았소?”
“노야께서 일어나시길 기다릴 겁니다.”
“대체 무슨 볼일이 있길래?”
“노야께서 일어나시면 말씀드릴 겁니다.”
영십구가 미간을 찌푸렸다. 영십구는 사광후가 겉으론 공손하지만 은근히 제 뜻을 쉬이 굽히지 않는다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광후와 영십구의 대치가 이어졌다. 그때 방 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영십구가 곧장 안으로 들어가 장막을 걷었다.
“노야, 일어나셨습니까?”
묵용감이 대꾸했다.
“그래, 사 관리 목소리가 들리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사광후가 안으로 들어와 멀찍이 서서 말했다.
“소인이 시끄럽게 굴어 노야의 숙면을 방해했군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묵용감은 그런 그의 태도가 조금 가소로웠다. 방 안에 묵용감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뻔뻔하게 저런 말을 하다니. 묵용감이 옷을 걸치며 물었다.
“말해 보게. 무슨 일인가?”
“그것이…….”
사광후가 말했다.
“오늘 아침 성 안에 있는 오래된 홰나무가 별안간 스스로 타 죽었습니다.”
묵용감은 그가 왜 이 말을 전한 것인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홰나무가 불타 죽은 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노야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이 홰나무는 아주 오래된 나무입니다. 수백 년간 백성들이 이 홰나무 앞에서 향불을 바치며 가호를 받았기에 신수神樹라고 불리지요. 그런 나무가 이렇게 불타 버렸으니, 다들 겁을 먹었습니다. 머지않아 황제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묵용감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황제가 바뀐다? 하면 자네들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던가?”
사광후는 그의 거침없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여기 다른 이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말하겠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자네들의 주인은 몽달 황제 자리에 앉으려는 것이지?”
사광후는 안색을 굳힌 채 대꾸했다.
“노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인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묵용감이 고개를 숙이고 소매를 가다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거늘. 이리 비밀스럽게만 행동하니 참 재미가 없어.”
사광후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따뜻한 물을 떠온 여종이 묵용감의 세안 시중을 들었다. 사광후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진지하게 말했다.
“노야께서는 총명하신 분이시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주인께서도 노야께 그리 큰 임무를 맡기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노야의 추측은 틀렸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묵용감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광후의 굳은 얼굴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광후의 변화에 영십구도 골이 난 표정을 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였다. 감히 자신의 황상에게 무례하게 구는 자가 있거든 그자의 피로 삼 척의 땅을 적시리라. 하지만 묵용감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함부로 행동하지 말 것을 암시했다.
아침을 먹은 뒤, 묵용감은 두 시위를 데리고 거리 구경에 나섰다. 저 멀리 불에 타 죽었다는 오래된 홰나무가 보였다. 처음 성에 들어오면서 본 적 있는 나무였다. 기둥이 굵고 튼튼하여 한눈에 봐도 오래된 나무란 걸 알 수 있었다.
하늘로 뻗어져 있는 나뭇가지엔 알록달록한 끈이 묶여 있었다. 몽달의 백성들은 나무 앞에 과일을 차려놓고 향을 피워 제사를 지냈었다. 흩날리는 하얀 연기 속에서 기도를 올리는 백성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지금 홰나무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 버렸다. 그 주위로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와 있었다. 누군가는 이 일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해댔고, 또 누군가는 무릎을 꿇고 나무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묵용감은 사람들 무리에 서서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신수가 스스로 불타 죽다니,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닐세.”
“그러니까 말일세. 엄청난 재난이 올까 두렵다네!”
“수백 년간 멀쩡하던 나무가 어찌 이렇게 불에 탔단 말인가?”
“신수가 노한 게 아니겠나?”
“두고 보게. 신수가 불에 탔으니 조만간 괴상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네.”
“천재와 인재는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지. 내일 백도탑白圖塔에서 향을 피우는 게 어떻겠는가? 불공을 드려 온 집안의 평안을 비는 걸세.”
홰나무는 여전히 검은 연기를 뿜어 댔다. 그 바람에 패륜이가 매캐한 연기로 휩싸여 있었다. 묵용감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몸을 돌려세우고 자리를 떴다. 수백 년 된 나무가 아무런 까닭도 없이 불이 나다니… 하늘의 뜻인가? 불길한 징조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 꾸민 짓이란 말인가?
그때 건너편에서 묵용감의 눈에 익숙한 그림자가 잡혔다. 그 그림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번쩍이다가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묵용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무래도 이 일은 뒤에서 누군가 수작을 부리는 듯했다.
그는 도원곡의 주인이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는 네 황자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젯밤 그는 백천범에게 제 생각을 말해 주었다. 그의 추리를 들은 백천범은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형제간의 권력 다툼이라면… 어째서 사냥터에서 황제를 공격하라고 한 걸까요? 설마 아버지의 뜻에 반대한다는 표현을 하는 걸까요?”
그녀의 질문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어째서 그들의 목표는 다른 황자가 아닌 황제란 말인가! 응당 대적해야 할 사람은 태자가 아니던가? 백천범이 말했었다.
“태자는 세 살에 동궁에 들었어요. 그땐 나이가 어려서 암투라는 걸 몰랐겠죠. 하지만, 그가 태자가 되기 전 계후繼後가 죽었고 그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였죠. 황제는 결국 그를 태자로 책립했어요.
태자가 황제의 관심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말도 안 되는 게 많아요. 육황자는 태자보다 두 살이 더 어린데, 일찍이 저택을 하사받아 출궁했죠. 그런데 왕에 봉해지진 않았어요. 그 뒤의 황자 몇 명은 전부 다 왕으로 봉해졌는데 말이에요. 백성들도 불안한 태자의 동궁을 육황자가 대신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거래요.
그리고 육황자가 문객을 널리 구하는 것도 황제 입장에서는 꺼림칙한 일이잖아요. 하지만 황제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육황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내버려두었대요. 대체 황제의 속셈인 뭔지 전혀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묵용감은 깜짝 놀랐다. 백천범이 이리 세세히 분석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다. 눈살을 찌푸린 모습이 정말 진지해 보이면서도 또 조금은 우스웠다. 그가 백천범을 품에 안고 입을 맞췄다.
“훌륭하오. 사건의 내막을 그리 다 파악할 줄도 알고. 만약 그대가 사내였다면 분명 포리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거요.”
그의 품을 파고들던 백천범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여인이라고 얕보지 마세요. 여인도 포리는 될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한 송이 꽃처럼 어여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를 껴안은 채 진한 입맞춤을 나눴다. 결국 밤새 그녀와 사랑을 속삭인 그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